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유익 | 벧전 4:12-19 | 문병호 목사 | 20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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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2. 주일낮예배 설교  |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유익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베드로전서 4:12-19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2-9).




녹취록


1.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


     종려주일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을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시는 그때 종려가지를 꺽어서 흔들고 던지고 예수님이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그때 고난의 여정, 마지막 예루살렘의 입성에서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 그 찬송을 우리가 기념하는 그러한 주간입니다. 이미 곳곳에서 사순절이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특히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고난주간이라고 하여 금요일은 성금요일이라 하여 이름을 붙이고 특별히 기념하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절기나 날에 의가 있는지를 넘어서 고난주간을 우리가 어찌 한 주간만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죽고 살아나는 그 생명과 날마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생활, 살아남과 살아감이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고 은혜고 값인데 어느 한 날을 지정하는 것이 어떤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연약함으로 어느 하루를 더 새긴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당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초하는 것입니까. 세상에 고난을 자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은 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많은 경우에 고난을 당한다기보다 자초하는 것처럼 기록하는데 이것은 자기 학대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끝내는 자살도 하고 그런 비정상적인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임박한 고난이 있는 것을 성령의 지시로 보고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들어가는 것은 마지못해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과 역경과 수치와 치욕을 바라보고 들어가는 것은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본문에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고난의 스케줄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 고난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닳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닳지 않고 어떻게 빛과 맛을 내겠습니까. 녹지 않는 소금이 없습니다. 타지 않는 등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를 마모시키고 닳게 합니다. 스케이트도 그냥 타는 것 같아도 날이 마모됩니다. 날을 마모시키면서 빙상에 속도를 내는 것이지요. 무엇이든 우리가 닳지 않고 되는 것이 없습니다. 희생 없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아름답게 이루는 것은 배후에 눈물과 고통이 있습니다. 희생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넓게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은 박해로부터도 오고 극단적인 순교로부터도 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고난을 유익한 것으로 여깁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사도 바울을 음해해서 투옥시키는데 그는 이것도 복음의 진보가 되니 감사하다고 합니다. 본인이 그 먼 길을 나선 것도, 스데반이 집사가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려고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이 복음의 진보가 된다면 그게 마땅한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종 삼으시고 자녀 삼으시고 사도 삼으신 목적이라면 죽음이라도 유익한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는 것은 내가 죽지만 그 죽는 것이 내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생명을 가장 귀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목숨을 귀하게 보십니다. 우리의 존재가 생명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숨을 잃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 모순되어 보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했는데 생명을 잃는 것,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연유입니까. 그렇게 본다면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인데 이제는 내가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내가 목숨을 잃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라 유익인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하려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고생을 고난으로 여겨주심


     베드로전후서는 고난의 서신아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임박한 고난을 앞두고 네로의 짙은 박해를 앞두고 베드로가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환란과 역경의 고뇌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변화산에서 보여 주신 광채가 그 영광이 있습니다. 고난을 얘기하지만 영광이 가득한 책입니다. 임박한 고난에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바라보는데 그 절정이 본문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광을 나타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며, 그 고난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은 그 영광의 영이 너희 위에 있다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 천사의 찬송이 있고 하나님의 하늘 위로 뻗쳐지는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영광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한 16절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수치스러움이 필히 따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번 주에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는 면목동에서 설교를 했고 목요일은 울산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총회에서 면려회라고 하여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구미에 가서 종일 말씀을 전했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한번은 이야기합니다. 어떤 분은 목사라고도 교수라고도 부르는데 바깥에 나가면 교수라고 많이 부릅니다. '문 교수님은 어떻게 오라는 곳을 다 가는지' 물어봅니다.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우면동에 가면 전도를 해도 사람을 만나기 그렇게 힘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라도 제 말씀을 듣는다고 기다리는데 제가 어찌 안 가겠냐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 저의 건강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조금 덜 자도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과로해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저에게도 고난의 영광의 비밀이 조금이라도 있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조금 더 소진시키고 태우시면 저를 하나님이 조금이라도 더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에서 머리를 쓰면 하나님이 계획을 주고 경영을 주고 뜻을 세우게 하실지 몰라도 많이 움직일 때 하나님이 오히려 우리의 일들을 더 진행시켜주십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이 과연 제게 있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난이라는 것이 제 삶에 별로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기쁘고 즐거웠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고난이라고 불러주신 것 같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이 어찌 고난입니까. 자면 뭐하고 쉬면 뭐하겠습니까. 주를 위해 살고 뛰고 전할 수 있는 데까지 전하고 뜻 주시고 믿음과 건강과 마음을 주시니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움직이는 것이지 하나님이 뜻하지 아니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여기에 왜 창조주가 나오나요.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날마다 내 세포조차도 새롭게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마이너스가 아닙니다. 그저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를 키워가고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쁘신 창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소멸하고 써버리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우리를 더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고난의 영광, 고난의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이 큰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옥중에 갇힌 선교사님의 글 중 '고난의 비밀'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값을 치른 것이라면 우리의 고난은 은혜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으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 그것을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고난이라고 해 주십니다. 



