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04 | 주일낮예배 | 어린이주일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들의 복 | 시편 34:7-11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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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어린이주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녀들의 복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시편 34:7-11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녹취록



1. 가정의 달 단상: 하나님 아버지

     해마다 우리가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교회에서도 어린이 주일 또 어버이 주일 그리고 스승의 주일을 지키는데, 이것은 어떤 절기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얼마나 귀한 관계들이 입니까. 부모님이 있으니까 또 자녀가 있고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천만에 한둘은 있습니다마는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고요. 또 부모가 산고를 겪지 않고 낳은 자녀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나 다 사랑받고 태어났고 또 그렇게 이 세상에서 생명체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해마다 이때쯤이 기쁘기도 하고 또 조금 씁쓸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자식으로도 못났고, 부모로도 못났습니다. 양쪽 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서 어린이 주일에 설교하기도 힘들고, 어버이 주일이 설교하기도, 또 스승의 주일에 설교하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연약 한 가운데서 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약한 자를 들어서, 또 이렇게 여러분들보다 못한 저를 통하여 말씀을 들음으로 또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고 합니다. 교회의 설교의 대원리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세워서 말씀을 들음으로 겸손을 배우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서로 돌아보아 낫게 여기고 그런 마음을 가지며, 이때마다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낳고 기르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부모의 사랑입니다. 낳고 기릅니다. 낳은 자가 기르십니다. 자녀는 부모의 음성을 듣고 또 부모는 자녀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 음성은 태에서부터 듣는 것입니다. 저도 유학을 가서 언어 때문에 힘든 게 많았습니다. 영어를 읽기는 조금 하는데, 말하기와 듣기가 영 안되서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또 불어 배운다고 또 해서 제네바가 있을 때, 이게 무슨 말인지 겨우 한두 마디 들리는다고 생각해서 이해했거니 했더니 불어가 아니고 이태리어를 했다고 합니다.
     모국어란 뭘까요? 모국어는 ‘first language’가 아닙니다. ‘mother language’입니다. 제일 첫 번째 배운 언어가 아닙니다. 어머니 언어입니다. 모국어는 바로 태에서부터 어머니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에서 그 언어와 리듬을 듣는 것입니다. 그 한국어의 고유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국어는 첫 번째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의 언어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 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같이 목자와 양이 하나인 것같이,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웬 영광입니까, 웬 은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찌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까. 구약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구약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것도 직접 부르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 때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우리를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세우셔서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아나고 그와 함께 일어나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예수와 함께 자녀가 되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 부릅니다.
     원 없이, 쉼 없이 소리 내서 불러도 아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얼마 감사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 부른다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우리가요. 숨어서 마음껏 찬송하지 못하고 부르지 못한다면 살기가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자녀이면서 또 그의 나라의 상속자라고 이렇게 인 쳐 주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라고 확 도장을 찍어 주신 것입니다.


2. 부성적 호의, 긍휼, 돌보심, 관용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보면 제가 이렇게 많이 학생들에게 강조를 하는데요,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이 있고 ‘부성적 부호’가 있고 ‘부성적 긍휼’이 있고, ‘부성적 돌보심’이 있고 ‘부성적 관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 호의, 긍휼이 있습니다. 긍휼은 자비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 같이 쓰입니다. 인애와도 같고요. 이것이 구약적 표현이라면, 신약에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인애, 긍휼, 자비, 사랑, 다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로서의 그러한 자비를 베푸심, 긍휼을 베푸심, 그리고 아버지로서 돌보심, 그리고 아버지로서 관용하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데, 얼마나 그것이 참 지속적이고 깊은지 바위가 이렇게 움푹 파입니다. 그냥 우리가 잘 때도 그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내리사랑입니다. 부성적 사랑, 아버지로서의 사랑, 내리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호의가 있습니다. 부성적 호의, 아버지로서의 호의입니다. 호의에 대해서 참 편하게 한 번 써 봤습니다, 설교문에. 즉, 자식 편을 드는 것입니다. 부모이신 하나님의 호의는 우리 편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내 편이시니, 여호와가 내 우편에 계시니, 나와 함께 계시는 여호와가 나의 편이십니다. 우리 부모가 자식을 보는 그러한 눈빛이 다릅니다. 그게 호의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참 귀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 호의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항상 자식을 또 먼저 생각하는 호의입니다. 우리가 막 자녀들을 거칠게 다루는 것 같아도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귀한 것을 먹입니다. 귀한 것을 또 가르칩니다. 어떨 때는 가장 그 가정에 귀한 것도 자녀에게는 공유합니다. 그게 바로 호의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그의 자녀들에게 맡깁니다. 찬양을 하게 하십니다. 설교를 하게 하십니다. 이런 것도 다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우리는 정말 그냥 톡 하면 터질 만한 그런 연약한 존재인데, 정말 유리그릇과 같고 그러나 아침 이슬같이 그냥 연약한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상급 주시려고 일도 맡기시고 찬송도 맡기시고 기도도 맡기시고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다 하시면 되는데 우리가 나라에 의해 기도하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를 맡기신 거예요. 이게 다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특별히 저같이 이렇게 참 부족한 종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으니 얼마나 큰 호의입니까? 
