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13 | 주일낮예배 | 종려주일 | 그리스도의 고난과 넘치는 위로 | 고후 1:5; 4:10-11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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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13일 주일낮예배 설교 |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고난과 넘치는 위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고린도후서 1:5; 4:10-11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십자가의 도는 부활의 도이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우리가 그 새 것입니다. 새 것, 거듭난 것, 값 주고 사신 것, 그리스도의 것, 우리가 새 것입니다.
새싹이 나고 새 꽃을 피우고 또 새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봄을 통하여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것이 나무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날마다 새롭게 하는 그것이 우리 안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 꽃이 피고 또 새 열매를 맺고 하면 더불어 우리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꽃만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 피고 우리 자신은 또 참으로 처량하게 시든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꽃보다 더 화창하고 꽃보다 더 감사하고 무수히 피어 있는 꽃을 보면서 내 안에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고 꽃 피우고 또 힘을 얻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참 무한히 감사하다. 넘치게 감사하다. 놀랍게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얼마나 복된 세상입니까. 우리가 그저 돌아다니는 하나의 야생의 짐승 같아도 이 자연이 아름다울 텐데, 우리가 그 자연을 인식하고 느끼고 또 그 자연 가운데 여호와를 찬미하니 얼마나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이 감사한 것입니까. 순간순간 때때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이 어찌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바로 부활의 도입니다. 주님은 죽고 사시고, 두 가지 일을 다 겪으셨지만, 죽는 것도 나를 위함이요, 사심도 날 위함이시니 죽음과 사심이 모두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주님은 죽고 부활하시고 그리하여 그 죽음이 생명의 값이 되시니 되고 그 죽음이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 죽음, 이런 표현도 쓰고, 또 간혹 고난주간이라는 말도 씁니다마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일단 부정적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고난은 그저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극단이 십자가의 죽으심인데 십자가에 죽으시면, 바로 빛을, 어둠을 제6시부터 9시까지의 어둠을 다 모아 가지고, 세상의 어둠을 다 모아 가지고, 빛으로 깨뜨리셔서 무덤까지 그 빛이 파고 들어가서 무덤을 깨뜨리는, 그래서 반석이 열리고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그러한 일이 주님의 몸에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휘장은 주님의 몸이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고난의 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부활의 도와 함께 있습니다. 또 부활의 도는 십자가의 도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이 나쁜 일이라면 그렇게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타이르듯이 예고하셨겠습니까? 베드로가 고백을 했을 때도 주님 죽고 부활하실 것 말씀하시고 또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이신 후에도 또 주님이 죽고 부활하실 것 말씀하시고 이제 종려주일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마지막 고난을 위하여 입성하는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는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우리가 그 시편의 말씀을 읽었지만 그게 호산나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죽고 사는, 죽어야 사는 이 부활의 도를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해서‘그리 마옵소서’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요. 이스라엘 백성도 막 가장 환호하는 모습으로 옷을 깔고 지극히 막 환대하고 말이죠,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또 가지를 흔들고 그렇게 했지만 주님이 고난당하시는 그 자리에 서니까 다 오히려 돌아서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했습니다. 호산나 외침, 그 외침이 불과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뭐 그들이 어리석고, 우리가 그들을 어찌 그렇게 손가락이 하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난당하여야, 죽으셔야 사는 그 도를 알지 못하여서 저런다고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도 꽃을 보면서도 뭡니까? 작년 잎사귀 위에 새꽃이 핍니까? 새잎이 나고 그리고 또 꽃이 피고 그 꽃이 또 열매를 부르고 또 그렇게 열매가 또 익어가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부활의 도,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잘 믿었습니다.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지나치고 또 구제가 지나치고 또 연보하고 하는 그런 열심은 좋았는데, 서로 이렇게 당이 생기다 보니까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파가 네 번째에요. 이렇게 서로 막 나눠져 있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1장을 보면 십자가의 도이고, 15장에 보면 부활의 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능력이라고 1장 18절에 말씀하고 그리고 15장에서는 바로 부활에 관한 긴 말씀을 하잖아요.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왜 우리가 서로 이렇게 웅성거리느냐, 왜 서로 불화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 도 가운데 우리가 하나이지 않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호산나와 주님의 그 죽으심이 우리 안에 함께 메아리쳐야 돼요. 그럼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죽고 부활하신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하시면서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내려주시는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우리가 그와 함께 접붙임을 받아, 그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느니, 로마서 6장 8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느니. 우리가 이 성령을 받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6장 5절에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산다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셔서 그 몸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오직 그 생명만 영원합니다. 세상에 누구라도 영생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아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에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함께, 그래서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가 그의 부활과 연합한다라고 로마서 6장 5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처음 생각해 봤어요. ‘아마 하나님이 이 지상에 우리를 두신 것은 죽고 사는 도를 날마다 깨우치게 하시고 그것으로 감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지상에 우리를 더 두셨다.’ 이 지상에는 여전한 죽음이 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사노라, 나는 날마다 사노라.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날마다 사노라.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듯이.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날마다 취하잖아요. 우리 가운데 가난하고 연약한 분들 계시면 우리가 서로 기도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 끼를 주시잖아요. 그 세 끼를 주시는 게 뭐예요? 그 매끼를 주시는 게 매끼 우리가 죽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예요.
