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복락의 강물 | 시 36:5-10 | 추수감사주일 | 문병호 목사 |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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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9일 주일낮예배 설교  |  추수감사주일


주의 복락의 강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시편 36:5-10

(시편 36:5-10)   [5]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6]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8]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9]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10]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






녹취록



1. 감사의 본질

     우리가 해마다 이때쯤이면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구약의 절기를 지키듯이 하는 것은 아니요, 신약백성으로 살면서 주님이 다 이루신 의를 누리면서 그 가운데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이 미국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메사추세스 주 등에서 많은 사람이 죽고 그리고 추수하고 그야말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미 배를 타고 오면서도 많이 죽었고요, 그런 추수의 결실의 수확의 기쁨을 하나님께 정하여서 하나님께 우리가 이곳에 처음 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생활을 마치고 광야에 와서 첫 열매를 먹었다고 한 것처럼 삶의 감사를 드리기 위한 개념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의 절기는 더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을 하나님께 정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도 나신 것도 고난 당하신 것도 기념하는 것은 기쁜, 귀한 일입니다. 
     강단 앞에 놓인 온갖 과일과 곡식을 보며 참 감사합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보니 참 사무치는 감사함이 있습니다. 오는 길에 보이는 성찬의 피 색과 같은 산수유 나무 열매를 봐도 그것을 있게 하고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고구마도 자리를 잡고 그래서 땅에서 견뎌내고 그리고 이렇게 영역을 넓혀 가면서 땅의 양분을, 수분을 흡수해서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는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인류 문명이 발달로 이기가 있다고 하나 자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참으로 복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함으로 받을 일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이 은혜 위에 은혜, 전적 은혜, 오직 은혜의 누림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자 누리는 것이 성화요 거룩해지는 것으로 많이 나눴습니다. 어떤 조건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 일로 나아간다면 그것이 신앙의 진보입니다. 절대적인 형편과 성격 등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어 의뢰하고 맡기는 것이 진보요 감사입니다. 은혜가 없이 감사가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감사는 신령한 것,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쳐서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심령이 감사로 넘치는 것입니다. 은혜를 누리는 것이 감사입니다. 물질로 표를 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은혜에 대한 아멘이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감사, 전적 감사입니다. 가장 딱한 노릇이 많이 누리면서도 불평하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못되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누리면서도 뭐가 더 아쉬워서 불평을 하는지 말입니다. 물질이 많다고 감사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난해도 감사하고 가난해도, 별거 아닌 것을 먹어도 감사하게 먹을 때 그것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 어릴 때를 보면 참 먹을 것이 없고 그래도 복되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게 보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부자가 감사하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유하면 가진 것이 가진 것을 낳는다고 생각해서 당연히 여기기 쉽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 5:18). 소유적 감사가 아닌 존재적 감사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소유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나의 나 된 것으로, 내 존재로 기뻐하고 감사할 때만 범사에 항상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시 95: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기도도 기본이 감사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잔이 넘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한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감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감사로 기도하고 감사로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가장 우리의 감사한 것이 은혜요, 은혜의 표시가 감사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이니 감사 위에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또 하나님께 구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모습이 우리 감사의 모습입니다. 구약에 여러 제사가 있으나 가장 기본이 감사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로 드리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니, 제물의 종류 전에, 번제와 우양보다 상한 심령을 받으신다고 하셨는데, 이 상한 심령이 바로 감사인 것입니다. 없으면서도 감사하는 그 가운데 눈물, 그것이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언제 감사합니까. 막 넘칠 때 감사하지 않습니다. 나의 나된 것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 가운데 하나님이 나에게 서늘한 무엇 하나라도 찍어 주시고 남겨 주실 때 감사가 있습니다. 


2.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

     오늘 말씀 5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33:13을 보면,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라고 합니다. 구약의 인자는 신약의 사랑입니다. ‘헤세드’라고 합니다. 창조와 구원의 사랑, 지으시고 구원하셔서 온전하게 하시는 사랑, 하늘로부터 내리는 사랑, 내리 사랑, 절대 사랑, 창조자가 지은 것을 모두 알고 사랑하심입니다. 요한일서 4:19을 보면,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합니다. 절대 극한 무한에서 유한한 우리에게 내리는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어떠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면서, 받을 만하게 만드셔서, 그릇을 만드셔서 채우시는 사랑입니다. 
     5절 후반부를 보면,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합니다. 진실하심은 ‘에무나’라고 합니다. 진실, 참됨, 진리가 에무나입니다. 사무쳤다는 것은 퍼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알알이 세포 하나라도, 그 구조, 원리, 운행, 법칙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설계도와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하심과 원하심과 계획하심과 하나님의 열심히 붙어 있는 것이 진실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진실하심은 진리와 신실하심이 결합된 것입니다. 주님이 만물의 운행을 주장하십니다.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의 질서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대로가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돌아가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아시고 이루십니다. 우리가 막막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여기에 뭐가 있을까 하는 데서 하나님은 소출을 내십니다.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질서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법칙, 뜻하심이 하나님의 열심 가운데 편만하게 퍼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해야 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골 1:16; 롬 11:36). 그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만물이 그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요 1:3; 히 1:2). 여러분, 우리가 헤아려서 잘 될 거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곳은 소알 땅, 소돔과 고모라 땅이 됩니다. 우리가 헤아리기보다 하나님이 헤아려서 지시하는 땅이 복됩니다. 우리가 보기에 좋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땅을 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3. 공의 가운데 사랑하시는 하나님

