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1 | 주일낮예배 | 어버이주일 | 주님의 기쁨이 되는 부모 순종 | 골로새서 3:20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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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11일 주일낮예배 설교 | 어버이주일
주님의 기쁨이 되는 부모 순종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녹취록
1.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질문을 많이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관한 질문은 자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전념하는지 그것이 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이는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무엇이 귀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자주 하지 않으며 간혹 해도 스쳐 가듯 질문합니다. 그것보다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주된 관심이 있게 됩니다.
어릴 때 저희 집 근처에 목수 아저씨가 있었는데 침도 잘 놓아서 사람들이 침을 맞으러 많이 왔습니다. 그때야 소화제나 머리 아프면 먹는 약이 몇 개 없었으니 침을 맞는데, 그 침도 재활용하는 침입니다. 그런데 리어카에 어머니를 눕혀서 침을 맞히러 온 분이 기억이 납니다. 시커멓게 얼굴이 타고 덕지덕지 한 삼베옷을 입었는데 더럽혀진 가운데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것입니다. 제 눈에는 한 줌이나 되어 보일까 하는 몸이 마른 그런 어머니를 싣고 침을 맞으러 오는 그런 모습을 어린 눈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소설을 생각합니다. 저는 유학 때 3년만에 어머니께 돌아온다고 하고 삐그덕거리는 대문을 지나 시내에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갔는데 그렇게 어머니가 우시더라구요.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병약해서도 아니고 제가 어디 위험한 데 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3년 있으면 올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른바 곡소리가 나듯 차를 타고 가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데 말입니다. 결국 저는 그 이후로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학 중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공부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제가 더 커서 대학생이 되고 고시공부를 할 때 시골에 와서 보니 리어카를 실어 나르던 그분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말이나 수레를 다루어서 그랬는지 마방집이라 부르던 그 집의 아들은 참 가난하고 못 배운 반면 그 동생은 경북대에 나와서 잘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계속 들어보니 그분이 동생들을 다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언제인가 저에게 연락이 왔는데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자녀가 다섯 명이 안되는 집이 드물었습니다. 제 외가집은 당시 자녀가 세 명이었는데 자녀가 너무 적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형제가 많으니 보통 장남이나 형제 중 하나가 시골에 머물면서 부모님을 돌봅니다.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 즉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필히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라는 말을 초등학교 때 자주 들었습니다. 집을 나갈 때는 반드시 인사하고 들어올 때는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은 경외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경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입니다. 예배의 본질도 경외입니다. 자유나 평등이 아니라 말입니다. 유희도 아닙니다. 경외가 임마누엘이고 하나님과 함께 되는 것이요, 하나님 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보니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가장 가깝게 느껴지더라는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큰 기업의 회장이 되고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거니와 톨스토이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 봅니다. 사람에게 무엇이 귀하고 중요합니까. 조금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있으면, 예컨대 고기를 반 근이라도 사서 부모를 공양하는 것입니다. 봉양이라고 합니다. 제가 간혹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골에 내려가면 이러한 상념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고생을 많이 하셔서 밤에 주무실 때 끙끙 앓던 것이 마음에 새겨지는데,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인가?’로도 물을 수 있습니다.
2. 나의 존재를 있게 한 존재에 대한 감사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할 때 주로 소유를 봅니다. 그런데 소유는 나의 존재의 중심에 전혀 가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자주 입는 옷이 하나 있는데 25년이 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누군가 선물해 주신 것인데 저에게 가장 귀한 옷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목이 차서 목에 뭔가를 자주 두르는데 그것도 일 년 내내 찹니다. 물건으로 저에게 가장 귀한 것은 어떤 비싼 물건이 아닌 이런 것들입니다. 혹시나 그와 비슷한 거를 한번 사보려 해도 좋은 옷 매장에 가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지퍼가 떨어져서 옷핀으로 여며 다니다가 솜씨가 좋은 수선집에 가니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소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필요하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소중한 그 등산복은 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옷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어버이 날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을 되새기면 그것은 내 존재가 있게 한 그것입니다.
