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 | 주일낮예배 |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 사도행전 5:17-32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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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6일 주일낮예배 설교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사도행전 5:17-32
(사도행전 5:17-32)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녹취록
1. 성령의 권능: 은혜와 은사
우리 주님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생기는데 첫째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이요, 둘째는 은사입니다. 은사는 마땅히 주의 백성이 행해야 하는 일들에 필요한 달란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칭하게 되는 것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이 있으면 땅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권세와 명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저 신분을 유지하면서 누리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자녀 삼으신 신분 가운데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자 하는데, 그것을 재능이나 자질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도록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이 말씀하는 증인이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권능과 권세는 두나미스라는 원어로 사실상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이 되어 새 마음을 갖는 것은 새 일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 빛을 영접할 때 그것을 내 안에 담아두기보다 비추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아무도 성령을 당기거나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창세 전에 백성 삼으신 자들에게 들어오십니다. 그 성령을 받으면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믿음의 선물을 받습니다. 믿음이 먼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리는 것이 증인 됨이라면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 우리가 누리고 전할 빛이요 향기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은혜, 은사, 빛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빛을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은 빛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향도 마찬가지입니다. 향을 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져서 내 안에 향이 일어나면 향이신 예수가 들어오면, 빛이신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빛을 향을 누리는데 그것이 빛을 비추는 것이요,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잘 비추는 것이 가장 잘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버릇대로 각 곳의 대학교를 가 봤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을 가 봤습니다. 캠퍼스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는데 법대를 들어가 봤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UCLA와 칼텍이라는 곳에 가봤습니다. 그리고 오기 얼마 전에 말리부라는 곳에 가 봤습니다. 저야 어디든지 가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릅니다만 거기에 페퍼다인 대학교가 있었습니다. 언덕 위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교단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캠퍼스에 계속 써 있는 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춘다는 것이 일입니까. 비춘다는 것은 사실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날 때 진달래가 피고 한창 아름다운 것을 잘 보지 못하게 되니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에 가 보니 모든 꽃들과 풍광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남쪽 파타고니아 지역도 가보고 빙하도 봤습니다. 사실상 저는 선교를 위하여 간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선교적 목적이 없이 간 곳은 샌프란시스코와 남부 일부 지방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도 꽃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꽃도 가만히 보면 아름다운 모양을 내는 것은 사실 누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시듭니다. 그러면 거기서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누린다는 것이 보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누리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꽃이 열매를 맺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는 것이 빛을 누리는 것이요, 향을 내는 것이 향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고 하셨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향기입니다. 근원적인 향, 참 향입니다. 생명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이제는 내가 내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 말씀, 빛을 누리고 향을 누리고 그러하니 말씀대로 빚어지고 향이 나고 빛을 비추고 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내 안에만 있으면 그것은 죽이는 광선입니다. 피폭이라고 합니다. 빛이 내 안에서 비추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이 떨어져서 썩어야 합니다. 썩는 것은 발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다니면서 가장 크게 새긴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직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많이 쓰는 말처럼 인사이더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변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풍덩 빠지는 것입니다. 모처럼 쫓기는 일상을 놓고 다니다 보니 정직이라는 단어가 생각 났습니다. 너무 휩쓸려 가면서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말씀을 받아서 즐거워는 하는데 그 가운데 푹 들어가서 살지 않고 외곽에만 머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말씀이 썩어야 우리 마음이 즐겁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저 머물기만 하면 비추지 않고 증인 됨이 없이 그저 머물기만 하면 우리 안에서 오히려 말씀으로 인해 부대끼게 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들어서가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아멘 하고 그것이 내 안에 썩어야 합니다. 썩는 것은 발효하는 것입니다. 열매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향이 머물면 악취요, 소금도 머물기만 하면 부식제가 됩니다. 맛을 내려면 발산을 해야 합니다.
