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420 | 주일낮예배 | 부활주일 | 부활 신앙의 역사(役事) | 눅 12:13-21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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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0일 주일낮예배 설교 | 부활주일
부활 신앙의 역사(役事)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고린도후서 1:5; 4:10-11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녹취록
1. 놀라운 부활
우리나라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죽고 부활하심도 기가 막히고, 그 부활의 은혜가 나를 우리를 위한 것이니 또 기가 막힙니다. 오늘 새벽예배 마치고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부활절에는 전쟁을 하다가도 포성을 멈추고 간호사도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부활은 싸매는 것이요, 끌어안고 위로하고 서로 보듬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어찌 뛰어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내가 나를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사람 됨이라 생각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부활에 즈음하여 휴전한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꽤나 길게 휴전한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종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번 기도했던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기도하시도록 시키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전화의 참상과 상실과 눈물과 애통과 찢어짐을 치유하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와 500여 군중에게 그리고 마지막 만삭되지 못한 것 같은, 우리말로 칠삭둥이 같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혈기가 등등할 때 주님을 믿는 자들을 전멸하려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내리쳤는데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무덤과 죽음을 깨뜨린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하던 사울이 바울(Paulus), 가장 작은 자가 된 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부활은 우리는 부인되고 우리의 어둠은 지나가고 주님의 새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그 일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신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렀다가 주님이 고치신 자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러 여자 중 하나입니다. 그녀에게 주님이 평안하냐고 예의 질문을 하십니다. ‘샬롬’ 하신 것입니다. 신약으로 ‘에이레네’라고도 합니다. 하늘의 복됨이 이 땅에 임함을 인사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십니다. 주님이 부활하지 아니하시고 죽음 가운데 계셨다면 그녀의 눈물은 상실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여 큰 기쁨과 경외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선포했습니다.
2.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보았고 다시 사신 주가 나타나셨다고 했으나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무덤으로 그녀와 함께 올라가 봅니다. 사도 요한, 보아누게, 우뢰의 아들이거든요, 베드로보다 먼저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는데 또 보면 무덤에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옷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의 두건이 머리 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몸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보았다,’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복음 전도는 믿지 않았으나 들어가서 보고는 믿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8절을 보면 ‘보고 믿었더라’고 하나 9절은 ‘예수께서 성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믿었는데 알지 못한 것은 무엇으로 봐야 할까요. 예수님이 죽고 지금 안 계신 것은 믿었는데 그것이 부활이면 부활일진대, 기적은 믿었으나 예수님이 세 번이나 죽고 다시 사시리라 예언하신 것은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 큰 돌을 앞에 굴려 인봉해 둔 무덤이므로 누가 봐도 그 무덤이 허술해서 시체가 유실되었다거나 도적이 들어와서 그것을 꺼냈거나 혹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염려처럼, 부활을 믿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거짓말을 하기 위해 훔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보았음에도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고는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 많은 자로 말합니다. 어릴 때 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는 찬송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제자 모두가 도마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 유월절 다음날인 주일 새벽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는 밝은 색 넥타이도 매곤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갈릴리 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는데 그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벽을 넘어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들에게 천사가 전하길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라고 했으니 아마도 갈릴리에 산상복음이 전해진 곳에 은밀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열 명 있을 때였고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도 말씀 본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말씀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갔는데 시체가 없는 것은 믿었으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주님이 세 번이나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주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신 것은 제자들은 반신반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주시던 손, 창에 찔려 피가 흐르던 옆구리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야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같습니다. 보고서야 믿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전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그런데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못자국을 보며 그 자국에 손을 넣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마 제자들이나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새겨진 것이 손과 옆구리인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으나 끝내 손에 못이 박히던 그 장면이 그들에게 생생했을 것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실 때도 도마는 문이 닫힌 채로 같은 조건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도마만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것만 알면 됩니다. 도마복음이니 하여 세간에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비성경적인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었습니다. 저도 문의를 받아서 어느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도마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만용인지 충성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유명한 주석가인 D.A. 카슨은 이를 충성으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으로부터 말씀 전한 것으로 살해 협박을 받고 또 다시 나사로를 살리니 도마가 우리가 그냥 주님과 죽으러 가자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낸 자가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승천하신다고 선포하시니 도마가 우리가 그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따지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도 나쁘게만 생각했었는데 동일한 주석가는 회의적인 자라고 보았습니다. 일단 용기가 있던 자이긴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주님이 하시는 일을 논리 정연하게 알아야지 속이 편한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본문의 말씀도 보면 됩니다.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찬미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약시대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제서야 오순절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을 받은 우리가 아직 그러지 못했던 당시의 제자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와 열 제자 모두가 마찬가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그리스도의 말씀으로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계속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왕의 신하를 고치러 갈 때 하신 말씀입니다.