2.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맛보는 삶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주님이 주시는 것이, 거듭난 것이, 신령한 것이 어찌 부활에 속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연약함을 떠나서 강함을 얻고 이제는 썩음을 보지 않고 이제는 육체가 신령한 몸이 되어서 그게 부활의 몸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15장에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부활 을 맛본다.’ 부활을 맛보는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을 맛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서 들어와요. 우리의 고난을 틈타서 들어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고난이 우리에게 있을 때, 제가 목사라도 그렇게 쉽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 당하는 게 내게 유익이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 유익이 되는 고난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인 줄 믿습니다.
오늘 5절에 우리가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읽었던 4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고난이 나에게 넘쳤다는 게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는 예수의 죽음을 내가 짊어졌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역사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고 다 자기 자신을 주신 그 은혜가 나에게 역사한다. 그게 오늘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쳤다. 이렇게 보면 뭐예요? 주님이 날 위하여 다 이루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은혜가 내게 넘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바로 예수가 다 이루신 게 죽기까지 이루신 게 내 것인데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 주님의 멍에를 진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오늘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시편 23편 6절에 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일차적으로 은혜를 누리는 것이죠. 주님의 고난의 잔이 영광의 잔입니다. 주님의 그 가시 면류관이 바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면류관을 써서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없습니다. 제가 참 부질없게도 에딘버러에 있을 때 그 가시를 가지고 관을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우리 제가 공부했던 기숙사 앞에 그런 에딘버러 가시 이런 나무가 좀 있어 가지고 만들어서 한 번 이렇게 써봤습니다. 아이고 되게 아픕니다. 이거 되게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 통점이라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 손가락 하나를 아프게 해도 우리가 못 삽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그걸 꾹 누릅니다. 꾹 눌러요. 그렇게 하면 벌써 얼굴은 피범벅이 됩니다. 꾹 누르니까 피가 흘러 넘치거든요. 그런데 그 면류관이 영광의 면류관이거든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 고난의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고, 그리고 우리가 주를 위해 산다.
그런데 이게 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5절에 보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사실상 우리가 우리 주를 위하여 고난당한다. 아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함은 오늘 뒷부분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의 말씀, 우리가 그의 생명을 짊어지고 그의 죽음을 짊어지고 그를 위하여 우리 목숨을 또한 그를 위하여 드리는 것은 그것이 사실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가지입니다. 계속 우리가 말씀을 나누지만 잘 누리는 것이 증인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누리는 게 주를 위한 증인입니다. 그것을 오늘 4장 11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목숨을 드린다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잘 누리면 됩니다. 아멘하고 누리면 돼요.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증인 되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움을 누리고 누리세요.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세요.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미하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란 말이에요. 자연 앞에서 그저 자연을 찬미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미하라고요. 그게 증인입니다. 내 삶에서 나의 어떤 자랑 그것도 우리가 있지만, 내 안에서 나는 자랑 할 것 없고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밖에 없다.