신약시대 새 언약의 백성, 새 마음을 주시고 새 능력을 주시고 새 영을 준 백성에게는 두 가지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누리고 생활을 누림과 함께 증인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은 따로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동시에 주어집니다. 저 사람은 증인 되는 삶을 살고 나는 아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고 아멘 하며 감사하는 것이 바로 드러내고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 되는 삶입니다. 이번에 여행을 가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달래를 빨리 시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멀리 여행을 가서 다녀 보니 ‘세상이 아름답구나’, 그리고 ‘겸손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전하지 않으면 시기만 가득해질 뿐이다
본문 17절의 대제사장과 함께 있는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 성령을 받고 말씀의 빛과 맛과 향을 내는 예수를 믿는 자들과 대조되는 자들, 예수를 핍박하고 종교로 먹고사는 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공통점은 비추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머물기만 합니다. 그러니 본문 17절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다’고 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의 시기가 가장 무섭습니다. 내가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영적인 것으로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교만이 있으니 판단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입니다. 자질은 다양하고 공로는 여러 갈래로 들어오지만 은혜는 하나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공간과 가구를 다양하게 활용해도 빛은 오직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관리인, 종교지식가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은 주님을 믿는 자들, 성령이 임하여 증인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담아놓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대로 병자도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 성령을 받은 백성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이 떨어지는 대로 역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그 가운데 주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위하시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이것으로 칭찬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가장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이 데살로니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말씀대로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도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곧 순교도 일어나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우리가 예수를 죽이고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니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너희가 죽였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죽으신 것이면 내가 죽인 것입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사실 다 우리 탓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땅에 오시고 죽이시고 살리신 이유는 본문 30절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 이것이 초대교회 설교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증인입니다. 증인은 누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렸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열매를 내가 누린 것입니다. 증인은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가 모든 것을 이루어서 그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셨으니 그 가운데 우리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충만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누리는 것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놀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므로 자괴감을 갖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4. 십자가는 죄책감을 넘어선 은혜이다
본문 28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은 예수의 죽음을 저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는데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면 사람들이 나를 돌로 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날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리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부활을 저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전하지 못하게 금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예수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을 느낍니까?
이번에 LA에서 마지막 날 게티 박물관을 갔습니다. 게티라는 사람은 유전을 개발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니 진짜 세계적인 그림인 반고흐의 ‘아이리스’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분이 그 그림이 가짜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여러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림이 엘 그레코(El Greco)의 ‘십자가 위의 예수’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제 <<기독론>> 책에 루벤스의 십자가 그림이 있는데 그것과 함께 유명한 그림입니다. 흑암이 몰려와서 십자가를 덮는 그림입니다.
나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까. 우리가 죽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책감조차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은 부활의 도를 모르고 십자가를 미련하게 생각하니 십자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신 그 십자가 사건의 증인 되는 삶은 그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본문 19절은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낸 것을 그립니다. 강권적으로 구하신 것입니다.
