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3 | 주일낮예배 | 어린이주일 |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 시편 131:1-3 | 문병호 목사
조회수 143
2026년 5월 3일 주일낮예배 설교 | 어린이주일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시편 131:1-3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녹취록
1. 성전으로 올라가는 가정의 노래와 젖 뗀 아이의 마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날과 같은 이름들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어린이도, 어버이도, 스승도 각각 귀한 이름입니다. 오늘 함께 보는 시편 131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묶여 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이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들의 중심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고,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으니 그 마음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는 고백이 나오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며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확신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가정의 복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젖 뗀 아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시편 127편에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젖을 뗀다는 것은 완전히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어머니 품에 있으면서도 잠잠히 의지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젖 뗀 아이처럼 겸손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젖 뗀 아이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고, 먹여야 먹고 돌봐야 자랍니다. 그래서 시편 131편의 마지막 구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는 말씀은, 영원히 젖 뗀 아이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보라는 권면입니다. 이 짧은 세 절의 시편은 자주 설교되는 본문은 아니지만, 어린이 주일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2년 전 아프리카를 다녀온 일이 기억납니다. 신학교에서도 20년 만에 처음 방문한 선교지였고, 우리 교회에서도 처음으로 다녀온 선교였습니다. 나미비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이들입니다. 케이프타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 부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없고 집의 경계도 불분명한 곳이었지만, 선교사님들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희망봉, 케이프타운 대학, 아름다운 해변으로 데려가며 돌보셨습니다.
또 깊은 지역에서 설교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먼지가 많고 환경은 열악했지만, 새로 판 우물 옆 간이 건물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든 생명의 신비와 소망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태원에서 7년 가까이 지낼 때는 외국인들의 다양한 언어가 들렸습니다. 지금은 나무와 새, 꽃이 많은 곳으로 옮겨왔는데,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습니다. 초등학교가 가까워서 아이들이 자주 보이고, 그로 인해 제 마음도 더 즐거워집니다.
아이들은 순수하면서도 힘이 있고, 늘 내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면 즐겁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어떤 어린이는 전쟁이나 질병, 가난 속에서 부모를 모르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없는 아이는 없고, 부모 없는 아이도 없습니다. 부모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더 순수해지고 조건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아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캥거루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어미 주머니로 기어 올라가 젖을 먹고 자라듯, 하나님은 생명을 내시고 그 생명이 살아가게 하십니다. 짐승의 새끼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주신 어린 생명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래서 낳는 것이 귀합니다. 기르는 것도 귀하지만, 생명을 낳는 일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시편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내 집 안방의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요 내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라고 말합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하러 가는 길에서 아내를 보니 결실한 포도나무 같고, 자녀들을 보니 어린 감람나무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복, 자녀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는 복이 이 노래 안에 담겨 있습니다.
2. 부모 공경과 생명의 본질, 가정에서 시작되는 복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세우고 그 안에 자녀를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입니다. 이전 세대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시대를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삶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길러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자녀가 있어야 부모 공경이 가능하므로, 자녀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와 관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모 공경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땅에서 기업을 얻고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흥하려면 사회 안에 부모를 공경하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뉴욕에 갔을 때, 높은 빌딩과 거대한 도시를 보며 단순히 물질적 성취만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인간의 노력과 질서, 가정과 교육의 토대를 떠올렸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들으며, 그들의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회의 본질은 거대한 시스템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마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과 128편은 자녀를 여호와의 기업이라 하고, 식탁에 둘러앉은 자녀들을 감람나무에 비유합니다. 또 청년은 장사의 손에 있는 화살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화살이 있어야 전쟁을 하고 나라를 지키듯, 다음 세대가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청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와 연결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31편에서도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다”라고 고백합니다. 교만은 높아져서 내려다보는 마음이고, 오만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보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반대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의 고백처럼, 시선이 하나님께 향할 때 교만과 오만은 사라집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듯, 하나님을 바라보면 교만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신앙은 억지로 무엇을 없애려 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악망하면 교만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의지하면 오만이 사라집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듯,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아직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양육받을 권리, 배움의 권리,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에서 어린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가정은 단순한 생활 단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복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그 질서가 사회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가정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의 권리와 말씀 교육, 함께 드리는 예배의 복
어린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양육받을 권리, 배움의 권리,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며,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소망을 품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노는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놀이를 단순한 오락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배우는 것이 곧 놀이가 되고, 탐구와 학습이 아이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공부와 배움 자체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말씀을 그대로 배울 권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쉐마의 말씀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별도의 성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접하게 하는 것이 귀합니다. 이해를 돕는 자료가 있을 수는 있지만, 본문 자체를 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듣고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어린 시절에 들은 찬송과 말씀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단순한 이야기나 형식은 잊히지만, 말씀 자체는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면에서 큰 복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아이들이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같습니다.