     또 하나님의 부성적 긍휼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시는 이것은 바로 자식을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쏠린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측은히 여긴다는 것은 쏠리는 것입니다. 자식 쪽으로 쭉 쏠립니다. 마음도 쏠리고, 정성도 쏠리고, 다 그쪽으로 쏠리는데, 이게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겨울에 눈길을 가면, 다 추울 텐데, 자식만 추웠습니까. 부모님이 추우면 더 추울 텐데 장갑을 벗어서 자식에게 줍니다. 옛날에는 장갑 하나도 아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목도리 하나도 아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목도리도 자식의 몸에 둘러 주시고, 그렇게 쏠리는 거죠. 이렇게 결국 쏠리다가 다 쓰러지세요, 부모님들이. 피가 쏠리고 온갖 노고가 쏠리고 그러다가 살이 따라가고, 인생이 그렇게 부모의 인생이에요. 부성적인 긍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쏠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뭐라도 더 이렇게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리고 하나님의 자식을 돌보시는 게 있습니다. 부성적 돌보심(fatherly care)입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돌보는 새가 모이를 새끼의 입에 갈아서 먹이듯이 그렇게 부모가 돌봅니다.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누워서 자식들의 살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돌봅니다. 이 돌본다는 것은 우리나라 말에 ‘보살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참 좋지 않습니까. 부모는 어릴 때 그냥 품 안에 자식이다 하면서 어릴 때 못 걸을 때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더 불안하고 더 그렇습니다. 보살피는 거죠. 평생 보살피는 거죠. 그래서 70세 된 노인에게 90세 된 부모가 보살핍니다. ‘차 조심해라, 몸 조심해라, 또 음식 조심해라, 감기 조심해라.’ 부성적인 돌보심을 베푸십니다. 돌본다는 것은 먹을 걸 준다는 게 아닙니다. 먹여 준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단지 먹을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사실 먹여 주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너그럽게 용서합니다. 이건 부성적 관용입니다. 떨쳐내서 따지기보다 덮어줍니다. 속으로 곪고 곪고 곪아도 자식들에 대해서 덮어 주십니다. 끝까지 관용합니다. 저도 주의 종이 되려고 할 때, 생각하기를 아버지는 의절하신다고 할 것이고 어머니는 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주의 종이 된다고 공표하면, 아버지는 ‘그래 잘했다. 이제 집에 오지 마라’라고 하실 것이고, 어머니는 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려고 앉기만 하면 울었습니다. 눈물이 그렇게 났습니다. 친구들은 이해한다고도 하고, 지인들은 이해한다고도 하지만, 끝내는 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뭐가 못내 섭섭한지, 마음에 안 차는지 다 등을 돌렸지만, 부모님은 이해하시더라고요. 그게 부성적 관용입니다. 우리에게 마지막 이해하시는 분은 부모님입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제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어릴 때부터 그런 점이 있었어.’ 그때 저는 신학교에 입학해 놓고 공표했습니다. 


