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 | 고전 15:20-22 | 문병호 목사 | 202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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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9. 주일낮예배 설교  |  부활주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고린도전서 15:20-22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녹취록



1. 십자가와 부활


     부활이라는 말은 세상에서도 많이 씁니다. 그러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셨습니다.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죽은 척한 것이 아니라 잠시 졸도했다가 깨어난 것이 아니라 죽으셨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입니다. 없던 것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전세계가 부활절이 되면 화평과 화목을 노래하고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싸우던 전쟁도 그치고, 무기를 놓고 서로 축복합니다. 부활은 비정상적이 정상화되는 것이고 어둠에 속한 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음하던 것이 다시 소망 가운데 되살아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저 처참한 죽음에 불과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가 흘리신 피와 물은 그저 흐르는 오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으신 주님께서 다시 사심으로 그의 흘리신 피가, 물이 우리의 생수가 되고, 갈하지 않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쉼없이 솟아나는 생수가 되고, 그가 찢기신 살, 상하신 살, 그가 소제로 빻아서 드리신 십자가의 살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부활의 도를 함께 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고린도전서 1:18에 말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십자가가 부활의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으심으로 다시 사시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 우리가 생명의 길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죄로 죽은 우리가 다시 생명을 얻는 길은 대속의 길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값을 치르신 그 값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는 그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알이 그저 있으면 그저 있으되, 그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요한복음 12:24에 말씀했는데, 이것이 십자가의 도요, 부활의 도입니다. 죽어 썩어 열매 맺기 위하여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우리를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분쟁이 많고, 다툼이 많고, 자기 의가 강했던 고린도교회에 긴 편지를 쓰면서 이제 말미에 고린도전서 15장 전체에 부활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부활의 장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믿음도 헛것이요, 십자가도 헛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증인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은 후, 사도들이 전한 설교는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우리가 죽인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우리가 그 일이 증인이다. 우리가 그를 죽였습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죽인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죽으셨으니 내가 죽인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그를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인 그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부활의 역사, 우리가 이 일의 증인입니다. 부활의 증인은 많습니다. 12제자, 여러 여성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활의 증인입니다. 만삭되지 못한 자기에게 주님이 다메섹에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부활의 증인이 아니라 우리가 다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다 썩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한 번 생명을 얻는 생명의 부활의 증인이자,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그러한 생활 가운데서의 날마다의 부활입니다. 날마다의 부활이 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날마다 뜨고 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납니다. 울음이 기숙하고, 슬픔이 기숙하고, 웅크리고 우리 집에 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소망을 주셔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새벽에도 말씀을 보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면, 또한 그의 부활과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죽어서 다시 살 줄 믿고, 이제는 죽음의 종노릇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니라. 세상에 대하여는 세상에 못 박혀 죽었지만, 이제는 내 옛 사람이 사는 것, 옛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는 못 박혀 죽었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바짝 엎드리고 정말 썩는 밀알 같이 푸석푸석하고 진물이 나고 간혹은 악취조차 풍기지만,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 현상입니다. 그래서 봄날에 꽃이 있고, 여름에 열매가 있지 않겠습니까. 썩지 않고 어찌 아스팔트에서 생명이 살겠습니다. 어찌 플라스틱 같은 곳에서 생명이 살겠습니다. 바로 썩는 밀알, 옥토, 그것을 우리를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도가 그리스도의 도였고, 사도 바울은 이 도 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도 전하기를 싫어했는데,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이 부활의 도 전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누가 가장 먼저 만났습니까? 12사도가 아니라, 예루살렘으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입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다 귀신이 물러간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입니다. 구약시대 때 가장 어둠과 같은 시대가 사사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빛을 여는 것이 한나의 기도입니다. 사사시대는 암울하고 답답하고 깊은 동굴에 들어가는 것 같은데, 새로운 시대를 열며, 다윗의 등장을 예고하고, 하나님의 언약,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하며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라는 다윗 언약의 서장을 여는 것이 사무엘상 1장의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없어서 수모를 당하고, 시대도 암울하고 가정도 힘들고, 그 가운데 한나가 기도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보이실 것 같은데, 물론 베드로와 요한은 쫓아 와서 보지만 더디 믿습니다. 바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멈칫멈칫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저 멀리 갈릴리 호숫가에서 만났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최초로 전한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연구하고,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내가 그 도를 스스로 전개하고 깨닫는다고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어둠에서 빛으로, 신음에서 희락으로 그 움크림에서 활짝 기지개를 피고 그러한 모든 여건, 조건을 찢고 나가는, 무덤을 깨뜨리고 빛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부활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승천이 있고, 승천하셨기에 이제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매번 고백하듯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이 오늘 말씀의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부활


