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녹취록
1. 전도자이기 위한 기도
누가 제게 기도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에베소서 6:19의 말씀으로 기도제목을 말씀드릴 것 같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기도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부탁한 기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전라도 정읍에 가서 어느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만 있으면 일하신다”라고 했습니다. 땅이나 돈이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명 받은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아무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전도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남미와 미국 여행을 하면서, 익어 추구할 곡식이 널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어 희어 추수할 곡식이 많다는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의 법칙입니다. 우면동에서도 그렇고, 아프리카에서도, 남미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오랜만에 작년에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서 보았습니다. 국내 여행은 가봤습니다만, 해외 여행은 그렇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는 것과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계란을 파는 소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간절한 눈빛이 기억납니다.
이사야는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짐받아서 사용받았습니다. 정결한 입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르는 불이 있고 죽이는 독이 있는 것이 사람의 입입니다. 누가 깨끗해서 입을 열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입을 사용하고자 하시면 그 입을 정결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오늘 예레미야 1:9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도 능변가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명이 있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은혜입니다. 누구에게든 가라는 것은 소명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가닿아야 합니다. 주님은 가서 전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모여들기보다 찾아가셨습니다.
저의 기도제목은 항상 말씀을 달라는 것입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아이와 같습니다. ‘주여 말씀을 주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던 자를 주님이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분명하게 말하게 되었다고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니 혀가 풀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웅변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고백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는 것이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증인 된 삶과 누리는 삶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빛이 내 것이 되면 내가 그 빛을 발산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세상
세상은 심히 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때가 지날수록 더욱 악합니다. 분명 좋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뭔가 모르게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뉴스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범죄가 험악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것 같습니다. 밤 11시에도 다닐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안전하다는 곳에 있었는데, 해가 지니 위험해 보였습니다.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복음이 전해졌는데, 왜 그럴까요? 예레미야서는 보면,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2:11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5:1-7을 보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맺음이 어찜이냐고 하십니다. 작년에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가 보니 기독교 비율이 90%이고, 아르헨티나는 우리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아름답고 지적인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가서 보니, 일찍이 복음이 떨어진 이 도시에 왜 이리 마약을 한 사람들이 많고 대낮에도 그런 사람들이 길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것에 대하여 두 가지를 진단합니다. 첫 번째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웅덩이를 버리고 내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판 웅덩이를 쓰지 못한 웅덩이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해서, 비행기가 내릴 때 십자가가 많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물가가 올라서 아르헨티나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마약, 제3차 세계 대전의 소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습니까? 땅이 나빠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롯은 자기 소견대로 그 땅을 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비 정신을 가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롯은 그 땅을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겼습니다. 인간이 자기 소견대로 선택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간혹 뒷전에 밀리는 것 같아도, 늦게 된 자가 먼저 되고,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영원하고 오래갑니다. 왜 세상이 고통이고, 신음소리가 들립니까? 예레미야 2:19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호세아 선지자도 4:6에서 말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버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해를 버리면 얼어 죽습니다. 하물며 여호와를 버리면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가까이 하며 모시는 것, 그를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이 선이요 복입니다. 가장 기쁜 것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사시대는 황폐하지 않았음에도 암흑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중세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음에도 암흑기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 서 있지 않고, 예수만 유일한 구주로 믿지 않고, 사제와 교황과 교회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3. 먼저 내가 말씀을 먹자
에스겔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로 암흑기입니다. 여호와는 그에게 두루마리를 먹여 창자에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에스겔이 그것을 먹었더니 그 맛이 꿀과 같다고 했습니다(겔 3:1-3).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저도 말씀(두루마리)을 먹고 배에 넣고 창자에 채우길 원합니다. 목구멍에 걸치거나 입에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채워져 그 달기가 꿀과 같기를 원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가지신 분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 두루마리의 비밀을 푸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말씀이 풀립니다. 요한계시록 10:10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먹으니 입에는 꿀과 같이 다나, 배에는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는 두루마리를 창자에까지 넣으니 꿀과 같이 달라고 하였는데,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말씀을 내 속에만 넣어두지 말고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왜 종말론적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직 구원받을 백성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찔레가 있든 형극이 있든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9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강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표현입니다. 밥의 냄새를 맡아서는 안 되고 밥을 먹어야 삽니다. 먹고 소화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밥이 양분이 되어 힘을 얻습니다. 양분이 없으면, 웃지도 못합니다. 드셔야 웃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을 다르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듣기에 힘쓰고 말씀에 아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교훈하고 책망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4. 말씀을 전하도록 이끄심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먹으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0:9을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찌 우리가 나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복음을 못 전한다고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감옥에 있었음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을 알려면 앞의 8절을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우리 주의 기도는 이처럼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자랑거리 삼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예레미야가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여행을 하면, “진리의 부흥을 주옵소서, 처처에 말씀의 일꾼을 세우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게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가 열심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내어 주시는 열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다 됩니다. 기도하면 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이 나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가 되어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합시다. 목사만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익어 희어 추수할 곡식이 내 옆에, 내 가족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면 안아 주시고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5.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 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요? 에스겔 2:6을 보면,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제가 좀 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약하는 사람들을 피해만 다녔을까? 내가 그 벤치에 앉아서 기도라고 했어야 하지 않는가? 과연 내가 목사인가? 그들을 피하여 숙소로 돌아오는 내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많은 선교정책, 전도학이 있습니다. 현대전도학, 현대교회학, 현대상담학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없이는 교회가 부흥할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선교하겠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의 대상자가 놋과 같고 철과 같을지라도 주님이 부술 줄 믿습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만이 그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16에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보호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령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말씀이 온전히 증거되는 곳에 부흥이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에 순교자가 많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의 종이 많이 나와서 구령의 역사를 크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의 무대에 서기를 좋아하는 이 세태에 예레미야가 수치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하며 겸손히 기도했듯이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2: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매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밀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교회를 움직이시고 심령을 움직이셔서 중국과 북한의 복음사역과 다문화 복음사역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쳐 주실 줄 믿습니다.