저도 산에 올라가 자연을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무와 꽃을 보며 창조의 질서를 느낀 것처럼,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어렵게 바꾸려 하기보다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동일한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예배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배웁니다. 부모와 함께 앉아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신앙의 리듬을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지식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예배 속에서 체득되는 신앙이 아이들을 세워 갑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많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할 수 있는 자녀들이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라고 있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어린아이가 가진 작은 것이 큰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살리는 선택을 합니다.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던 사건이나, 예수님께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어린아이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단순히 돌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맡겨진 생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어떻게 말씀으로 세워 갈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4. 생명을 살리는 부모의 책임과 하나님의 보호
어린아이는 단순히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생명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며,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가 자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다고 해서 자녀의 생명을 함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더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여러 사건을 통해 보여 줍니다.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이루어 가셨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어린아이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우리의 소유나 책임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생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부모는 그 과정 속에서 도구로 쓰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평안하고 고요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기쁨을 주노라”, “나의 사랑 가운데 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이 평안과 기쁨과 사랑 가운데 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외적인 형편이 좋아지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축복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진로와 직장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리에서 잘 안착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의 삶을 바라볼 때 단절의 관점이 아니라 연결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젖을 뗐다고 해서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31편 2절의 말씀처럼, 젖 뗀 아이가 여전히 어머니 품에 있듯이 자라가면서도 보호와 인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세상의 생물도 태어난 곳을 떠나 살아가지만 결국 근원을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은 떠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계속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어린아이가 둥지를 떠나도 부모가 먹이를 주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계속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단계에 있든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젖 뗀 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충분히 돌보지 못하는 상황도 있고, 자녀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모가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생명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상처나 부족함만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본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인도하십니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입니다. 자녀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를 바라보며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5.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여호와를 바라는 삶
젖을 뗐다고 해서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31편 2절의 말씀처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우리는 자라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다스리는 영역이 넓어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21편의 고백처럼 눈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교만한 시선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의지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착함’과 ‘선함’의 차이입니다. 착한 아이는 세상에 잘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아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때로는 세상과 부딪히고 갈등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착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그 아이는 선한 아이로 자라갑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열심이 있었고 사람의 기준으로는 착한 모습이었지만, 참된 선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선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단순히 착하게 키우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로 자라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이나 밖에서 갈등을 겪고 세상과 부딪히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 가운데 서게 될 때 참된 선함이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의 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의 과정 속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시간이나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부족함이나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바라보며 그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시고 끝까지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젖 뗀 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습니다. 젖을 떼었어도 여전히 그 품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에 자녀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평안과 사랑, 기쁨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5월 3일 주일낮예배 설교 | 어린이주일
젖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시편 131:1-3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녹취록
1. 성전으로 올라가는 가정의 노래와 젖 뗀 아이의 마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 주일, 어버이 주일, 스승의 날과 같은 이름들은 모두 아름답습니다. 어린이도, 어버이도, 스승도 각각 귀한 이름입니다. 오늘 함께 보는 시편 131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묶여 있는데,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이들의 마음을 담은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노래들의 중심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예배하고,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리러 올라갔으니 그 마음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라는 고백이 나오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시며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확신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가정의 복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젖 뗀 아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시편 127편에는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젖을 뗀다는 것은 완전히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어머니 품에 있으면서도 잠잠히 의지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젖 뗀 아이처럼 겸손하고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젖 뗀 아이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분별하지 못하고, 먹여야 먹고 돌봐야 자랍니다. 그래서 시편 131편의 마지막 구절,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는 말씀은, 영원히 젖 뗀 아이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라보라는 권면입니다. 이 짧은 세 절의 시편은 자주 설교되는 본문은 아니지만, 어린이 주일 말씀을 준비하는 가운데 떠올랐습니다.