5. 복음을 누리면 더욱 전하게 된다
그리고 20절,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라고 합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입니다. 천사가 말한 것입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입니다. 증인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이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지 28절은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가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땅 끝, 세상 끝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은 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은 비추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서’입니다.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지에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남미 각지에서 온 신학생들을 6시간 동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상파울로에서는 다민족 교회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토론도 했습니다. 이번에 20년만에 사실상 첫 안식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가는 곳마다 너무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햄버거밖에 안 사먹는데 가는 데마다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다 주고 그래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습니다. 좋은 식당도 많이 가 봤습니다. 제 제자를 헤아려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생각해 보니 8천, 9천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성전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가장 제자들을 핍박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운 이슬람권, 불교권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기조차 두려운데 서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예수, 십자가의 도, 부활의 도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상파울로를 가 보니 신오순절교단이라고 해서 솔로몬 교회라는 교회를 크게 지어놨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습니다. 교회마다 예수 얼굴을 크게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때 휠체어를 붙여 놨다고 합니다.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된 것을 표한다고 말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입니다. LA도 가 보니 부흥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없습니다. 부흥은 진리의 부흥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남미에는 아직 진리의 부흥이 사실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해방신학, 오순절 등은 있었으나 말씀의 진리의 부흥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간 교회들이 우연인 듯하지만 적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도 현지인도 가르쳐야 합니다. LA도 제자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했습니다.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회개함과 죄 사함을 전했습니다. 회개의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회개 설교하면 성도가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모든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말하라, 가르치라, 복음을 전하라는 세 가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조차 말라고 본문의 종교지도자들은 엄금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행 4:18).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눈과 귀가 아닌 우리 심령으로 누린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들이 무성합니다. 훨씬 잡초가 강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으나 전혀 유익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리는 것이요 증인 된 삶으로 땅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전화를 한 통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누군가 공짜로 나눠주며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좋겠다고 평소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경북 구미에 제 제자 중 한 목사님이 성은교회라는 곳에서 사흘간 기독교강요를 가르치고 신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주고 그중 명민한 신학생 10명에게는 장학금을 주는 행사를 계획했는데 9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시골 교회 목회자를 불러서 컴퓨터도 주고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요 누리는 것입니다.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뛸 때 우리가 가장 즐겁고 누리는 것입니다.
2024년 6월 16일 주일낮예배 설교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사도행전 5:17-32
(사도행전 5:17-32)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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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권능: 은혜와 은사
우리 주님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두 가지가 우리에게 생기는데 첫째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이요, 둘째는 은사입니다. 은사는 마땅히 주의 백성이 행해야 하는 일들에 필요한 달란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칭하게 되는 것이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이 있으면 땅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권세와 명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저 신분을 유지하면서 누리는 것으로 족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면 상급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자녀 삼으신 신분 가운데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상급을 주시고자 하는데, 그것을 재능이나 자질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감당하도록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이 말씀하는 증인이 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권능과 권세는 두나미스라는 원어로 사실상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이 되어 새 마음을 갖는 것은 새 일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참 빛을 영접할 때 그것을 내 안에 담아두기보다 비추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아무도 성령을 당기거나 이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창세 전에 백성 삼으신 자들에게 들어오십니다. 그 성령을 받으면 회개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믿음의 선물을 받습니다. 믿음이 먼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게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주와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리는 것이 증인 됨이라면 이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2. 우리가 누리고 전할 빛이요 향기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말씀은 다름 아닌 은혜, 은사, 빛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빛을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은 빛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향도 마찬가지입니다. 향을 내기 위해서는 그것이 내 안에 임하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져서 내 안에 향이 일어나면 향이신 예수가 들어오면, 빛이신 예수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빛을 향을 누리는데 그것이 빛을 비추는 것이요,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잘 비추는 것이 가장 잘 누리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버릇대로 각 곳의 대학교를 가 봤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을 가 봤습니다. 캠퍼스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는데 법대를 들어가 봤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UCLA와 칼텍이라는 곳에 가봤습니다. 그리고 오기 얼마 전에 말리부라는 곳에 가 봤습니다. 저야 어디든지 가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릅니다만 거기에 페퍼다인 대학교가 있었습니다. 