내 존재가 가장 귀하고 소유는 존재에 부속될 뿐입니다. 소유 자체가 귀한 것은 우상입니다. 나에게 필요해서 주신 만물은 용도대로 사용하라는 것이지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감상하고 미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물질적이게 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맞는 것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저에게 우사인 볼트의 다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다리가 있고 눈이 있으니 우면산에 올라가서 진달래를 봅니다. 제 존재가 귀한 것입니다. 조금 못해도 내 다리가 귀한 것입니다. 내 존재가 귀하니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성악가가 많으나 찬송하는 내 입이 나에게는 귀합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이 귀합니다. 가장 귀한 것은 사실 내 존재입니다. 내 존재에 대해 긴요한 소유가 귀한 것이지 그것 외에는 오히려 나를 해치는 소유입니다. 결국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나, 존재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있게 하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제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잘나거나 뛰어난 부모가 아닙니다. 기독교인 부모도 아닙니다. 그저 나를 있게 한 부모입니다. 젊을 때 본 시를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눈이 한쪽 없다는 내용의 “가자미”라는 시입니다. 아마 사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눈이 부끄러워 도망도 가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눈이 나에게 눈을 준 부모의 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산에서 방금 내려와 짐승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런 몰골이 흉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한 어머니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업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한자로 효(孝) 자는 노인을 자식이 업고 있는 형상입니다. 나를 있게 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있게 해 준 분이 또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존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다고 하시고 지명해 불러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창세 전에 우리를 지명하고 부르셔서 내 자신이 있게 하고 아들을 주셔서 내 자신을 구원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낳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나를 낳으신 분입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라고 불러도 다 채워지지 않을 만큼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 삼으시고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시고 지체 되게 하시고 약속의 참여자 되게 하시는 이런 것들이 성경에 계속 증거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자녀의 권세를 믿는 자마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를 낳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그러함과 같습니다. 낳으신 분이 들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낳은 자의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 안에 계시고 한 몸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일차적으로 나입니다. 우리는 이조차도 잘 모릅니다. 소유만을 생각하고 삽니다. 소유에 따라 좋아하기도 슬퍼하기도 합니다.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은 존재의 용어입니다. 소유로는 항상은커녕 하루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소유로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과 하나님을 맞대고 하나일 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가 우리 온 몸을 돌듯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지체 삼는 것입니다. 손발이 지체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낳으시는 사랑, 변개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항상 미쁘신 사랑입니다.
4. 우리를 낳으신 육신의 부모님에 대한 감사
지상에서 부모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부모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합니다.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구약의 약속, 신약의 약속입니다. 그 첫 계명이 바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의무가 있고 바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1에서 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웃 사람에 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그 다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첫 계명은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서 조급하고 바쁩시다. 염려합시다. 친구 못 만난다고 하지 마십시오. 친구는 오랫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곧 떠납니다. 누구를 위해서 더 조급해야 하겠습니까. 동창회가 어디 가지 않습니다. 같이 흘러가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항상 계시지 않습니다. 철이 들어야 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철이 듭니다. 그러니 청개구리와 같이 매일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것을 먼저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6, 19). 사실상 부모의 낳은 사랑, 그것은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비추는 것입니다. 간혹 모질게 자란 자녀가 부모를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받은 사랑과 자녀가 되돌리는 사랑이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듯 부모님의 사랑은 덜도 더도 아닌 우리를 낳으신 것에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여건이나 과거의 기억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그 사실만으로, 존재적으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얼마 전 외국에 입양된 자녀가 한국에 와서 부모를 찾는데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생모를 왜 찾느냐고 하니 부모를 찾아야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냐는 소유로 부모를 접근하면 자식들끼리 결국 상속 재산으로 싸웁니다. 이 시대가 이렇게 잘 먹고 풍족하면서도 그렇게 모자라서 싸우고 다투고 가족끼리도 그렇게 하냐는 말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마십시오. 다 쓰고 가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쓰시고 나 자신을 위해 쓰십시오.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지금 물려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후에도 물려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줘서, 유대인과 같이 주려면 차라리 일찍 물려줘서 혼자 자립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은 함께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경외, 경건인데 사실 이 단어는 부모 공경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외가 곧 부모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때는 특별히 교회라고 하기보다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칼빈도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가족의 표가 할례이고 신약의 교회에 들어가는 표가 세례인데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찌 순종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바리새인들의 고르반에 대한 질책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고르게 된 한 단어가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그것은 바로 ‘모든 일’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단어입니다. 