3. 충만함
사실 하늘 가져갈 것은 신령한 것이고 신령한 것은 전부 부활에 속한 것입니다. 아멘.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 그러니까 부활에 속한 것은 뭐예요? 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고 이전 것은 죽고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시는 것은 그것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게 하시려고 골로새서 1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는데 골로새서 1장 9절에 하나님이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있는데 우리가 요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함이 있습니다.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주님이 성자세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이 있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사시는 그 부활의 도입니다. 그것이 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 때문에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내 대신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모든 충만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모든 충만이 있어요. 골로새서 2장 9-10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같이 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믿습니까? 우리가 이 충만에 거합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 입이 있어도 다 감사치 못하는 만 입이 내게 있어도 다 감사치 못하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가하시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골로새서 2장에 이게 성육신이거든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이 땅에 오신 예수께 거하시고,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예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래서 그가 몸으로 오시고 그 몸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찢기시고 흘리시고 전제로 소제로 거제로 요제로 번제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와 함께 연합하여서 그 몸과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아멘, 우리도 충만하여 졌습니다. 여러분, 충만한 데서 충만한 걸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내 안에 거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충만한 데서 누리니 은혜의 은혜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에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셨다. 에베소서 2장 7절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시는데, 에베소서 2장 4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고난 주간에 설교를 이렇게 준비하면서 세 단어를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는 바로 충만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한다면, ‘fullness’입니다. ‘충만하다,’ ‘충만하다.’ 우리가 ‘충만하다’는 단어는 요한복음 1장 14절, 이 땅에 오신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충만하다는 것이 완전한 것이에요. 하나님만이 완전하세요. 하나님만이 충만하세요. 성경에서 충만함은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하나님께 쓰는 단어예요. 사실, 하나님께만 충만함이 있어요. 그 충만함, 그 하나님의 충만함이 예수의 몸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 아까 그렇게 말씀했잖아요. 이 충만함이라는 단어, 그리고 에베소서 2장 4, 7절, 금방 말씀드렸던 풍성함이라는 단어 ‘풍성함’이라는 단어는 또 뭘까요. 영어로 제가 만든지 모르겠는데, 아까는 ‘fullness,’ 충만함, 우리가 성경에 ‘충만함’이라는 단어가 있고, ‘부요함’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부요함이라는 건 뭐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부요하다’는 단어와 ‘풍성하다’는 단어가 같이 있어요. 이건 헬라어로 ‘플러시오스’라고 하는데요, 저수지에 물이 넘친다는 뜻이에요. 저수지에 물이 넘친다. 그러니까 완전하고 충만하신 하나님이 넘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까 풍성함, 긍휼이 풍성하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이게 에베소서 2장에서 4, 7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완전하세요. 예수님 품 안에 있으면 완전함을 누리는 거예요.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완전이라는 단어예요. 앞으로 영광이다, 이러면 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무엇도 완전한 것 없어요. 이 세상은 다 불완전해요. 이 세상은 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요, 이 세상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요,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고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완전하세요. 그래서 충만하세요.
저는 고난주간에 부정적으로 생각이 안 돼요. 물론 주님의 고난은 참 우리가 마음에 눈물이 나요. 십자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그러나 마음이 즐거움이 있어요. 저는 십자가는 어느 자리냐 하면, 십자가는 바로 그 충만함이 있는 자리에요. 그 충만함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지는 바로 충만함이 풍성하게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요. 주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아낌없이 고난당하셨어요. 그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구절 너무 좋아해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그 부요하다는 단어가 아까 ‘플루시오스,’ 풍성하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예요. 성경에서 ‘풍성하다,’ ‘부요하다’는 같은 단어예요. 풍성하신 하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려 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배고프다 하시고, 목마르다 하시고, 그리고 고난당하시고, 이것이 바로 부요하신 자로서 풍성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첫 번째 단어는 ‘충만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봤고 바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가하시는 그 모든 충만을 우리에게 후하게 사랑으로 베푸셨다. 그리고 긍휼이 그 충만함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래서 충만함을 풍성히 베푸셨다.
4. 위로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한 단어가 바로 오늘 5절의 위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이 세 가지로 생각해 봤어요. 십자가가 부족하지 않아요. 십자가가 족해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족합니까? 다 이뤘다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넘쳐요. 내 잔이 넘나이다. 그 시편 23편 6절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자리가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어떻게 보면 주님은 끝까지 소진하시면서 우리에게 풍성함을 주실려고 부요함을 주시려고 고난 당하셨어요. 인색하게 고난당하지 아니하셨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뭐예요. 위로가 돼요. 이사야 40장 1절이 바로 ‘너희는 위로하라’입니다.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보혜사, 대언자, 중보자,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이게 설교자로서 부질없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위로가 무엇입니까? 자라감입니다. 우리가 부요하면 매일 자라 갑니다. 채워 갑니다. 그게 위로입니다. 아멘.
여러분, 위로가 어떤 정서적인 겁니까? 위로가 뭡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때 모처럼 시골 집에 가면 어머니가 아무 말씀 않고 밥을 함께 해 주시는데, 그게 위로죠. 남미에 갔더니 아는 사람도 없고 전화할 데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어디서 불숙 불숙 제자들이 나타나 가지고 저를 도와주고 섬겨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내에게 그 낯선 호텔에서 위로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위로는 꼭 말로 합니까? 위로는 꼭 전화로 친구가 해야 위로입니까? 정말 가장 큰 위로는 햇빛을 통해서도 위로받고 공기를 통해서도 위로받고 꽃을 통해서도 위로받고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시 주시는 것이 위로인 줄 믿습니다.
