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아기들 같이 | 벧전 2:1-5 | 문병호 목사 |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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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7. 주일낮예배 설교  |  어린이주일


갓난 아기들 같이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베드로전서 2:1-5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녹취록



1. 어린아이도 한 생명이다


     우리 교회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절대적인 수가 많은 것은 아니나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 어떤 교회에는 영아부만 40명, 50명이 있고, 유년부 중등부 등 각 부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다 북적북적거리고 아이들은 일당백이라 분위기를 주도하게 됩니다. 어른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면 손가락질하지만 아이들의 그런 모습들은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거룩해지는 성화 과정에 있고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져야 하는데 성경에는 보면 많은 경우 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합니다. 아이라는 말이 몇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이는 갓난 아이를 의미합니다. 베드로전후서는 네로의 박해가 임박하여 비장한 분위기의 말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사가 되라는 등의 계시록적 얘기를 할 법도 한데 갓난 아이와 같이 되라고 합니다. 

     눈의 티끌만 들어가도 아픈데 자녀는 눈에 집어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합니다. 그 말이 과장으로 안 들리는 것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어른과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아이는 심부름꾼이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보면 이 세상의 아이들은 하나라도 우리가 붙들고 양육하고 키워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저에게도 기억에 나는 것이 도로에서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입니다. 어릴 때만 해도 전쟁이라고 하면 정말 두려웠는데 요새는 전쟁 게임이 많아서 그런지 잘 지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사람들이 그 심각성보다는 일종의 게임처럼 보는 것 같습니다. 아이 시체가 길거리에 있어도 언론에 비추는 모습이 덤덤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도 어느 부모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일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정말 귀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생명이 주님의 관심사입니다. 큰 생명도 아니고 작은 생명도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아닌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 그 자체를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어른이나 아이나 생명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합니다. 사람을 생명 단위로 헤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을 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등도 차별도 없습니다. 직업이 세리든 창기든 주님은 철저히 생명입니다. 고대 삶에서 어린아이들은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어린아이가 존중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많은 경우 어린아이들을 중심에 세우고 낫게 하시고 특별히 귀히 여기셨습니다. 비유를 들 때도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셔서 시시각각으로 어린아이들을 존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가 진정 구원의 기독교를 말한다면 어린아이가 바로 생명 자체이므로 어린아이가 생명의 단위이므로 우리 기독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와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능력도 지혜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독자 이삭을 바칠 때 그것은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우리 주님이 살리실 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살려야 합니다. 먼저 구출하고 내보내야 합니다. 어른들이 늦게 나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생명의 단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이 낳은 것이고 어른의 보호 아래 있으므로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안전할 수 없으므로 일차적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손을 뻗쳐서 성경을 만질 수 있고 티비를 켜서 설교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철저히 부모가 이웃이 인도하는 대로 이끌립니다. 어린 양과 다름없습니다. 어른이 방치하면 어린아이들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2. 생명에 필수적이며 본질적인 것이 순전한 젖


     그런데 주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은 대체로 모자라고 연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지혜, 권능 등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누가 크냐고 할 때 어린아이가 크다고 하십니다. 소자 하나와 같이 되는 것이 천국에서 큰 자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본문 말씀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통해서만 자랍니다. 순전하다는 것은 섞이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 2장 1절의 ‘기만’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갓난 아이들같이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신령한 젖이라는 말에서 신령하다는 것은 로마서 12장 1절의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에서 ‘영적’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 '영적'이라는 '로고스'에서 나온 말로 말씀에 따른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보면 ‘신령한’이 먼저 나옵니다. 신령한, 거짓이 없는 젖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번역한 것입니다. 신령한 젖인데 접속사가 없으므로 복합명사와 같이 쓰인 것입니다. 즉 신령한 젖인데 곧 말씀인 것입니다. 전술한 로마서의 말씀이 말씀에 따른 예배라면 본문도 거짓이 없는 말씀의 젖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른이 아닌 갓난아이라고 한 것은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섞인 것을 먹고 뱉습니다. 본문에서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은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만 먹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젖 외에는 먹을 수 없습니다. 딱딱한 요리를 한다고 해서 먹을 수 없습니다. 맛있는 냄새는 어른에게나 그렇지 어린아이는 순수한 것이 필요합니다. 생명에 가장 가까운 것을 먹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젖입니다. 요새는 그것을 비슷한 성분으로 만들어서 아이에게 수유하기도 합니다만 아이들이 먹는 것은 생명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3. 어린아이가 순전한 젖을 사모하듯이