사건이나 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도박과 술을 끊고 음란함을 끊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부모를 더 공경하고 효도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가 들어와서 정말 부모를 더 공경하게 된 그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사람은, 제5계명이 가득 차서 세상 어디보다 부모를 더 효도하는, 그런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사람의 말로 하면 부모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사사건건 부모님에게 따지기보다 일단 굽히라는 것입니다. 두 번 굽히고 세 번 굽히면 약속 있는 첫째 계명,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느 구석 희미한 등불 아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고 순종하고 맞장구 쳐주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부모님께 좀 살갑게 대하십시오. 나를 있게 하신 분의 존재감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멋이 없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담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고 가족의 화목함도 없느냐 말입니다. 부모와 재잘거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녀가 가서 부모님에게 말 걸어주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 15:5).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들을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효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도 철이 없을 때는 그걸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축복입니다. 내가 쉬기를 가장 먼저 원하시는 분이 부모님입니다. 평생 ‘아니오’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제가 요새 교수님들 만나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부럽습니다. 부모님 계신 것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부모님과 재잘거리시기 바립니다. 부모 생각으로 분주하시기 바랍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부모 공경입니다. 모든 것에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는 무시해도 되고 친구는 약속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 그래야 한다면 반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2025년 5월 11일 주일낮예배 설교 | 어버이주일
주님의 기쁨이 되는 부모 순종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골로새서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녹취록
1.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해야 할 존재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 질문을 많이 하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관한 질문은 자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이루고자 전념하는지 그것이 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하는지, 근본적인 물음이 더 중요합니다. 이는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그리고 무엇이 귀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자주 하지 않으며 간혹 해도 스쳐 가듯 질문합니다. 그것보다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주된 관심이 있게 됩니다.
어릴 때 저희 집 근처에 목수 아저씨가 있었는데 침도 잘 놓아서 사람들이 침을 맞으러 많이 왔습니다. 그때야 소화제나 머리 아프면 먹는 약이 몇 개 없었으니 침을 맞는데, 그 침도 재활용하는 침입니다. 그런데 리어카에 어머니를 눕혀서 침을 맞히러 온 분이 기억이 납니다. 시커멓게 얼굴이 타고 덕지덕지 한 삼베옷을 입었는데 더럽혀진 가운데 수건을 이마에 두르고 어머니를 모시고 오는 것입니다. 제 눈에는 한 줌이나 되어 보일까 하는 몸이 마른 그런 어머니를 싣고 침을 맞으러 오는 그런 모습을 어린 눈으로 본 기억이 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소설을 생각합니다. 저는 유학 때 3년만에 어머니께 돌아온다고 하고 삐그덕거리는 대문을 지나 시내에 버스를 타러 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갔는데 그렇게 어머니가 우시더라구요.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왜 그렇게 심하게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병약해서도 아니고 제가 어디 위험한 데 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3년 있으면 올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이른바 곡소리가 나듯 차를 타고 가면서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데 말입니다. 결국 저는 그 이후로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유학 중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가, 공부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제가 더 커서 대학생이 되고 고시공부를 할 때 시골에 와서 보니 리어카를 실어 나르던 그분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아마도 말이나 수레를 다루어서 그랬는지 마방집이라 부르던 그 집의 아들은 참 가난하고 못 배운 반면 그 동생은 경북대에 나와서 잘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계속 들어보니 그분이 동생들을 다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언제인가 저에게 연락이 왔는데 선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에 자녀가 다섯 명이 안되는 집이 드물었습니다. 제 외가집은 당시 자녀가 세 명이었는데 자녀가 너무 적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형제가 많으니 보통 장남이나 형제 중 하나가 시골에 머물면서 부모님을 돌봅니다.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 즉 나갈 때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필히 얼굴을 맞대고 인사하라는 말을 초등학교 때 자주 들었습니다. 집을 나갈 때는 반드시 인사하고 들어올 때는 부모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 앞에 우리 모습은 경외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경외는 기본적으로 두려움입니다. 예배의 본질도 경외입니다. 자유나 평등이 아니라 말입니다. 유희도 아닙니다. 경외가 임마누엘이고 하나님과 함께 되는 것이요, 하나님 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보니 가장 조심스러운 것이 가장 가깝게 느껴지더라는 경험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큰 기업의 회장이 되고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거니와 톨스토이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 봅니다. 사람에게 무엇이 귀하고 중요합니까. 조금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있으면, 예컨대 고기를 반 근이라도 사서 부모를 공양하는 것입니다. 봉양이라고 합니다. 제가 간혹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시골에 내려가면 이러한 상념에 갇힐 때가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고생을 많이 하셔서 밤에 주무실 때 끙끙 앓던 것이 마음에 새겨지는데,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가 무엇인가?’로도 물을 수 있습니다.