3.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믿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계속 (7대)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빈 무덤도 사실상 표적입니다. 세상에 빈 무덤이 어디 있습니까? 죽은 지 사흘이면 죽음이 확정되는 시간입니다. 왜 그때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죽으신 것을 의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몸으로 계시는데 다시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으로 믿는 자에게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셨고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그런데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믿었는데 무슨 말씀인가요? 이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만큼,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늘의 벼락을 내릴 만큼의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런 권세를 주신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이것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손가락을 내밀어 옆구리에 손을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도마가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들으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시겠으나 말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니 믿은 것입니다. 믿어서 영접하고 이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활 후에 주님을 만났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습니다.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 면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죽고 살아나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주님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인 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의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됩니다. 내가 믿어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자녀가 되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부활의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사실상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하기 전에는 나로부터 주님이 믿음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는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믿는 게 영접입니다. 믿는 게 예수님을 안는 것인데 예수님이 나를 안으시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영접인데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아직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고서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도 내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를 살릴 때 하신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베드로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백을 했음에도 다시 주님을 부인합니다. 무덤에 들어가서도 빈 것은 믿었는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4. 십자가와 부활의 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설교할 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으나 우리에게는 생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장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영어로 ‘revival’이 아니라 ‘resurrection’입니다. 리바이벌은 이전 것을 가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라면 리저렉션은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는 죽어서 사는 도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부활의 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내려비친 빛은 이전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영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 중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도를 만난 것입니다.
완전 무가 완전이 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고 십자가의 자리가 부활의 자리입니다. 제6시부터 9시까지 모든 흑암을 끌어 모은 후 주님이 죽음을 죽이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은혜를 입고 믿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았네 입니다. 베드로가 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가 창세 전의 말씀이시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그 말씀 안의 부활의 생명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바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주는 나를 핏값으로 사신 분입니다. 나의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 맡기면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사실 영광의 주를 못 박았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선한 열심이 많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구제도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하신 말씀은 우리의 의를 내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주를 못 박았는데, 그 주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5. 부활의 증인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증인은 누리는 자입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내 대신에 예수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인 거를 하나님이 살리하셨습니다. 증인은 누리면 증인입니다. 안 누리면 증인이 아닙니다. 부활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막달라 마리아의 큰 기쁨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 있으면서 큰 기쁨이 경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 단어를 말하자면 우선 무서움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큰 일을 이루셨으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무서워하고 예수님은 계속 은혜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이것이 증인입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을 보면서 이 무서움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낯선 일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있지 않은 이 큰 일을 보면서 경외-무서움과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샬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 그것이 무서움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다시 죽었으니 부활의 예표일 뿐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증인입니다. 내가 감사하면 구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생명의 부활과 생활의 부활을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기를 축복하고 기원합니다.