바로 충만하게 이루시고 풍성하게 주시고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염소가, 양이 그저 꼴을 뜯어먹는 게 위로 아닙니까? 만물도 이렇게 하물며 먹이시거늘 입히시거늘, 길쌈도, 수고도, 심지도, 거두지도, 들이지도 않아도 입히고 먹이시거늘 하물며 너일까 보냐. 주님의 십자가의 도는 뭡니까? 바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라(고전 6:20).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완전한 가운데 거하고 그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은혜라고 해요. 그런데 정말 정말 생각할 때 내가 어느 착한 구석이 있다면 은혜를 누릴 때 착한 구석이 있어요. 그때 진짜 착한 구석이 있어요. 내가 나에게 각박하고, 내가 나에게 아직까지 불안하고, 내가 나에게 아직 모자라면, 어찌 내가 착하겠어요. 급하면 내 것부터 더 채우겠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나에게 충만하다, 그 충만한 가운데 풍성히 주셨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십니다. 내가 나에게 충만하고 내가 나에게 넘치고, 그때 우리가 진정 베풀지 않겠어요. 그런 감사가 내 안에 있을 때, 그때 그저 그냥 어디서 빵이라도 하나 내 앞에 딱 던져지면 먼저 남부터 생각하지 않겠어요. 내가 그냥 먹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거 누구 줄 사람 없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오늘 이 말씀의 5절에 보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이것이 바로 위로는 하나님께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위로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 때 내 안에 위로가 있어요. 그 위로가 누리는 거예요. 누려야 위로고, 누리는 가운데 자라야 위로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겠죠. 영광을 올리겠죠. 그래서 이사야 40편 1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약시대의 위로 너희는 위로하라, 그 신약시대의 첫 단어가 위로로부터 시작되거든요. 그 위로가 뭐냐 이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다 이루신, 우리를 값주고 사신 그 고린도전서 6장 20절 아까 말씀 읽었듯이 값으로 산 갑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게 뭐예요. 그 안에 빠져 있다면 그게 바로 누림 가운데 그 가운데 영광을 올리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5. 생명의 죽음
오늘 고린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바로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십자가가 즐거운 것이에요. 한번도 십자가가 죽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십자가는 생명의 죽음이에요. 죽음의 죽음이 아니에요. 생명의 죽음이에요.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라고 했어요. 영국 청교도 신학자 오웬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죽음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이 부활이다. 그 말은 죽음을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죽음을 있어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은혜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리고 4장 11절의 말씀에 우리가 살아있는 예수를 위하여 살아있는 자가 우리 살아있는 자가 죽음에 넘겨진다 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내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가 날 위해 죽으셨네. 십자가 진다, 주님의 멍에를 진다, 그게 뭐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진한 잎이 떨어져야 새싹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아멘. 우리 세포도 이전 세포가 또 죽고 또 새 세포가 살아나고 또 새 살이 살아나고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또 새 생명도 주시고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창조적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은 이런 말씀 꼭 새기세요. 우리가 다 압니다. 내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왜 예수의 죽음을 내가 짊어집니까? 예수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지. 아닙니다. 나의 죽음이에요. 그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거예요.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뭐예요? 예수와 함께 구주와 함께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나 살았도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라 합니다. 아멘. 십자가가 가시 면류관의 그 터지만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11절, 우리의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 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은 고백이라면, 11절은 사명이에요. 그래서 이제 주의 종으로서 사도 바울은, 1장 8절에 보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렇게 고백했어요. 얼마나 주의 일이 어려웠으면 그렇게 이야기해요. 오늘 11절에 보면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지만, 이런 건 순교의 말씀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 육체가 살아서 신령한 몸이 되는 부활을 맛보는 그러한 일이 이 땅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살아있는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이제는 이전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되었으니 새로운 위로가 넘칩니다. 우리를 잘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모든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충만하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풍성하게 베푸시고 그리고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 성도님들, 그의 완전함에 거하고 그 영광 가운데 풍성히 누림으로, 자라감으로 위로가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로가 넘치는 그 은혜, 주님은 하십니다. 주님은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기에, 바로 거듭남의 은혜를 이루십니다. 엘리엘리 사박다니. 모든 것이 단절된 그 가운데서 다 이루었다. nothing이 everything이 되게 하시는 그곳이 바로 절대 무가 절대 유가 되고, 완전 유가 되게 하시는 그 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가운데 거하시고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요한 자리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 주님의 꼴을 풍성히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봅니다.
2025년 4월 13일 주일낮예배 설교 | 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고난과 넘치는 위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고린도후서 1:5; 4:10-11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4: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십자가의 도는 부활의 도이다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 우리가 그 새 것입니다. 새 것, 거듭난 것, 값 주고 사신 것, 그리스도의 것, 우리가 새 것입니다.