     우리 부활은 그저 관념이 아니고, 시가 아니고, 은유가 아닙니다, 상징이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부활의 가장 중요한 예표가 바로 요나였습니다. 요나가 욥다, 다시스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안온하지 않고 가장 더럽고 염산보다 더한 산이 흘러 모든 것을 녹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소화되는 곳입니다. 그곳에 요나가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모습 같은 것입니다. 다 녹여 버리고, 캄캄하고, 악취가 많고, 그러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시 요나를 살리신 예표, 그것이 부활의 가장 큰 예표입니다. 죽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예표입니다. 주님이 지극히 낮은 곳에 오신, 너희가 강보에 쌓여 누인 아기를 보리니 그것이 표적이다. 예수님이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그 표적과 죽고 부활하신 요나의 표적이 가장 큰 표적입니다. 바다 위에 걸어다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가나 혼인잔치의 기적을 일으키고 38년 된 병자를 다시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도 큰 기적이지만, 가장 큰 기적, 표적은 주님이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일입니다. 그래서 말 구유에 강보에 쌓여 누여 있는 가장 낮은 곳에 오신 겸손의 표적과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요나의 표적, 그래서 주님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고, 주님은 아무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죄 없는 몸으로 오셨지만,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부활하셔 우리의 죄를 다 가져가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이요, 부활은 빛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부활은 재창조입니다. 부활은 그저 색만 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잠깐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없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계란이 닭이 되는 것이 부활이 아닙니다. 전세계가 부활을 기념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것은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예표입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가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죽어 영혼으로만 살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육체가 만나서, 약한 것이 강함을 입고 수치스러운 것이 영광스럽게 되고 육에 속한 것이 영에 속한 것이 되고, 더 이상 썩음이 없고 그것이 바로 부활의 몸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고,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로마서 5:17 말씀처럼,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하시는 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우리는 다 약하고 허물이 많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고,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13:4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물론 만유의 만유로서 모든 곳에 계시지만, 부활하신 그 몸으로는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리고 만국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도 그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라고 고린도후서 13:4에서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어디에도 부활은 없습니다. 기껏해야 윤회, 환생을 말하지만,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뭔가 인간이 죽어 멸절되지 않고 뭔가 살아남고 존재하고 싶은 인간의 염원이 다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존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죽하면 피라미드를 만들겠습니다. 죽은 후에도 살아 있다고 하여 ‘사자의 서’를 말합니다. 죽은 사람이 뭐가 필요해서 무덤에 말을 넣고 종들을 넣습니까. 진시황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를 몰라, 가지면 가질수록 더 아쉽게 죽는 것입니다. 더 어쩔 줄 모르고 죽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가진 것은 많고 권세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무엇을 하겠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노초를 구하고 불노장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죽지 아니함도 멸망입니다. 영원한 사망의 형벌, 불못에 빠집니다. 오히려 죽음이 낫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헤어나오고 싶어도 헤어날 수 없는 사망의 값을 치르는 것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자녀인 것은 그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시키고 함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에베소서 2:5, 6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다스립니다. 



4. 부활의 권능과 승리


     여러분, 부활의 권능은 통치의 권능입니다. 그 통치의 권능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찬송했듯이, 부활의 그 권능으로 사망 권세 이기고 다시 사셨습니다. 그 통치의 권능이 우리의 권능입니다. 우리도 죽음을 이깁니다. 믿음으로 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깁니다. 우리가 죽음에 지지 않고, 더 이상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죽음에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권능이 우리에게 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매번 우리에게 어둠의 유혹이 있습니다. 죽음의 협박이 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막연한 불안,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보십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보십시오. 땅을 보십시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보십시오. 꽃을 보십시오.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여 보십시오. 십자가의 프리즘으로 봐야 꽃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꽃을 꽃으로만 보만 꽃을 숭배하게 됩니다.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고 다시 살아나는, 옛것이 지나가고 새것을 열어주십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부활의 도는 이전 것을 가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기에, 옛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외인이요 나그네요 죽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화평을 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우리에게 역사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요한복음 20:19을 보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라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샬롬’이고 신약으로 말하면 ‘에이레네’입니다. ‘peace to you’입니다. 이 평강은 빛에 거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에서 먹는 것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5. 부활의 도 1: 새 생명