2. 나의 존재를 있게 한 존재에 대한 감사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말할 때 주로 소유를 봅니다. 그런데 소유는 나의 존재의 중심에 전혀 가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자주 입는 옷이 하나 있는데 25년이 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누군가 선물해 주신 것인데 저에게 가장 귀한 옷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목이 차서 목에 뭔가를 자주 두르는데 그것도 일 년 내내 찹니다. 물건으로 저에게 가장 귀한 것은 어떤 비싼 물건이 아닌 이런 것들입니다. 혹시나 그와 비슷한 거를 한번 사보려 해도 좋은 옷 매장에 가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는 지퍼가 떨어져서 옷핀으로 여며 다니다가 솜씨가 좋은 수선집에 가니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소유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필요하니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소중한 그 등산복은 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옷입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어버이 날을 맞아 가장 중요한 것을 되새기면 그것은 내 존재가 있게 한 그것입니다.
내 존재가 가장 귀하고 소유는 존재에 부속될 뿐입니다. 소유 자체가 귀한 것은 우상입니다. 나에게 필요해서 주신 만물은 용도대로 사용하라는 것이지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감상하고 미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물질적이게 되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 맞는 것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저에게 우사인 볼트의 다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다리가 있고 눈이 있으니 우면산에 올라가서 진달래를 봅니다. 제 존재가 귀한 것입니다. 조금 못해도 내 다리가 귀한 것입니다. 내 존재가 귀하니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성악가가 많으나 찬송하는 내 입이 나에게는 귀합니다. 찬송하는 내 입술이 귀합니다. 가장 귀한 것은 사실 내 존재입니다. 내 존재에 대해 긴요한 소유가 귀한 것이지 그것 외에는 오히려 나를 해치는 소유입니다. 결국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은 나, 존재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존재를 있게 하신 분이 부모님입니다. 제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잘나거나 뛰어난 부모가 아닙니다. 기독교인 부모도 아닙니다. 그저 나를 있게 한 부모입니다. 젊을 때 본 시를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눈이 한쪽 없다는 내용의 “가자미”라는 시입니다. 아마 사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눈이 부끄러워 도망도 가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눈이 나에게 눈을 준 부모의 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산에서 방금 내려와 짐승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런 몰골이 흉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자식들을 공부시킨 것입니다. 그렇게 한 어머니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업어 주어야 하겠습니까. 한자로 효(孝) 자는 노인을 자식이 업고 있는 형상입니다. 나를 있게 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있게 해 준 분이 또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존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다고 하시고 지명해 불러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창세 전에 우리를 지명하고 부르셔서 내 자신이 있게 하고 아들을 주셔서 내 자신을 구원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낳으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신 분이 아닙니다. 나를 낳으신 분입니다. 하루 종일 아버지라고 불러도 다 채워지지 않을 만큼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함께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 삼으시고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시고 지체 되게 하시고 약속의 참여자 되게 하시는 이런 것들이 성경에 계속 증거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 자녀의 권세를 믿는 자마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를 낳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해 그러함과 같습니다. 낳으신 분이 들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낳은 자의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 안에 계시고 한 몸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일차적으로 나입니다. 우리는 이조차도 잘 모릅니다. 소유만을 생각하고 삽니다. 소유에 따라 좋아하기도 슬퍼하기도 합니다.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이 모든 것은 존재의 용어입니다. 소유로는 항상은커녕 하루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소유로는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과 하나님을 맞대고 하나일 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피가 우리 온 몸을 돌듯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지체 삼는 것입니다. 손발이 지체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낳으시는 사랑, 변개치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항상 미쁘신 사랑입니다.