3.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녀를 인도하라

     저는 어린이 주일 설교 때 부모 이야기를 더 많이 해요. 왜요? 어린이의 가장 큰 특권이 뭐예요? 부모가 있으니까 어린이가 있죠.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게 어린이의 복됨 아닙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사랑하시고 아버지로서 호의를 베푸시고 아버지로서 권유를 베푸시고 아버지로서 돌보시고 아버지로서 관용하십니다. 산상복음에서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좋은 것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에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들이지 않아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을 보라 길쌈도 수고도 안 해도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산상복음의 주제가 바로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고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건 뭘까요? 은혜를 누리고 살라는 것이에요. 너희가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거예요.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은혜를 누리죠. 보살핌을 받고, 사랑을 받고, 돌보심을 받죠. 그래서 바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 그것은 낳으시는 사랑이요, 기르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설 수 없으니, 어린아이와 같이 돼야 되겠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되죠. 하나님 앞에 염치없어도 됩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 염치없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고, 어린이가 오면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기도 해 주셨어요. 안고 안수하신다는 말은 인 친다,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그리고 축복하신다’ 이 말이에요. 바로 자녀에게 걸맞는 것을 하나님께서 베푸신다, 그래서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 가며, 천국에서는 어린아이가 큰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1절을 보면, ‘너희 자녀들아’라고 특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뭡니까? 저는 그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막 아주 어릴 때, 그냥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이 그렇게 너는 뭐가 돼야 된다, 뭐가 돼야 된다고 하셔서, 그것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뭐가 돼야 된다, 뭐가 돼야 된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철이 드니까, 부모의 바람은 축복이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것은요, 어떤 막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억압을 하거나 부모가 되고 싶은 걸 투사해 가지고 자식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는 뭐가 되면 좋겠다, 너는 뭐가 되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바람은 축복이에요. 특별히 우리가 믿는 자로서 자녀들에게 너는 뭐가 되면 좋겠다, 착한 사람이 되라, 훌륭한 사람이 되라, 남을 돕는 사람이 되라, 주는 게 받는 것보다 낫는다 했으니 좀 모자라도 남을 주면서 살아라, 그러니까 바란다는 것은 바로 축복하는 것이죠. 그게 부모입니다. 부모는 다른 것 없어요. 자녀가 그냥 잘되기를 축복해요. 잘된다는 말이 너무 좋은 말이에요. 정말 정말 잘되길 바라요. 그 잘되는 것은 거저 뭐 큰 명예를 얻거나 큰 부자가 돼서 잘되는 게 아니에요.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성장하고 또 기도하고 예배하고 또 세상에서도 조그만 것이라도 남을 돕고 그게 인간의 가치 아니겠어요? 그게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신 목적 아닐까요? 모든 짐승은 먹을 만큼만 먹어요. 그런데 사람은 죄를 지어서 먹고 더 먹으려고 그래요.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은 조금 덜 먹어야 돼요. 그게 우리 믿는 자의 구별이에요. 평균인인 타락한 인류는 짐승만 또 못 해요. 어떨 때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죠.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가장 중요하게 알 것은 자녀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것이에요. 예수님께 데려가면 예수님이 안아 주세요. 예수님께 데려가면 예수님이 안수해 주세요. 예수님이 축복해 주세요. 오늘같이 이렇게 우리가 부모와 같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도 되고 기도하는 것도 예수님께 데려가는 거예요.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자녀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거예요. 우리 누구를 좀 돌봐주세요. 우리 누구를 좀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 우리 누구를 좀 낫게 해 주세요. 우리 누구의 길을 좀 곧게 해 주세요. 이리가 득실거리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잘 살게 하시고 좋은 친구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그게 자녀를 예수께서 데려가는 거예요. 그중에 가장 좋은 건 역시 같이 예배드리는 것이지만, 우리가 예수님께 데려가야 돼요.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우리는 신실함이 없어요. 우리는 뜻도 수시로 변합니다. 물론 자녀를 향한 부모의 뜻이야 이 세상에 무엇보다 귀한 가치겠지만 우리는 그렇다 한들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를 끝까지 돌볼 수가 없어요. 부모 자신이 넘어져요. 부모 자신이 궁핍하기도 해요. 부모 자신이 건강을 잃기도 해요. 어떻게 자녀를 우리가 돌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는 것이죠. 자녀를 부모에게 데려가는 것이죠. 우리는 미쁨이 없었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 미쁨이 신실함이잖아요. 신실함은 제가 항상 두 가지라고 말씀하죠. 변함이 없어야 되고, 전능하셔야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변함이 없다고 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약속을 지켜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약속 못 지켜요. 못 지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거든요. 하나님이 하시거든요. 그래서 바로 무엇보다도 신실함이 하나님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루신 즉 모든 것이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복되므로, 하나님의 편에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 누리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서구교회를 보면 이렇게 같이 예배를 많이 드립니다. 우리도 어릴 때는 시골교회에서 이렇게 같이 드렸잖아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말씀과 청년들을 위한 말씀과 장년들을 위한 말씀이 왜 달라야 됩니까? 그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쉬운 성경을 읽으라 해야 되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른들이 읽는 성경을 읽으면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읽은 성경을 읽고, 설교도 함께 들으면 그게 얼마 귀하겠어요. 그 가정의 한 진리입니다. 물론 자녀들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그 세대의 교훈은 필요하겠죠. 또 그런 것은 우리가 부서에서 듣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복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쳤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교회에 오는 것이 너무 귀합니다. 저도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꼭 적어놓고 기도합니다. 