     우리에게는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의 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두셔서 부활의 도를 배우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의 도가 지금 이 땅에서 역사합니다. 욕된 것을 심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을 심어 강한 것으로, 육의 몸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42-44 말씀입니다. 주를 위하여 능욕당함을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능욕당하심을 바라보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고, 예레미야도 수치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부활의 뒤바꿈이 없다면, 부활의 역전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이기게 해달라고, 영광의 자리에 금면류관을 달라고 기도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도를 알기 때문에, 예레미야와 같이 수치 당하고 능욕당하는 자리에 있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궁정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더 즐거워했다고 히브리서에서 말씀합니다. 애굽의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입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거듭남의 비밀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길을 가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부활의 권능이, 부활의 도가, 썩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밀알의 도가, 능욕스러운 것, 수치스러운 것을 심어서 영광스러운 것을 거두는 그 부활의 도, 약한 것을 심어 강한 것으로 거듭나는 부활의 도, 육의 것을 심어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도가 모든 가정마다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에는 그저 있는 것이 아니라, 쌀 한 톨이 썩어 쌀이 곳간을 채우는 그러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6:4을 보면,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우리가, 누가복음 18:30을 보면, 현세에 여러 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고 부활의 권능으로 인친 우리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 영생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세부터 영생의 복을 여러 배로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을 현세의 기준으로 헤아리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밀한 기쁨, 내 속에 기쁨, 속에서 우러나오는 은밀한 기쁨, 내밀한 기쁨이 성도의 기쁨입니다. 내 정서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석의 작은 꽃 하나가 피어나는 기쁨입니다. 옮기는 인위적인 기쁨이 아니라 창조의 기쁨, 살아나는 기쁨입니다. 사실 평생 우리의 세포가 새로 살아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 안에 일하십니다. 히브리서 1:3 만물을 붙드십니다. 만물에 부활의 권능을 주십니다. 지금 신음하는 분은 영광의 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고난을 당하는 분은 하나님이 채우시는 영화의 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몸도 성령도 부르심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라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그것을 드리시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십자가의 몸 된 교회이고 부활의 몸 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도를 전하기 쉬지 않고 땅끝까지 전했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도를 북한에, 만방에 전해야 합니다.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치하고 있는 중국과 대만, 그 배후의 미국과 일본, 또한 우리나라와 북한, 정말 이쪽이 화약고입니다. 이곳에 우리가 살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군비를 키우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불안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기를 손에 들면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무서운 것입니다. 무기를 들고 나는 안 쓴다는 양심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디도 믿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합니다. 다시 사신 주님은 모든 인류가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샬롬이라고 인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6. 부활의 도 2: 새 생활


     부활의 도는 생명만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도 거듭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에 부활의 권능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 빛이 무덤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망을 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생명의 죽음이 되므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기만 하면 예수의 생명에 동참합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죽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썩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여러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공부, 미래의 불확실성 등,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권능이 예수의 이름 가운데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 성도의 모든 삶은 죽고 살아나는 십자가의 도, 부활의 도, 그 가운데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의 권능을 주시는 것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가 상합하고 힘줄이 생기고 가죽이 생기고 살이 붙고 끝내 그 뼈다귀들이 여호와의 군대를 이루듯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는 여호와의 큰 군대, 성령이 에스겔 골짜기에 비취니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는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 37:1-14 말씀입니다. 이 역사가 부활의 권능입니다. 다시 사시는 그리스도의 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큰 부활의 군대, 정병을 이루는 역사가 우리 교회에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활의 도를 전하기를 바랍니다. 저도 교회의 목사로서 학교에서도 섬기고 감사합니다. 저는 주일 설교 강단이 없으면 지탱될 수 없습니다. 주일 설교 강단은 제가 부활의 도를 다시 무장하게 합니다. 제가 가장 기쁠 때가 설교 하기 전에 여기 앉아 기도할 때입니다. 그때 가장 기쁘고, 하나님이 가장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매주 매주 우리를 죽게 하십니다. 그리고 매주 매주 다시 살리십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한 번만 드리거나, 기념하듯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권능의 도를 보이시려고 만국이 예배에 힘쓰고, 처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찬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부활의 노래, 찬송은 값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부활로 인쳐진, 부활로 예정된 사람이기에,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9-20 말씀입니다. 이 몸이 부활할 몸입니다. 더 가지고 덜 가지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생기가 들어오니,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는 군대를 이루었듯이 우리도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로마서 12:1 말씀대로 하면,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은혜가 성도님들의 가정과 직장,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