     6절을 보면,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의는 올바름입니다. 하나님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산들과 같다는 것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도 되고, 그것이 요지부동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산은 신령한 것을 가리킵니다. 성잔이 산에 있지 않습니까. 시편 121:1-2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산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왜 자꾸 산을 말합니까? 이는 하나님이 높낮이를 정하시고, 하나님이 평평하게도 하시고, 하나님이 불변하는 집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야 합니다. 주의 의는 성전에서,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께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의가 우리를 올바르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절대 의로우십니다. 예레미야 23:5-6을 보면,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운 가지이십니다.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판단도 하고 판단도 받습니다. 주의 심판이 큰 바다 같다는 것은 그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이요, 세상이 요동치는 것 같아도 조금 바닷속을 몇 미터 들어가면 잠잠합니다. 아모스 5:24을 보면,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판단을 많이 받습니다. 잘한다, 못한다는 판단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이 변함없이 요동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흘러들어가고 흘러나오는 바다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옳다하고, 또는 다른 이의 판단에 너무 나를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큰 일을 못합니다. 사람의 판단은 많은 경우 그릇된 판단이 대세를 이룹니다. 사람에 치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성정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뒤에서 수군수군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치는 것입니다. 심판자의 자리에 서지 말고 심판당하는 자리에 서면 예수님 생각하며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누굴 판단하기보다 돌을 맞는 게 낫습니다. 그러나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원주가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5-6절의 결론이 7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시편 136:1-26을 보면, 매 절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말합니다. 구약백성에게 인자하심은 신약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베푸심은 인자한 베푸심입니다. 우리에게 구원해 주시는 인자가 있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인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물을 가꾸시는 것을 보면, 넘치도록 가꾸십니다. 인자는 오래 참고 우리의 자리에서 체휼하여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우리 자리까지 내려와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혼동되거든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체휼하셔서, 내 고통을 나보다 더 잘 아시고 헤아리십니다. 나는 너무 치여서 고통조차도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음하십니다. 하나님이 우십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 고통스러워 하십니다. 나도 내 고통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너무 고통이 심하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십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공의 가운데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은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병아리가 모이를 얻어 먹으려면 어미를 분별해야 합니다. 호세아 6:6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어두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여호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4:6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호세아 6:3을 보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가운데 인자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나 외인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은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애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헤세드를 누리기 위해서,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애, 자비를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실하게 행하십니다. 아는 것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앎과 사랑이 따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7절에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날게 하시고 신령한 것을 먹게 하십니다. 로마서 6:15로 생각해 보면, 은혜 아래 사는 것입니다. 


4. 주의 복을 풍성히 누림

     8절을 보면,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복이라고 하지 않고 복락이라고 했을까요? 복락은 복을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이러한 강물을 마시게 해 주시나고 했습니다. ‘복락’은 창세기 2:11에 나오는 ‘에덴’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자기 형상으로 지으시고 안식하신 그 동산입니다. 그 동산의 강물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7:38을 보면,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배’는 중심입니다. 거기서 생명이 넘칩니다. 이 가을에 복락을 누리는 강물을 마시게 하십니다. 살찐 것으로 풍족하게 하십니다. 영적인 복뿐만 아니라 육적인 복도 주십니다. 살찐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요하고 신령하고 달콤하고 즐거운 것입니다. 이것을 주의 집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복락의 강수가 흐르고 살찐 것으로 풍부하게 하십니다.
     9절을 보면,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생명을 누리면 8절의 말씀처럼 살찐 것을 먹는데, 신약에서는 9절이 먼저입니다. 빛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 9절의 성취가 있으면 8절처럼 복락의 강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은 9절의 말씀처럼 생명의 원천이신 주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집에서 살찐 적을 먹습니다. 영적으로 살찐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감사하고 즐겁고, 천상에서도 복락이 되고 상급이 됩니다. 주님의 생명은 생기, 생활도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입니다.
     10절을 보면,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함께 하고, 긍휼하심과 공의가 입 맞춥니다. 


5. 예수님의 소유보다 예수님 자신을 붙잡으라

     시편 23:1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 항상 기쁘고 내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물을 붙들지 말고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린 것을 붙잡지 말고 예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 되신 것이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유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바라봅시다. 시편 23:2을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복락의 강물과 통하는 말씀입니다. 시편 23:6을 보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선하심은 진리 가운데 복되심입니다. 진리가 공중에 사무치는 것이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사는 것이 주의 집의 살찐 것을 먹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시편 23편, 36편, 136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실이 공중에 사무친다는 말씀처럼 모든 것에 하나님의 질서가 있으니 그 질서를 우리가 구하면 부요함이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