     바로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돌보십니다. 나를 바로 알려면 하나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참 내 모습이에요. 내가 나를 아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세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egoist’고요, 그건 자애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더 나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릇된 사랑을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그래서 간혹 나를 사랑하는 게 나를 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아주 부요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고 장식해 주시고 아주 좋은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날 잘 돌보십니다. 사실상 내가 구할 것을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십니다. 


4. 복의 길: 여호와를 경외함

     우리 자녀들이 복된 것은 하나님이 내게 오라라고 예수님을 보내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오늘 제가 이 시편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마음으로 본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갑니까? 그게 바로 경외입니다. 경외. 오늘 말씀을 보면, 불과 7절에서 11절까지 읽었지만 경외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경외라는 말이 먼저 7절에 보면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리로다. ‘진 친다’는 건 군대 개념 아닙니까? 천사가 딱 스크럼 짜고 빙 둘러서 보호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을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수렁에 빠지고 사방에 우겨쌈과 포위를 당하여도 천사들을 빙 둘리셔서 하나님이 건져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건져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곳에 같이 돌고 계시잖아요. 네 사람이 돌고 있잖아요. 예수님이시잖아요. 그런데 그게 바로 건져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들의 머리시거든요. 그리고 요셉이 구렁에 빠져도 또 감옥에 빠져도 건져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그러합니다. 엘리사는 불 병거와 불 말에 둘러싸였습니다. 바로 천사가 둘러싸는 거죠.
     그리고 9절 오늘 말씀을 보면,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충만하신 분이 풍성히 베푸십니다. 바로 충만하신 분이 우리에게 풍성히 베푸십니다. 부요하신 자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우리가 그의 충만한 데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그래서 경외하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이 채워집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내 잔이 넘칩니다. 신명기 28장을 우리가 축복의 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신명기 28장 1절에서 6절의 말씀을 보면, 그리심 산의 축복인데, 바로 넘치는 축복이죠. 모든 복을 주시고, 자녀에게 복을 주시고, 가축에게 복을 주시고, 그리고 떡 반죽 그릇에 복을 주시고, 그리고 들어가도 나가도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기만 하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10절의 말씀을 보시면 또 경외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게 뭘까요? 우리 성경에서 경외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또 예배의 제1 본질은 경외라는 말도 들어보셨을 거예요. 경외가 뭘까요? 이건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말로는 ‘야레’라고 합니다. ‘야레’는 두려워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한자에도 ‘외’(畏) 자가 두려워할 외 자잖아요. 경외할 때 높이면서 두려워하는 거예요. 좋은 단어예요. 경외란 말이 높이면서 두려워하는 것인데, 두려워한다는 게 무서워하는 겁니까? 시편 111편 10절과 잠언 1장 7절 또 9장 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말씀했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 이 두렵다는 게 뭘까요? 두려움은 우리가 피하여 도망치는 것입니까? 그게 복된 것입니까? 