2025년 4월 20일 주일낮예배 설교 | 부활주일
부활 신앙의 역사(役事)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고린도후서 1:5; 4:10-11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녹취록
1. 놀라운 부활
우리나라 말에 ‘기가 막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 죽고 부활하심도 기가 막히고, 그 부활의 은혜가 나를 우리를 위한 것이니 또 기가 막힙니다. 오늘 새벽예배 마치고 앉아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부활절에는 전쟁을 하다가도 포성을 멈추고 간호사도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부활은 싸매는 것이요, 끌어안고 위로하고 서로 보듬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어찌 뛰어나겠습니까.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내가 나를 넘어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사람 됨이라 생각합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부활에 즈음하여 휴전한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꽤나 길게 휴전한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종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매번 기도했던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기도하시도록 시키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이 전화의 참상과 상실과 눈물과 애통과 찢어짐을 치유하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와 500여 군중에게 그리고 마지막 만삭되지 못한 것 같은, 우리말로 칠삭둥이 같은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혈기가 등등할 때 주님을 믿는 자들을 전멸하려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내리쳤는데 참 빛으로 오신 예수를 무덤과 죽음을 깨뜨린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가장 높은 권위를 자랑하던 사울이 바울(Paulus), 가장 작은 자가 된 것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부활은 우리는 부인되고 우리의 어둠은 지나가고 주님의 새 것이 우리의 것이 되는 그 일입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부활하신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 들렀다가 주님이 고치신 자입니다. 갈릴리로부터 주님을 따라온 여러 여자 중 하나입니다. 그녀에게 주님이 평안하냐고 예의 질문을 하십니다. ‘샬롬’ 하신 것입니다. 신약으로 ‘에이레네’라고도 합니다. 하늘의 복됨이 이 땅에 임함을 인사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십니다. 주님이 부활하지 아니하시고 죽음 가운데 계셨다면 그녀의 눈물은 상실의 눈물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을 만났다고 하여 큰 기쁨과 경외로 제자들에게 달려가 선포했습니다.
2.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보았고 다시 사신 주가 나타나셨다고 했으나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무덤으로 그녀와 함께 올라가 봅니다. 사도 요한, 보아누게, 우뢰의 아들이거든요, 베드로보다 먼저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는데 또 보면 무덤에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 옷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의 두건이 머리 있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몸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보았다,’ ‘예수 다시 사셨네’라는 복음 전도는 믿지 않았으나 들어가서 보고는 믿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8절을 보면 ‘보고 믿었더라’고 하나 9절은 ‘예수께서 성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믿었는데 알지 못한 것은 무엇으로 봐야 할까요. 예수님이 죽고 지금 안 계신 것은 믿었는데 그것이 부활이면 부활일진대, 기적은 믿었으나 예수님이 세 번이나 죽고 다시 사시리라 예언하신 것은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을 보았을 텐데 말입니다. 큰 돌을 앞에 굴려 인봉해 둔 무덤이므로 누가 봐도 그 무덤이 허술해서 시체가 유실되었다거나 도적이 들어와서 그것을 꺼냈거나 혹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염려처럼, 부활을 믿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거짓말을 하기 위해 훔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보았음에도 예수가 부활할 것이라고는 아직 믿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 많은 자로 말합니다. 어릴 때 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는 찬송도 했습니다. 그런데 도마만 특별히 그런 게 아니라 제자 모두가 도마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 유월절 다음날인 주일 새벽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절에는 밝은 색 넥타이도 매곤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갈릴리 산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두려워서 문을 닫고 있는데 그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냥 벽을 넘어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들에게 천사가 전하길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라고 했으니 아마도 갈릴리에 산상복음이 전해진 곳에 은밀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첫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열 명 있을 때였고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도 말씀 본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가 말씀을 전했을 때 제자들은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 사도 요한과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갔는데 시체가 없는 것은 믿었으나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주님이 세 번이나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주님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신 것은 제자들은 반신반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아 주시던 손, 창에 찔려 피가 흐르던 옆구리임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서야 제자들이 기뻐했습니다. 열 제자들은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두 같습니다. 보고서야 믿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이 도마에게 전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 20:25). 그런데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못자국을 보며 그 자국에 손을 넣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합니다. 아마 제자들이나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새겨진 것이 손과 옆구리인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으나 끝내 손에 못이 박히던 그 장면이 그들에게 생생했을 것입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도마에게 나타나실 때도 도마는 문이 닫힌 채로 같은 조건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도마만 있을 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는 성경이 알려주는 것만 알면 됩니다. 도마복음이니 하여 세간에 시끄러운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비성경적인 이야기를 퍼뜨리기도 했었습니다. 저도 문의를 받아서 어느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도마가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만용인지 충성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유명한 주석가인 D.A. 카슨은 이를 충성으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으로부터 말씀 전한 것으로 살해 협박을 받고 또 다시 나사로를 살리니 도마가 우리가 그냥 주님과 죽으러 가자고 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낸 자가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 승천하신다고 선포하시니 도마가 우리가 그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따지고 물은 것입니다. 이것도 나쁘게만 생각했었는데 동일한 주석가는 회의적인 자라고 보았습니다. 일단 용기가 있던 자이긴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주님이 하시는 일을 논리 정연하게 알아야지 속이 편한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 연장선에서 본문의 말씀도 보면 됩니다.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찬미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신약시대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제서야 오순절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을 받은 우리가 아직 그러지 못했던 당시의 제자들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와 열 제자 모두가 마찬가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주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은 들음으로 들음은그리스도의 말씀으로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계속 믿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 왕의 신하를 고치러 갈 때 하신 말씀입니다.