새싹이 나고 새 꽃을 피우고 또 새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봄을 통하여 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것이 나무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이 날마다 새롭게 하는 그것이 우리 안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 꽃이 피고 또 새 열매를 맺고 하면 더불어 우리가 더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꽃만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 피고 우리 자신은 또 참으로 처량하게 시든다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꽃보다 더 화창하고 꽃보다 더 감사하고 무수히 피어 있는 꽃을 보면서 내 안에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나고 꽃 피우고 또 힘을 얻는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참 무한히 감사하다. 넘치게 감사하다. 놀랍게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얼마나 복된 세상입니까. 우리가 그저 돌아다니는 하나의 야생의 짐승 같아도 이 자연이 아름다울 텐데, 우리가 그 자연을 인식하고 느끼고 또 그 자연 가운데 여호와를 찬미하니 얼마나 우리가 이 지상의 삶이 감사한 것입니까. 순간순간 때때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함이 어찌 우리에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바로 부활의 도입니다. 주님은 죽고 사시고, 두 가지 일을 다 겪으셨지만, 죽는 것도 나를 위함이요, 사심도 날 위함이시니 죽음과 사심이 모두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주님은 죽고 부활하시고 그리하여 그 죽음이 생명의 값이 되시니 되고 그 죽음이 생명의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하시는 고난, 죽음, 이런 표현도 쓰고, 또 간혹 고난주간이라는 말도 씁니다마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일단 부정적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고난은 그저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의 극단이 십자가의 죽으심인데 십자가에 죽으시면, 바로 빛을, 어둠을 제6시부터 9시까지의 어둠을 다 모아 가지고, 세상의 어둠을 다 모아 가지고, 빛으로 깨뜨리셔서 무덤까지 그 빛이 파고 들어가서 무덤을 깨뜨리는, 그래서 반석이 열리고 그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그러한 일이 주님의 몸에서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휘장은 주님의 몸이라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고난의 도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부활의 도와 함께 있습니다. 또 부활의 도는 십자가의 도와 함께 있습니다. 주님이 나쁜 일이라면 그렇게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타이르듯이 예고하셨겠습니까? 베드로가 고백을 했을 때도 주님 죽고 부활하실 것 말씀하시고 또 변화산에서 주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보이신 후에도 또 주님이 죽고 부활하실 것 말씀하시고 이제 종려주일에서 그러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마지막 고난을 위하여 입성하는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는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우리를 구하시옵소서’입니다. 우리가 그 시편의 말씀을 읽었지만 그게 호산나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죽고 사는, 죽어야 사는 이 부활의 도를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해서‘그리 마옵소서’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요. 이스라엘 백성도 막 가장 환호하는 모습으로 옷을 깔고 지극히 막 환대하고 말이죠,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또 가지를 흔들고 그렇게 했지만 주님이 고난당하시는 그 자리에 서니까 다 오히려 돌아서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했습니다. 호산나 외침, 그 외침이 불과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뭐 그들이 어리석고, 우리가 그들을 어찌 그렇게 손가락이 하겠습니까? 다만 그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그렇다고, 고난당하여야, 죽으셔야 사는 그 도를 알지 못하여서 저런다고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도 꽃을 보면서도 뭡니까? 작년 잎사귀 위에 새꽃이 핍니까? 새잎이 나고 그리고 또 꽃이 피고 그 꽃이 또 열매를 부르고 또 그렇게 열매가 또 익어가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로 부활의 도,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잘 믿었습니다.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지나치고 또 구제가 지나치고 또 연보하고 하는 그런 열심은 좋았는데, 서로 이렇게 당이 생기다 보니까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파가 네 번째에요. 이렇게 서로 막 나눠져 있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교회에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1장을 보면 십자가의 도이고, 15장에 보면 부활의 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능력이라고 1장 18절에 말씀하고 그리고 15장에서는 바로 부활에 관한 긴 말씀을 하잖아요.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것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왜 우리가 서로 이렇게 웅성거리느냐, 왜 서로 불화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그 도 가운데 우리가 하나이지 않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호산나와 주님의 그 죽으심이 우리 안에 함께 메아리쳐야 돼요. 그럼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죽고 부활하신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하시면서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내려주시는 보혜사 성령을 받아서 우리가 그와 함께 접붙임을 받아, 그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느니, 로마서 6장 8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느니. 우리가 이 성령을 받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거든요. 그래서 로마서 6장 5절에는 그의 죽으심과 연합하고 그의 부활과 연합하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산다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이 되셔서 그 몸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셔서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오직 그 생명만 영원합니다. 세상에 누구라도 영생을 우리에게 줄 수 없습니다. 아멘.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그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에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생명에 우리가 함께, 그래서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자가 그의 부활과 연합한다라고 로마서 6장 5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처음 생각해 봤어요. ‘아마 하나님이 이 지상에 우리를 두신 것은 죽고 사는 도를 날마다 깨우치게 하시고 그것으로 감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지상에 우리를 더 두셨다.’ 이 지상에는 여전한 죽음이 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어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사노라, 나는 날마다 사노라.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날마다 사노라.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듯이.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날마다 취하잖아요. 우리 가운데 가난하고 연약한 분들 계시면 우리가 서로 기도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 끼를 주시잖아요. 그 세 끼를 주시는 게 뭐예요? 그 매끼를 주시는 게 매끼 우리가 죽고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예요.