     여기에 ‘야레’를 ‘경외’라고 한 것은 잘 번역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자에 이 단어가 있겠지만, 우리 선배님들이 우리 잘 번역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를 낳으신 분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요,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 되는 것이요, 만물은 그가 만드신 바 되고, 그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뭔가 하면 바로 낳은 분의 자리에요. 낳은 분의 자리가 존경을 받을 자리에요. 자식은 아무리 부모와 가까워도 부모에게 태어났어요. 자식이 부모를 낳지 못하고 부모와 자식이 동등할 수가 없어요. 부모가 자식을 낳았어요. 그 낳음 가운데서 경외 가운데서 하나 됨이 있고, 마주봄이 있고, 돌봄이 있고, 서로 끌어안음이 있고, 그게 경외에요. 부모가 자식과 동등해지면 그것은 마치 공 두 개가 부딪히듯이 서로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경외라는 것은 그거예요. 이 단어는 아주 성경적인 단어예요. 두려워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요새 무슨 열린 예배다 하면서 예수님을 어깨 동무하면서 그냥 이렇게 하나님을 누르듯이 하는 기분이 드는 예배는 경외가 아니죠. 그런 우리의 마음은 아니에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우리가 그의 나아신 바 되고 경외에요. 
     신명기 10장 12-13절에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섬기고 그리고 네 행복을 위하여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했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제일 처음으로 경외하는 것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그리고 그의 말씀을 지켜서 네게 모든 복된 것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경외하는 거예요. 그리고 숨기는 거예요. 사랑하는 거예요. 그것은 의지하는 거예요. 우리를 낳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하는 거예요. 그의 베푸심을 간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의 말씀을 지키는 거예요. 그리고 평생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신명기에 이러한 말씀들이 쭉 들어 있습니다. 신명기, 레위기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경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리고 그를 사랑하라, 성기라. 그리고 그의 율례와 규례와 법도에 거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으리라. 이게 신명기 말씀입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세속적인 두려움이 아닙니다. 기쁜 두려움입니다. 즐거운 두려움이에요. 아주 소망이 넘치는 두려움입니다. 신약시대 때 이 두려움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경외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5. 경외는 경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섭니까? 제가 어제 양재천을 걸으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내가 하나님의 품에 어떻게 안길까? 내가 하나님의 귀한 것을 어떻게 누릴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를 떠나소서.” 이사야와 베드로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바로 경외에요. 경외하면 만나요. 경외하면 나아가고, 경외하면 그와 하나가 되고, 경외하면 바로 누리게 됩니다. 이게 경외입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어요. 가장 가까이 설명해 본다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이게 샬롬이거든요. 이 자리가 깨지면 안 돼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안 된단 말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그게 경외에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끌려가는 것이죠. 두려워하면서 나아가는 것이죠. 두려워하면서 도망치는 것은 자녀가 아니죠. 제가 그 생각을 해봅니다. 어릴 때 부모님 앞에 ‘병호야 이리 와라,’ 이렇게 어느 정도 엄격하게 부르시면 일단 무릎을 꿇어야 돼요. 우리 어릴 때는 그걸 어쩌다 2시간 정도도 훈계하세요. 계속 말씀하면 무릎을 못 펴요. 어릴 때는 부모님은 아랫목에 앉으시고 자식들은 윗목에 앉았습니다. 또 옛날에는 온돌방이라 추운 데와 따뜻한 데가 있단 말이에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부모님과의 친화에요. 그게 가까운 거예요. 장성에서 대학교 다닌다고 모처럼 시골에 오면 또 ‘친구들 봐야 되니까 조금 나갔다 올게요’ 하면서 늦게까지 그냥 어울리며 이야기하다가 집에도 안 오고, 그 만만하게 부모님하고 나란히 서는 게 가까운 게 아니에요. 유학 가서 조금 그것을 생각했어요. 그렇게 부모님하고 한 방에 좀 있고 싶더라고요. 유학 갔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골에 가서 한 달 정도 아버지하고 같이 있어서, 그냥 그 숨길이라도 좀 느끼고 싶더라고요. 그게 경외에요. 경외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 두어야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그의 신령한 것을 누릴 수가 있어요. 탕자가 집을 나가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 반지도 끼워 주고, 옷도 입혀 주고, 잔치도 해 주고, 그에게도 누리게 하지 않습니까? 이 경외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예 우리가 뭐 정의를 할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우리의 자세가 경외에요. 그게 기쁨이에요. 모든 만물 하나를 누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만홀히 여기지 않고, 업신여기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는 납작 엎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이 안아 주시고 오라 부르시고 품에 안기거라 해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그게 경외입니다.