2년 전 아프리카를 다녀온 일이 기억납니다. 신학교에서도 20년 만에 처음 방문한 선교지였고, 우리 교회에서도 처음으로 다녀온 선교였습니다. 나미비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아이들입니다. 케이프타운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 부부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화장실도 제대로 없고 집의 경계도 불분명한 곳이었지만, 선교사님들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희망봉, 케이프타운 대학, 아름다운 해변으로 데려가며 돌보셨습니다.
또 깊은 지역에서 설교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먼지가 많고 환경은 열악했지만, 새로 판 우물 옆 간이 건물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든 생명의 신비와 소망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태원에서 7년 가까이 지낼 때는 외국인들의 다양한 언어가 들렸습니다. 지금은 나무와 새, 꽃이 많은 곳으로 옮겨왔는데, 무엇보다 아이들이 많습니다. 초등학교가 가까워서 아이들이 자주 보이고, 그로 인해 제 마음도 더 즐거워집니다.
아이들은 순수하면서도 힘이 있고, 늘 내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면 즐겁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입니다.
어떤 어린이는 전쟁이나 질병, 가난 속에서 부모를 모르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없는 아이는 없고, 부모 없는 아이도 없습니다. 부모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합니다. 어린아이를 바라볼 때 더 순수해지고 조건 없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 아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캥거루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어미 주머니로 기어 올라가 젖을 먹고 자라듯, 하나님은 생명을 내시고 그 생명이 살아가게 하십니다. 짐승의 새끼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주신 어린 생명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래서 낳는 것이 귀합니다. 기르는 것도 귀하지만, 생명을 낳는 일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시편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내 집 안방의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요 내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라고 말합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하러 가는 길에서 아내를 보니 결실한 포도나무 같고, 자녀들을 보니 어린 감람나무 같습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는 복, 자녀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는 복이 이 노래 안에 담겨 있습니다.
2. 부모 공경과 생명의 본질, 가정에서 시작되는 복
남녀가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세우고 그 안에 자녀를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큰 은혜입니다. 이전 세대는 전쟁과 가난 속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느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시대를 생각하면,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삶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고 길러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자녀가 있어야 부모 공경이 가능하므로, 자녀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와 관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모 공경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사회의 근본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가 땅에서 기업을 얻고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나라가 흥하려면 사회 안에 부모를 공경하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뉴욕에 갔을 때, 높은 빌딩과 거대한 도시를 보며 단순히 물질적 성취만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인간의 노력과 질서, 가정과 교육의 토대를 떠올렸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영향력을 들으며, 그들의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회의 본질은 거대한 시스템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마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과 128편은 자녀를 여호와의 기업이라 하고, 식탁에 둘러앉은 자녀들을 감람나무에 비유합니다. 또 청년은 장사의 손에 있는 화살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화살이 있어야 전쟁을 하고 나라를 지키듯, 다음 세대가 있어야 공동체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청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미래와 연결된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31편에서도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다”라고 고백합니다. 교만은 높아져서 내려다보는 마음이고, 오만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보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반대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의 고백처럼, 시선이 하나님께 향할 때 교만과 오만은 사라집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듯, 하나님을 바라보면 교만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신앙은 억지로 무엇을 없애려 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악망하면 교만이 사라지고, 여호와를 의지하면 오만이 사라집니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바라보듯,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아직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양육받을 권리, 배움의 권리,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정과 교회에서 어린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가정은 단순한 생활 단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와 복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그 질서가 사회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가운데 가정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의 권리와 말씀 교육, 함께 드리는 예배의 복
어린아이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으로서 존귀한 존재입니다. 양육받을 권리, 배움의 권리, 무엇보다 하나님을 예배할 권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배우며,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소망을 품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노는 권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놀이를 단순한 오락으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배우고 익히는 과정으로 보아야 합니다. 배우는 것이 곧 놀이가 되고, 탐구와 학습이 아이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공부와 배움 자체가 아이들에게 중요한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말씀을 그대로 배울 권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쉐마의 말씀처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린이를 위한 별도의 성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접하게 하는 것이 귀합니다. 이해를 돕는 자료가 있을 수는 있지만, 본문 자체를 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성경을 듣고 읽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어린 시절에 들은 찬송과 말씀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단순한 이야기나 형식은 잊히지만, 말씀 자체는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드리고, 찬송하며,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 면에서 큰 복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아이들이 말씀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예배드리는 모습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와 같습니다.