     말씀 외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없는 것을, 갈급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네로의 핍박으로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거의 제자들이 다 죽습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그들을 따라다니던 전도인들도 거의 다 순교합니다. 그런 일을 앞두고 우리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급하다고 하면 뭔가 임시 방편적인 것을 구하고 위기를 내세워 타협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순수한 것 외에는 우리가 먹고 살 수 없는 그런 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을 먹으면 살 수가 없으니 아이가 먹는 생명의 본질적인 것, 모태에서 먹는 양분을 사모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름 아닌 이것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젖이 맛있는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른의 관점에서 맛있는 맛은 아닐 텐데 아이들은 잘 먹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온갖 맛있는 음식이 아닌 신령한 젖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말씀의 ‘영적 예배’라고 할 때 영적인 것,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넘어갈 때는 쓰지만 몸에는 단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두루마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종이로 됐으니 먹을 때는 훨씬 부드러운 음식이 맛있으나 먹고 나면 우리 안에는 단 것이라고 말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말씀은 본질이요 생명입니다. 말씀은 아이들이 젖을 먹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듯 우리에게 필수적인 것입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수동적인 자리이자 불가항력적인 자리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으니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짐승도 태어나서 보면 눈을 안 뜬 상태에서도 젖은 물고 놓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간절함입니다.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수동적인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갈급함을 주시고 우리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영적인 맛을 찾습니다. 그래서 목에는, 이성적으로는 딱딱하고 맛이 없어보여도 내 몸에 들어오면 나를 자라게 하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린아이의 신령한 젖입니다. 



4. 연약한 어린아이의 담대한 거짓 없는 찬송


     그 젖을 먹은 자들이 본문에 보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집은 살아 있는 돌같이 집이 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젖을 먹으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 2:4). 산 돌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성전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몸 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돌, 영원히 살아 있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새 하늘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합니다. 거기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성전이신 그리스도,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성전이신 주님과 잇대어 생명의 집이 되고 그리고 그 어린아이의 입으로 신령한 제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갓난 아이들이 신령한 집으로, 신령한 제사장으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9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것이 사실 어린아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고, 다윗도 레위지파도 다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어린아이가 은혜를 입어 왕이자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이 웅변가의 입보다 더 유창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의 말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베드로가 극한 핍박을 앞두고 어린아이를 떠올린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린아이들은 약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성전에 들어갈 때 무리들이 호산나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서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치실 때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나귀 타고 들어오실 때는 호산나 하면서 환영했는데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온갖 병자를 낫게 하니 어른들은 입을 닫고 어린이들이 호산나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밖에서는 호산나 하다가 산헤드린 공회처럼 눈치를 봐야 하는 곳에 이르니 입을 닫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어린아이들은 그때도 이때도 호산나 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오병이어의 기사가 이곳에는 ’한 아이에게‘라고 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들은 저리 가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오병이어를 구하여서 무리를 먹이는 일이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5. 결론: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우리 교회도 유아실이 뒤에 있는데 참 감사합니다. 저 유아실이 이전의 우리 예배당만큼 됩니다. 갓난 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항력적인 신령한 젖, 그것이 바로 은혜의 젖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10). 우리도 이것을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모한다는 것은 음식보다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픕니다. 그 가운데 산해진미가 차려져도 그것보다 더 사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산 돌이신 주의 집, 교회는 나의 머리요, 그 머리가 바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에게 잇대어 의지하며 아이와 같이 되는 것, 그런 영적인, 거짓 없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아이 때와 같습니다. 이 단어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인자하심’은 마태복음 11장 30절의 ‘내 멍에는 쉽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인자’하심은 ‘쉽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어미의 젖을 무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아이 때 어머니의 젖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젖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고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러면 그 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멀어진 것을 생각하고 첫 사랑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짐을 지게 하시는데 그 짐이 우리에게 쉬운 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상급을 받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른이 돼서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주의 일을 합니다. 제 동기 중에서도 보면 어린아이와 같은 분들이 목회를 잘합니다.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젖, 그것을 먹고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가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본문은 말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저는 어린이 주일에는 어른에 대해, 어버이 주일에는 어린아이에 대해 말해 보곤 합니다. 오늘은 아이들이 어른에게 어떻게 한다기보다 아이들은 꼭 예배 때 데리고 와야 합니다. 아이들은 안 움직이면 못 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가장 해야 할 것이 아이들을 예배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신령한 젖을 먹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 존재의 신앙, 생명의 신앙을 가지시고 그것으로 기뻐하는 모든 지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