2.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을 맛보는 삶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고 주님이 주시는 것이, 거듭난 것이, 신령한 것이 어찌 부활에 속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연약함을 떠나서 강함을 얻고 이제는 썩음을 보지 않고 이제는 육체가 신령한 몸이 되어서 그게 부활의 몸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15장에 그것을 우리가 이 땅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부활 을 맛본다.’ 부활을 맛보는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을 맛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서 들어와요. 우리의 고난을 틈타서 들어와요. 그렇기 때문에 사실 고난이 우리에게 있을 때, 제가 목사라도 그렇게 쉽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 당하는 게 내게 유익이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 유익이 되는 고난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인 줄 믿습니다.
오늘 5절에 우리가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읽었던 4장 10절에서 11절에 보면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예수의 고난이 나에게 넘쳤다는 게 무엇을 뜻합니까?
첫째는 예수의 죽음을 내가 짊어졌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역사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고 다 자기 자신을 주신 그 은혜가 나에게 역사한다. 그게 오늘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쳤다. 이렇게 보면 뭐예요? 주님이 날 위하여 다 이루신,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은혜가 내게 넘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그런데 11절에 보면,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바로 예수가 다 이루신 게 죽기까지 이루신 게 내 것인데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산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 주님의 멍에를 진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오늘 5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게 넘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시편 23편 6절에 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일차적으로 은혜를 누리는 것이죠. 주님의 고난의 잔이 영광의 잔입니다. 주님의 그 가시 면류관이 바로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면류관을 써서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없습니다. 제가 참 부질없게도 에딘버러에 있을 때 그 가시를 가지고 관을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우리 제가 공부했던 기숙사 앞에 그런 에딘버러 가시 이런 나무가 좀 있어 가지고 만들어서 한 번 이렇게 써봤습니다. 아이고 되게 아픕니다. 이거 되게 아픈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이 통점이라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우리 손가락 하나를 아프게 해도 우리가 못 삽니다. 그런데 여기 이렇게 그걸 꾹 누릅니다. 꾹 눌러요. 그렇게 하면 벌써 얼굴은 피범벅이 됩니다. 꾹 누르니까 피가 흘러 넘치거든요. 그런데 그 면류관이 영광의 면류관이거든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는 그 고난의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고, 그리고 우리가 주를 위해 산다.
그런데 이게 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늘 5절에 보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사실상 우리가 우리 주를 위하여 고난당한다. 아까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함은 오늘 뒷부분에 고린도후서 4장 11절의 말씀, 우리가 그의 생명을 짊어지고 그의 죽음을 짊어지고 그를 위하여 우리 목숨을 또한 그를 위하여 드리는 것은 그것이 사실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가지입니다. 계속 우리가 말씀을 나누지만 잘 누리는 것이 증인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누리는 게 주를 위한 증인입니다. 그것을 오늘 4장 11절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목숨을 드린다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잘 누리면 됩니다. 아멘하고 누리면 돼요.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증인 되는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움을 누리고 누리세요. 아름다운 것을 찬미하세요. 다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찬미하세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란 말이에요. 자연 앞에서 그저 자연을 찬미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미하라고요. 그게 증인입니다. 내 삶에서 나의 어떤 자랑 그것도 우리가 있지만, 내 안에서 나는 자랑 할 것 없고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밖에 없다.