4. 우리를 낳으신 육신의 부모님에 대한 감사
지상에서 부모가 계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부모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합니다.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입니다. 구약의 약속, 신약의 약속입니다. 그 첫 계명이 바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의무가 있고 바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1에서 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관한 것이고 나머지는 이웃 사람에 관한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먼저 있어야 하는데 그 다음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첫 계명은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부모님을 위해서 조급하고 바쁩시다. 염려합시다. 친구 못 만난다고 하지 마십시오. 친구는 오랫동안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곧 떠납니다. 누구를 위해서 더 조급해야 하겠습니까. 동창회가 어디 가지 않습니다. 같이 흘러가는 무리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항상 계시지 않습니다. 철이 들어야 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철이 듭니다. 그러니 청개구리와 같이 매일 울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것을 먼저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6, 19). 사실상 부모의 낳은 사랑, 그것은 우리가 부모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비추는 것입니다. 간혹 모질게 자란 자녀가 부모를 더 사랑하기도 합니다. 받은 사랑과 자녀가 되돌리는 사랑이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듯 부모님의 사랑은 덜도 더도 아닌 우리를 낳으신 것에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나 여건이나 과거의 기억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낳으신 그 사실만으로, 존재적으로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서 얼마 전 외국에 입양된 자녀가 한국에 와서 부모를 찾는데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생모를 왜 찾느냐고 하니 부모를 찾아야 자신의 인생의 의미가 완성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냐는 소유로 부모를 접근하면 자식들끼리 결국 상속 재산으로 싸웁니다. 이 시대가 이렇게 잘 먹고 풍족하면서도 그렇게 모자라서 싸우고 다투고 가족끼리도 그렇게 하냐는 말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마십시오. 다 쓰고 가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쓰시고 나 자신을 위해 쓰십시오.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지금 물려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후에도 물려줄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줘서, 유대인과 같이 주려면 차라리 일찍 물려줘서 혼자 자립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하나님 경외와 부모 공경은 함께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가장 우선돼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이 경외, 경건인데 사실 이 단어는 부모 공경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경외가 곧 부모 사랑인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때는 특별히 교회라고 하기보다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칼빈도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가족의 표가 할례이고 신약의 교회에 들어가는 표가 세례인데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보이는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하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찌 순종하겠느냐는 예수님의 바리새인들의 고르반에 대한 질책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고르게 된 한 단어가 있습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그것은 바로 ‘모든 일’입니다. 이것은 존재의 단어입니다. 사건이나 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도박과 술을 끊고 음란함을 끊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부모를 더 공경하고 효도 많이 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독교가 들어와서 정말 부모를 더 공경하게 된 그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한국 사람은, 제5계명이 가득 차서 세상 어디보다 부모를 더 효도하는, 그런 한국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옛날 사람의 말로 하면 부모가 죽으라고 하면 죽는 시늉이라도 하라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사사건건 부모님에게 따지기보다 일단 굽히라는 것입니다. 두 번 굽히고 세 번 굽히면 약속 있는 첫째 계명,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느 구석 희미한 등불 아래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다고 순종하고 맞장구 쳐주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부모님께 좀 살갑게 대하십시오. 나를 있게 하신 분의 존재감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멋이 없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담도 즐거운 이야기도 없고 가족의 화목함도 없느냐 말입니다. 부모와 재잘거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녀가 가서 부모님에게 말 걸어주고 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경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 15:5).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들을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효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부모님이 내게 원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저도 철이 없을 때는 그걸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축복입니다. 내가 쉬기를 가장 먼저 원하시는 분이 부모님입니다. 평생 ‘아니오’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을 받습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부모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제가 요새 교수님들 만나서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다는 말을 들으면 그렇게 부럽습니다. 부모님 계신 것이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부모님과 재잘거리시기 바립니다. 부모 생각으로 분주하시기 바랍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부모 공경입니다. 모든 것에 부모님께 순종하십시오.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는 무시해도 되고 친구는 약속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정 그래야 한다면 반대로 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