언덕 위 바닷가에 세워져 있었는데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교단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캠퍼스에 계속 써 있는 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춘다는 것이 일입니까. 비춘다는 것은 사실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을 떠날 때 진달래가 피고 한창 아름다운 것을 잘 보지 못하게 되니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에 가 보니 모든 꽃들과 풍광이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남쪽 파타고니아 지역도 가보고 빙하도 봤습니다. 사실상 저는 선교를 위하여 간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선교적 목적이 없이 간 곳은 샌프란시스코와 남부 일부 지방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도 꽃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꽃도 가만히 보면 아름다운 모양을 내는 것은 사실 누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시듭니다. 그러면 거기서 열매가 나옵니다. 이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누린다는 것이 보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누리는 것이지만 달리 말하면 꽃이 열매를 맺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는 것이 빛을 누리는 것이요, 향을 내는 것이 향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빛이라고 하셨고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향기입니다. 근원적인 향, 참 향입니다. 생명의 소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서 이제는 내가 내 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니 말씀, 빛을 누리고 향을 누리고 그러하니 말씀대로 빚어지고 향이 나고 빛을 비추고 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 내 안에만 있으면 그것은 죽이는 광선입니다. 피폭이라고 합니다. 빛이 내 안에서 비추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이 떨어져서 썩어야 합니다. 썩는 것은 발산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다니면서 가장 크게 새긴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직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많이 쓰는 말처럼 인사이더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주변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풍덩 빠지는 것입니다. 모처럼 쫓기는 일상을 놓고 다니다 보니 정직이라는 단어가 생각 났습니다. 너무 휩쓸려 가면서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말씀을 받아서 즐거워는 하는데 그 가운데 푹 들어가서 살지 않고 외곽에만 머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처럼 말씀이 썩어야 우리 마음이 즐겁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저 머물기만 하면 비추지 않고 증인 됨이 없이 그저 머물기만 하면 우리 안에서 오히려 말씀으로 인해 부대끼게 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들어서가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아멘 하고 그것이 내 안에 썩어야 합니다. 썩는 것은 발효하는 것입니다. 열매로 발산하는 것입니다. 향이 머물면 악취요, 소금도 머물기만 하면 부식제가 됩니다. 맛을 내려면 발산을 해야 합니다.
신약시대 새 언약의 백성, 새 마음을 주시고 새 능력을 주시고 새 영을 준 백성에게는 두 가지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을 누리고 생활을 누림과 함께 증인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은 따로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동시에 주어집니다. 저 사람은 증인 되는 삶을 살고 나는 아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고 아멘 하며 감사하는 것이 바로 드러내고 비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증인 되는 삶입니다. 이번에 여행을 가서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달래를 빨리 시들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멀리 여행을 가서 다녀 보니 ‘세상이 아름답구나’, 그리고 ‘겸손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렇게 위대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전하지 않으면 시기만 가득해질 뿐이다
본문 17절의 대제사장과 함께 있는 사두개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 성령을 받고 말씀의 빛과 맛과 향을 내는 예수를 믿는 자들과 대조되는 자들, 예수를 핍박하고 종교로 먹고사는 자들,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공통점은 비추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머물기만 합니다. 그러니 본문 17절에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다’고 한 것입니다. 영적인 것의 시기가 가장 무섭습니다. 내가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영적인 것으로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교만이 있으니 판단이 있고 시기가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입니다. 자질은 다양하고 공로는 여러 갈래로 들어오지만 은혜는 하나로 들어옵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공간과 가구를 다양하게 활용해도 빛은 오직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관리인, 종교지식가들, 바리새인들, 율법사들은 주님을 믿는 자들, 성령이 임하여 증인 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비추는 것이 아니라 담아놓는 것입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대로 병자도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때 성령을 받은 백성들의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이 떨어지는 대로 역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그 가운데 주님이 나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위하시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이것으로 칭찬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가장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이 데살로니가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말씀대로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도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제자들이 많은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곧 순교도 일어나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설교는 우리가 예수를 죽이고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니 우리가 그 일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너희가 죽였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죽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죽으신 것이면 내가 죽인 것입니다.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사실 다 우리 탓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땅에 오시고 죽이시고 살리신 이유는 본문 30절과 같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행 5:30). 이것이 초대교회 설교입니다.
우리가 그 일에 증인입니다. 증인은 누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누렸습니다. 예수의 부활의 열매를 내가 누린 것입니다. 증인은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자입니다. 예수가 모든 것을 이루어서 그의 거룩하심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셨으니 그 가운데 우리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충만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누리는 것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를 하나님이 살렸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놀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므로 자괴감을 갖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4. 십자가는 죄책감을 넘어선 은혜이다
본문 28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은 예수의 죽음을 저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예수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셨는데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면 사람들이 나를 돌로 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날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누리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부활을 저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전하지 못하게 금한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예수의 죽음 앞에서 죄책감을 느낍니까?