저도 산에 올라가 자연을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무와 꽃을 보며 창조의 질서를 느낀 것처럼,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칠 때 어렵게 바꾸려 하기보다 말씀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동일한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예배 안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배웁니다. 부모와 함께 앉아 말씀을 듣고 찬송하며, 신앙의 리듬을 몸으로 익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교육입니다. 지식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예배 속에서 체득되는 신앙이 아이들을 세워 갑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많은 자녀들이 있습니다.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기도할 수 있는 자녀들이 있고,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라고 있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어린아이가 가진 작은 것이 큰 역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는 어린아이가 단순히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살리는 선택을 합니다.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던 사건이나, 예수님께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어린아이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단순히 돌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께 맡겨진 생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어떻게 말씀으로 세워 갈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4. 생명을 살리는 부모의 책임과 하나님의 보호
어린아이는 단순히 보호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생명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하며,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녀를 살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부모가 자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다고 해서 자녀의 생명을 함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더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습을 여러 사건을 통해 보여 줍니다.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띄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셨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이루어 가셨습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어린아이 한 생명이 얼마나 귀한지를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우리의 소유나 책임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생명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기에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십니다. 부모는 그 과정 속에서 도구로 쓰임 받는 존재입니다.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평안하고 고요하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나의 기쁨을 주노라”, “나의 사랑 가운데 거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이 이 평안과 기쁨과 사랑 가운데 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외적인 형편이 좋아지는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축복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진로와 직장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리에서 잘 안착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의 삶을 바라볼 때 단절의 관점이 아니라 연결의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젖을 뗐다고 해서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31편 2절의 말씀처럼, 젖 뗀 아이가 여전히 어머니 품에 있듯이 자라가면서도 보호와 인도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장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세상의 생물도 태어난 곳을 떠나 살아가지만 결국 근원을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은 떠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계속 지키시고 돌보십니다. 어린아이가 둥지를 떠나도 부모가 먹이를 주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계속 돌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단계에 있든 하나님을 떠난 존재가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젖 뗀 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 속에는 다양한 감정이 있습니다. 때로는 부모가 충분히 돌보지 못하는 상황도 있고, 자녀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모가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생명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상처나 부족함만을 바라보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라는 본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부모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인도하십니다.
결국 부모는 자녀를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존재입니다. 자녀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를 바라보며 맡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5.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여호와를 바라는 삶
젖을 뗐다고 해서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 131편 2절의 말씀처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우리는 자라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어른이 되어 스스로 판단하고 다스리는 영역이 넓어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21편의 고백처럼 눈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교만한 시선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는 의지의 시선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착함’과 ‘선함’의 차이입니다. 착한 아이는 세상에 잘 맞추어 살아가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아이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때로는 세상과 부딪히고 갈등하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착하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붙드시면 그 아이는 선한 아이로 자라갑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열심이 있었고 사람의 기준으로는 착한 모습이었지만, 참된 선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선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선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단순히 착하게 키우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로 자라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집이나 밖에서 갈등을 겪고 세상과 부딪히는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 가운데 서게 될 때 참된 선함이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녀의 외적인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본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삶의 과정 속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충분히 돌보지 못했던 시간이나 상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끝까지 붙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부모가 완전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부족함이나 상처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바라보며 그 생명을 붙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시고 끝까지 지키시며 인도하십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시 131:3)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젖 뗀 아이와 같은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품을 떠나지 않습니다. 젖을 떼었어도 여전히 그 품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어린이 주일에 자녀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평안과 사랑, 기쁨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보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