3.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믿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계속 (7대) 표적을 보여 주십니다. 빈 무덤도 사실상 표적입니다. 세상에 빈 무덤이 어디 있습니까? 죽은 지 사흘이면 죽음이 확정되는 시간입니다. 왜 그때인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죽으신 것을 의미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몸으로 계시는데 다시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이름으로 믿는 자에게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주셨고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요 6:36). 그런데 보고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고 믿었는데 무슨 말씀인가요? 이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 시대에 필요한 만큼, 죽은 사람을 살리고 하늘의 벼락을 내릴 만큼의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런 권세를 주신 것은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을 때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이것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손가락을 내밀어 옆구리에 손을 만져보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도마가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들으신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미 알고 계시겠으나 말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고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믿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니 믿은 것입니다. 믿어서 영접하고 이제 옛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백을 했습니다. 부활 후에 주님을 만났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습니다.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 면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죽고 살아나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주님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인 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의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됩니다. 내가 믿어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자녀가 되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으로 부활의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사실상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하기 전에는 나로부터 주님이 믿음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는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3). 믿는 게 영접입니다. 믿는 게 예수님을 안는 것인데 예수님이 나를 안으시는 것입니다. 믿는 것이 영접인데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아직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받고서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도 내 것이 아닙니다. 마르다의 오빠인 나사로를 살릴 때 하신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베드로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백을 했음에도 다시 주님을 부인합니다. 무덤에 들어가서도 빈 것은 믿었는데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와 부활의 도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안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4. 십자가와 부활의 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설교할 때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으나 우리에게는 생명이 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의 장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나는 것,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영어로 ‘revival’이 아니라 ‘resurrection’입니다. 리바이벌은 이전 것을 가지고 새롭게 되는 것이라면 리저렉션은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는 죽어서 사는 도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부활의 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내려비친 빛은 이전 것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영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 중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 도를 만난 것입니다.
완전 무가 완전이 되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고 십자가의 자리가 부활의 자리입니다. 제6시부터 9시까지 모든 흑암을 끌어 모은 후 주님이 죽음을 죽이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은혜를 입고 믿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았네 입니다. 베드로가 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가 창세 전의 말씀이시요,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 그 말씀 안의 부활의 생명에 내가 거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바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주는 나를 핏값으로 사신 분입니다. 나의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께 맡기면 누리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사실 영광의 주를 못 박았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선한 열심이 많은 고린도교회였습니다. 구제도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 하신 말씀은 우리의 의를 내세우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주를 못 박았는데, 그 주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5. 부활의 증인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증인은 누리는 자입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내 대신에 예수가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죽인 거를 하나님이 살리하셨습니다. 증인은 누리면 증인입니다. 안 누리면 증인이 아닙니다. 부활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막달라 마리아의 큰 기쁨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 있으면서 큰 기쁨이 경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 단어를 말하자면 우선 무서움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큰 일을 이루셨으니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계속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무서워하고 예수님은 계속 은혜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마 28:8). 이것이 증인입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을 보면서 이 무서움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낯선 일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있지 않은 이 큰 일을 보면서 경외-무서움과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 샬롬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 그것이 무서움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나사로는 살아났으나 다시 죽었으니 부활의 예표일 뿐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 누리는 것이 증인입니다. 내가 감사하면 구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생명의 부활과 생활의 부활을 풍성히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가 되기를 축복하고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