이번에 LA에서 마지막 날 게티 박물관을 갔습니다. 게티라는 사람은 유전을 개발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니 진짜 세계적인 그림인 반고흐의 ‘아이리스’라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있던 분이 그 그림이 가짜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여러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그림이 엘 그레코(El Greco)의 ‘십자가 위의 예수’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제 <<기독론>> 책에 루벤스의 십자가 그림이 있는데 그것과 함께 유명한 그림입니다. 흑암이 몰려와서 십자가를 덮는 그림입니다.
나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죄책감입니까. 우리가 죽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책감조차 없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두개인, 대제사장들은 부활의 도를 모르고 십자가를 미련하게 생각하니 십자가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신 그 십자가 사건의 증인 되는 삶은 그것을 누리는 삶입니다. 누리면 기쁘고 즐겁습니다. 본문 19절은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끌어낸 것을 그립니다. 강권적으로 구하신 것입니다.
5. 복음을 누리면 더욱 전하게 된다
그리고 20절,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라고 합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입니다. 천사가 말한 것입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입니다. 증인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이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칩니다.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권세가 있는지 28절은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가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땅 끝, 세상 끝 날까지 가는 것입니다. 누리는 것은 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잘 누리는 것은 비추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서’입니다.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지에서 주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남미 각지에서 온 신학생들을 6시간 동안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상파울로에서는 다민족 교회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과 토론도 했습니다. 이번에 20년만에 사실상 첫 안식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큰 위로를 느꼈습니다. 가는 곳마다 너무 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햄버거밖에 안 사먹는데 가는 데마다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다 주고 그래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습니다. 좋은 식당도 많이 가 봤습니다. 제 제자를 헤아려 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생각해 보니 8천, 9천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성전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가장 제자들을 핍박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우리가 가장 어려운 이슬람권, 불교권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기조차 두려운데 서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예수, 십자가의 도, 부활의 도를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고후 4:13).
상파울로를 가 보니 신오순절교단이라고 해서 솔로몬 교회라는 교회를 크게 지어놨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없습니다. 교회마다 예수 얼굴을 크게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한때 휠체어를 붙여 놨다고 합니다. 걷지 못하던 자가 걷게 된 것을 표한다고 말입니다. 기복신앙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입니다. LA도 가 보니 부흥이 필요합니다. 복음이 없습니다. 부흥은 진리의 부흥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남미에는 아직 진리의 부흥이 사실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해방신학, 오순절 등은 있었으나 말씀의 진리의 부흥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간 교회들이 우연인 듯하지만 적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도자도 현지인도 가르쳐야 합니다. LA도 제자가 그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전하라’고 했습니다. 가감 없이 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회개함과 죄 사함을 전했습니다. 회개의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회개 설교하면 성도가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모든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말하라, 가르치라, 복음을 전하라는 세 가지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조차 말라고 본문의 종교지도자들은 엄금했습니다.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행 4:18).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눈과 귀가 아닌 우리 심령으로 누린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들이 무성합니다. 훨씬 잡초가 강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으나 전혀 유익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리는 것이요 증인 된 삶으로 땅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전화를 한 통을 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기독교강요를 누군가 공짜로 나눠주며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좋겠다고 평소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경북 구미에 제 제자 중 한 목사님이 성은교회라는 곳에서 사흘간 기독교강요를 가르치고 신학생들에게는 무료로 주고 그중 명민한 신학생 10명에게는 장학금을 주는 행사를 계획했는데 90명이 몰렸다고 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시골 교회 목회자를 불러서 컴퓨터도 주고 한다고 합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일이 아니요 누리는 것입니다. 가장 즐거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뛸 때 우리가 가장 즐겁고 누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