3. 도리어 주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게 낫다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면 그저 죽고 그저 구원에 받으면 좋은데 왜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합니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4, 17).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인생에는 어쨌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느냐,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본문 15절에도 나옵니다.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으로는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주를 위한 고난이 어느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살다 보면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조금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런 위로를 삼습니다. 내가 죄를 위하다가 막막하면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이냐고 말입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오해받고 주의 일을 하다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주의 일 하는 분들은 칭찬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에 칭찬이 따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혹 그러거든 얼른 피하십시오. 되도록이면 숨겨야 하고 말 안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급이 있습니다. 오늘 일하고 내일 자랑할 것 같으면 아무 깊은 즐거움이 없습니다. 주의 일은 분명히 고난이 따릅니다. 고난이 없는 주의 일이 없습니다. 주의 일을 하다가 칭찬 받을 생각 하지 마십시오. 애초부터 칭찬 받을 생각 하지 마십시오.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했지 사람에게 칭찬 받을 일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내 안에 애통함이 있고 숨이 막히고 관절이 어긋나는 것 같고 온 몸에 마비가 나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끊어지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억울함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니 밤새 예레미야가 우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대로 전하고 고난도 박수 받으면서 하면 좋겠는데, 마치 독립운동 하는 것처럼 그러면 좋겠는데 주의 종은 그런 일조차도 없습니다. 칭찬조차도 없고 역사책에도 남지 않습니다. 그저 주의 종은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인 것은 하늘의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결산하지 않습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육체로는 돌로 침이 있고 육체로는 돌로 치고 모욕하고 심판을 받는 것이 있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삶이 있게 하리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세계에서는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게 즐거운 일입니다. 악취가, 수치가 친구가 돼서 뭐하겠습니까. 하늘 영 가운데 살고 그 즐거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빛에 속한 것 의에 속한 것 영원한 생명에 속한 것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으로 우리를 온전케 한 것은 우리가 어둠의 세계, 죄의 세계, 죽음의 세계에서 박수치며 살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뻐하며 즐거움이 있게 하려 한 것이라는 말씀이 전해지니 왕족과 헬라인과 귀부인이, 끝내는 왕이 믿은 것이 일어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의 영화가 보여준 것은 온갖 세상의 재물이 다 로마로 들어오는데 그 로마 사람들의 부패함과 타락함입니다.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음란함이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 세상의 박수 친다고 즐거워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짐승과 사람을 싸움붙여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짐승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습니다.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 음란한 마음이 경기장에서 일어났습니다. 우리 인생의 박수와 함성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늘나라에서 기뻐함이 있어야 합니다. 



4. 그리스도 안에서 가시도 유익하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예수를 믿지 않아도 고난이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고난이 다 있습니다. 가진 자일수록 고난이 있습니다. 도무지 기준이 없습니다. 정치인, 부자의 자녀들이든 마약하고 도무지 질서와 기쁨이 보이지 않습니다. 의사를 해야 합니까, 판사를 해야 합니까, 검사를 해야 합니까. 우리 자녀들이 흠모할 것이 무엇인가요. 세상에도 가득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죄의 삯이 있습니다. 고난의 극단은 죄의 삯을 치르는 것인데 믿지 않는 자들에게 더 큰 고난이 있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가면 주를 위한 고난은 즐거움입니다. 주를 위한 고난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고난에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사탄의 가시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가시가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가시가 있는 사람은 최소한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항상 조심하고 염려하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가시를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염려하고 조심할 때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가시 안에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작은 가시를 못 박습니다. 저도 지난 주에 발에 뭔가 있는데 보이지도 않고 뺄 수도 없던 가시가 있었습니다. 뛸 수가 없는 이런 가시가 하나님의 뜻을 쫓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에 증인으로 참여합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벧전 5:1). 



5.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에는 상급과 성화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라, 그것은 내 고난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울며 씨를 뿌리셨는데 우리는 그저 우리 육체에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하나님이 이 땅에 약속하신 상급의 표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우리는 천국 상급을 바라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 가시를 주시되 가시 안에 생명의 생활의 씨를 담으셨습니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회개가 없는 구원이 없듯 회개할 때 맑은 눈물이 솟아납니다. 회개할 때 쓴 눈물이 바가지로 흘러내리지만 우리 안에서 다시 맑은 물이 다시 내 목에 차오르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고 생명과 상급이 있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그 자취를 다라오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를 위한 고난이요 우리의 고난은 그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믿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그래서 육체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를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벧전 4:1). 저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육체의 고난,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어려움, 고난이 죄를 그쳤다고 합니다. 고난은 향기입니다. 고난은 빛입니다. 고난은 우리가 죄를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난은 죄를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가시가 찔러 향기가 나듯 고난은 그런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향기가 납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향기롭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소금에 되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향기를 나게 하신다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