3. 충만함
사실 하늘 가져갈 것은 신령한 것이고 신령한 것은 전부 부활에 속한 것입니다. 아멘. 신령한 몸입니다. 신령한 몸, 그러니까 부활에 속한 것은 뭐예요? 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고 이전 것은 죽고 새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시는 것은 그것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게 하시려고 골로새서 1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충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는데 골로새서 1장 9절에 하나님이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있는데 우리가 요한복음 1장 16절에 보면,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함이 있습니다.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주님이 성자세요.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이 있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이 우리 안에 역사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고 다시 사시는 그 부활의 도입니다. 그것이 이 고난의 의미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 때문에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내 대신에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모든 충만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모든 충만이 있어요. 골로새서 2장 9-10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고 같이 합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믿습니까? 우리가 이 충만에 거합니다. 그러니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 입이 있어도 다 감사치 못하는 만 입이 내게 있어도 다 감사치 못하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가하시고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골로새서 2장에 이게 성육신이거든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이 땅에 오신 예수께 거하시고,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고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시고,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예수 안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우리와 같이 되시고 그래서 그가 몸으로 오시고 그 몸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찢기시고 흘리시고 전제로 소제로 거제로 요제로 번제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와 함께 연합하여서 그 몸과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심으로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아멘, 우리도 충만하여 졌습니다. 여러분, 충만한 데서 충만한 걸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내 안에 거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 충만한 데서 누리니 은혜의 은혜라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장 7절에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셨다. 에베소서 2장 7절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시는데, 에베소서 2장 4절에 보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이 고난 주간에 설교를 이렇게 준비하면서 세 단어를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는 바로 충만함이라는 단어입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한다면, ‘fullness’입니다. ‘충만하다,’ ‘충만하다.’ 우리가 ‘충만하다’는 단어는 요한복음 1장 14절, 이 땅에 오신 독생자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충만하다는 것이 완전한 것이에요. 하나님만이 완전하세요. 하나님만이 충만하세요. 성경에서 충만함은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하나님께 쓰는 단어예요. 사실, 하나님께만 충만함이 있어요. 그 충만함, 그 하나님의 충만함이 예수의 몸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다. 아까 그렇게 말씀했잖아요. 이 충만함이라는 단어, 그리고 에베소서 2장 4, 7절, 금방 말씀드렸던 풍성함이라는 단어 ‘풍성함’이라는 단어는 또 뭘까요. 영어로 제가 만든지 모르겠는데, 아까는 ‘fullness,’ 충만함, 우리가 성경에 ‘충만함’이라는 단어가 있고, ‘부요함’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부요함이라는 건 뭐요. 성경에서는 우리가 ‘부요하다’는 단어와 ‘풍성하다’는 단어가 같이 있어요. 이건 헬라어로 ‘플러시오스’라고 하는데요, 저수지에 물이 넘친다는 뜻이에요. 저수지에 물이 넘친다. 그러니까 완전하고 충만하신 하나님이 넘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니까 풍성함, 긍휼이 풍성하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리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나타내고자 하셨다. 이게 에베소서 2장에서 4, 7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완전하세요. 예수님 품 안에 있으면 완전함을 누리는 거예요.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완전이라는 단어예요. 앞으로 영광이다, 이러면 완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완전하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무엇도 완전한 것 없어요. 이 세상은 다 불완전해요. 이 세상은 다 앞이 있으면 뒤가 있고요, 이 세상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요,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고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완전하세요. 그래서 충만하세요.
저는 고난주간에 부정적으로 생각이 안 돼요. 물론 주님의 고난은 참 우리가 마음에 눈물이 나요. 십자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그러나 마음이 즐거움이 있어요. 저는 십자가는 어느 자리냐 하면, 십자가는 바로 그 충만함이 있는 자리에요. 그 충만함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지는 바로 충만함이 풍성하게 우리에게 부어지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에요. 주님은 아낌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아낌없이 고난당하셨어요. 그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는 이 구절 너무 좋아해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그 부요하다는 단어가 아까 ‘플루시오스,’ 풍성하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예요. 성경에서 ‘풍성하다,’ ‘부요하다’는 같은 단어예요. 풍성하신 하나님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려 하십니다.
이 말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배고프다 하시고, 목마르다 하시고, 그리고 고난당하시고, 이것이 바로 부요하신 자로서 풍성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첫 번째 단어는 ‘충만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봤고 바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가하시는 그 모든 충만을 우리에게 후하게 사랑으로 베푸셨다. 그리고 긍휼이 그 충만함을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래서 충만함을 풍성히 베푸셨다.
4. 위로
그리고 세 번째 생각한 단어가 바로 오늘 5절의 위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 이 세 가지로 생각해 봤어요. 십자가가 부족하지 않아요. 십자가가 족해요.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족합니까? 다 이뤘다 하셨습니다. 십자가가 넘쳐요. 내 잔이 넘나이다. 그 시편 23편 6절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의 자리가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어떻게 보면 주님은 끝까지 소진하시면서 우리에게 풍성함을 주실려고 부요함을 주시려고 고난 당하셨어요. 인색하게 고난당하지 아니하셨어요. 그러니 우리에게 뭐예요. 위로가 돼요. 이사야 40장 1절이 바로 ‘너희는 위로하라’입니다.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대언자,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보혜사, 대언자, 중보자,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는 이게 설교자로서 부질없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바로 위로가 무엇입니까? 자라감입니다. 우리가 부요하면 매일 자라 갑니다. 채워 갑니다. 그게 위로입니다. 아멘.
여러분, 위로가 어떤 정서적인 겁니까? 위로가 뭡니까? 고등학교, 대학교 때 모처럼 시골 집에 가면 어머니가 아무 말씀 않고 밥을 함께 해 주시는데, 그게 위로죠. 남미에 갔더니 아는 사람도 없고 전화할 데도 없다고 생각했더니 어디서 불숙 불숙 제자들이 나타나 가지고 저를 도와주고 섬겨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내에게 그 낯선 호텔에서 위로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위로는 꼭 말로 합니까? 위로는 꼭 전화로 친구가 해야 위로입니까? 정말 가장 큰 위로는 햇빛을 통해서도 위로받고 공기를 통해서도 위로받고 꽃을 통해서도 위로받고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시 주시는 것이 위로인 줄 믿습니다.