     시편에 말씀해 보면 경외에 대한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경외함의 복이 뭘까요? 간략하게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친밀해집니다. 시편 25편 14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때 친밀해지는 거예요. 여호와와 친밀하다는 것은 마음대로 편하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경외하는 자를 하나님이 살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33편 18절에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여호와 자리에 앉히세요. 그가 만물을 지으셨잖아요. 나를 모태에서 조성하셨잖아요. 나를 자녀 삼으셨잖아요. 영광받기에 합당하시잖아요. 존귀와 영광과 찬송과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시잖아요. 그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그것이 친밀함이란 말이에요. 그게 경외란 말이에요. 얼마나 감사한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훈계하면, 옆집 친구가 무릎을 꿇겠어요. 자녀니까 ‘아버지여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외하는 자에게 길을 가르친다고 했어요. 시편 25편 12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길을 묻고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 될지 지금 기도하고 있습니까? 경외하는 마음을 갖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십시오. 여호와를 높이십시오. 여호와를 마땅한 자리에 두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길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내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이 하시고, 나는 그를 높이는 마음 자세가 있을 때
     우리의 다음 길이 정해지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제 장성했고 내 지식이 있고 내 지혜가 있고 경륜이 있고 경험이 있지만, 그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여호와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이 되십시오. 
     그리고 오늘 8절의 말씀에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앞에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피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피하여서 여호와께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편이 어떤 배경으로 쓰여진 시편입니까?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가장 다윗이 비천에 처할 때, 사울에게서 쫓김을 받아 가지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갔고, 왕이 다윗을 받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요’라고 한 그 다윗이라고 하며 사울보다 더 강한 사람이 다윗이기에 받아주면 안 되고, 죽여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그냥 침을 줄줄 흘리면서 미친 척하면서 대문에 몸을 비벼댑니다. 얼마나 낮아진 거예요. 그때 다윗은 그들을 속여서 바로 아둘람 굴로 도망갑니다. 그때 아둘람 굴에서 쓴 시에요. 다윗은 위경 가운데서 시편을 썼습니다. 
     시편 60편 4절에 보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인자가 크고 긍휼이 큰데, 주의 인자와 긍휼을 누리려면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하셔야 됩니다. 여호와께 맡기시고 여호와를 높이십시오. 의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막 그냥 화려하게 뭘 하라는 게 아닙니다. 기도하고 여호와의 모든 것을 인정하고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래야 인자가 크고 긍휼이 크다고 했습니다.
     시편 103편 11절을 보면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큽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십시오. 이어서 나오는 말씀인 시편 103편 13절을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제가 아까 이 모든 것을 먼저 정리해서 다섯 가지로 말씀드린 거예요. 그게 바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아버지로서의 사랑, 아버지로서의 호의, 아버지로서의 긍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게 예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갈 수 없는데,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도망쳐야 되는데, 죄 중에도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 할 때, 하나님이 끌어들이십니다. 이 경외라는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로 시편 111편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예배의 본질은 경외예요. 형식이 아닙니다. 굳이 이렇게 강대상을 만들어놔야 됩니까? 뭐 그저 조금이라도 높이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우리 옛날에는 보면, 예배당에서는 아무 음식도 못 먹고, 또 여긴 아예 더 올라오지도 못 해요. 순서 맡은 사람만 여기 올라옵니다. 그런 게 단지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한번 옷깃을 여미는 바로 어떤 지성소적 개념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의 그 몸이 휘장이라 다 깨어졌지만, 그래도 구약은 폐지된 게 아니라 완성된 것이거든요. 구약의 그 지성소의 교훈은 더 새겨야 되거든요. 신약시대 때 신약이라고 막 그냥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에요. 구약은 폐지된 게 아니라 완성됐어요. 지성소가 폐지된 게 아니라 완성된 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거든요. 그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경외합니다.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합니까? 예배가 경외입니다.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경외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순서대로 은혜 받고 이게 경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감 없이 받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어디서 멀어졌는가를 기억하고 우리가 다 처음보다 나중에 더 나은 것 같아도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은 뭡니까? 다 받은 때입니다. 그게 처음이에요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생각하고 어디에서 멀어졌는가 생각하라고 이야기한 거거든요. 바로 말씀을 가감 없이 받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9절 한 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28편 1-6절 말씀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신약시대 때 여호와에 대한 경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고 에베소서 5장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에 십자가를 걸쳐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나아가고 누리는 것은 그게 경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