바로 충만하게 이루시고 풍성하게 주시고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염소가, 양이 그저 꼴을 뜯어먹는 게 위로 아닙니까? 만물도 이렇게 하물며 먹이시거늘 입히시거늘, 길쌈도, 수고도, 심지도, 거두지도, 들이지도 않아도 입히고 먹이시거늘 하물며 너일까 보냐. 주님의 십자가의 도는 뭡니까? 바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라(고전 6:20).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완전한 가운데 거하고 그 안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게 은혜라고 해요. 그런데 정말 정말 생각할 때 내가 어느 착한 구석이 있다면 은혜를 누릴 때 착한 구석이 있어요. 그때 진짜 착한 구석이 있어요. 내가 나에게 각박하고, 내가 나에게 아직까지 불안하고, 내가 나에게 아직 모자라면, 어찌 내가 착하겠어요. 급하면 내 것부터 더 채우겠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나에게 충만하다, 그 충만한 가운데 풍성히 주셨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십니다. 내가 나에게 충만하고 내가 나에게 넘치고, 그때 우리가 진정 베풀지 않겠어요. 그런 감사가 내 안에 있을 때, 그때 그저 그냥 어디서 빵이라도 하나 내 앞에 딱 던져지면 먼저 남부터 생각하지 않겠어요. 내가 그냥 먹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거 누구 줄 사람 없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로 오늘 이 말씀의 5절에 보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이것이 바로 위로는 하나님께 우리가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위로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 때 내 안에 위로가 있어요. 그 위로가 누리는 거예요. 누려야 위로고, 누리는 가운데 자라야 위로고,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겠죠. 영광을 올리겠죠. 그래서 이사야 40편 1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신약시대의 위로 너희는 위로하라, 그 신약시대의 첫 단어가 위로로부터 시작되거든요. 그 위로가 뭐냐 이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다 이루신, 우리를 값주고 사신 그 고린도전서 6장 20절 아까 말씀 읽었듯이 값으로 산 갑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게 뭐예요. 그 안에 빠져 있다면 그게 바로 누림 가운데 그 가운데 영광을 올리라라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5. 생명의 죽음
오늘 고린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바로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십자가가 즐거운 것이에요. 한번도 십자가가 죽음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십자가는 생명의 죽음이에요. 죽음의 죽음이 아니에요. 생명의 죽음이에요.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라고 했어요. 영국 청교도 신학자 오웬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죽음의 죽음으로서의 죽음이 부활이다. 그 말은 죽음을 죽이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 죽음을 있어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은혜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고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리고 4장 11절의 말씀에 우리가 살아있는 예수를 위하여 살아있는 자가 우리 살아있는 자가 죽음에 넘겨진다 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내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가 날 위해 죽으셨네. 십자가 진다, 주님의 멍에를 진다, 그게 뭐요?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진한 잎이 떨어져야 새싹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일어납니다. 아멘. 우리 세포도 이전 세포가 또 죽고 또 새 세포가 살아나고 또 새 살이 살아나고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또 새 생명도 주시고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창조적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러분은 이런 말씀 꼭 새기세요. 우리가 다 압니다. 내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왜 예수의 죽음을 내가 짊어집니까? 예수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지. 아닙니다. 나의 죽음이에요. 그게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거예요. 예수의 죽음이 내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뭐예요? 예수와 함께 구주와 함께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나 살았도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라 합니다. 아멘. 십자가가 가시 면류관의 그 터지만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11절, 우리의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 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0절은 고백이라면, 11절은 사명이에요. 그래서 이제 주의 종으로서 사도 바울은, 1장 8절에 보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이렇게 고백했어요. 얼마나 주의 일이 어려웠으면 그렇게 이야기해요. 오늘 11절에 보면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지지만, 이런 건 순교의 말씀이에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우리 육체가 살아서 신령한 몸이 되는 부활을 맛보는 그러한 일이 이 땅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살아있는 자가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 죽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이제는 이전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되었으니 새로운 위로가 넘칩니다. 우리를 잘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모든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충만하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풍성하게 베푸시고 그리고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 성도님들, 그의 완전함에 거하고 그 영광 가운데 풍성히 누림으로, 자라감으로 위로가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위로가 넘치는 그 은혜, 주님은 하십니다. 주님은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기에, 바로 거듭남의 은혜를 이루십니다. 엘리엘리 사박다니. 모든 것이 단절된 그 가운데서 다 이루었다. nothing이 everything이 되게 하시는 그곳이 바로 절대 무가 절대 유가 되고, 완전 유가 되게 하시는 그 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 가운데 거하시고 풍성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부요한 자리로 가난하게 되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 주님의 꼴을 풍성히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