2024년 6월 23일 주일낮예배 설교
내게 말씀을 주소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예레미야 1:9; 에베소서 6:19
(예레미야 1: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에베소서 6: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녹취록
1. 전도자이기 위한 기도
누가 제게 기도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저는 에베소서 6:19의 말씀으로 기도제목을 말씀드릴 것 같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기도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부탁한 기도입니다. 제가 예전에 전라도 정읍에 가서 어느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사람만 있으면 일하신다”라고 했습니다. 땅이나 돈이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소명 받은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는 아무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도 전도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남미와 미국 여행을 하면서, 익어 추구할 곡식이 널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익어 희어 추수할 곡식이 많다는 것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의 법칙입니다. 우면동에서도 그렇고, 아프리카에서도, 남미에서도, 미국에서도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오랜만에 작년에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서 보았습니다. 국내 여행은 가봤습니다만, 해외 여행은 그렇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우물을 파는 것과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계란을 파는 소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간절한 눈빛이 기억납니다.
이사야는 부정한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짐받아서 사용받았습니다. 정결한 입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르는 불이 있고 죽이는 독이 있는 것이 사람의 입입니다. 누가 깨끗해서 입을 열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입을 사용하고자 하시면 그 입을 정결하게 하셔서 사용하십니다. 오늘 예레미야 1:9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도 능변가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명이 있으니,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은혜입니다. 누구에게든 가라는 것은 소명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가닿아야 합니다. 주님은 가서 전하셨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모여들기보다 찾아가셨습니다.
저의 기도제목은 항상 말씀을 달라는 것입니다. 저에게서 나오는 말씀은 없습니다. 저는 아이와 같습니다. ‘주여 말씀을 주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하십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던 자를 주님이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분명하게 말하게 되었다고 복음서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귀를 열어 주시니 혀가 풀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웅변가가 아닙니다. 그들은 말씀을 고백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는 것이 빛을 반사하는 것입니다. 증인 된 삶과 누리는 삶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 빛이 내 것이 되면 내가 그 빛을 발산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세상
세상은 심히 악한 부분이 있습니다. 때가 지날수록 더욱 악합니다. 분명 좋아지는 부분도 있지만, 뭔가 모르게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뉴스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범죄가 험악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것 같습니다. 밤 11시에도 다닐 수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안전하다는 곳에 있었는데, 해가 지니 위험해 보였습니다. 세상이 악해졌습니다. 복음이 전해졌는데, 왜 그럴까요? 예레미야서는 보면, 귀한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2:11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무익한 것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사야 5:1-7을 보면,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를 맺음이 어찜이냐고 하십니다. 작년에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가 보니 기독교 비율이 90%이고, 아르헨티나는 우리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는 아름답고 지적인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가서 보니, 일찍이 복음이 떨어진 이 도시에 왜 이리 마약을 한 사람들이 많고 대낮에도 그런 사람들이 길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를 보면, 이것에 대하여 두 가지를 진단합니다. 첫 번째는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다른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웅덩이를 버리고 내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판 웅덩이를 쓰지 못한 웅덩이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해서, 비행기가 내릴 때 십자가가 많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물가가 올라서 아르헨티나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마약, 제3차 세계 대전의 소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왜 멸망했습니까? 땅이 나빠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롯은 자기 소견대로 그 땅을 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비 정신을 가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롯은 그 땅을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여겼습니다. 인간이 자기 소견대로 선택한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간혹 뒷전에 밀리는 것 같아도, 늦게 된 자가 먼저 되고,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영원하고 오래갑니다. 왜 세상이 고통이고, 신음소리가 들립니까? 예레미야 2:19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호세아 선지자도 4:6에서 말하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버리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해를 버리면 얼어 죽습니다. 하물며 여호와를 버리면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가까이 하며 모시는 것, 그를 경외하며 예배하는 것이 선이요 복입니다. 가장 기쁜 것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쁜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사시대는 황폐하지 않았음에도 암흑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 소견대로 사는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중세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음에도 암흑기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올바른 지식에 서 있지 않고, 예수만 유일한 구주로 믿지 않고, 사제와 교황과 교회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3. 먼저 내가 말씀을 먹자
에스겔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로 암흑기입니다. 여호와는 그에게 두루마리를 먹여 창자에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에스겔이 그것을 먹었더니 그 맛이 꿀과 같다고 했습니다(겔 3:1-3). 저의 기도제목이 있다면, 저도 말씀(두루마리)을 먹고 배에 넣고 창자에 채우길 원합니다. 목구멍에 걸치거나 입에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깊이 채워져 그 달기가 꿀과 같기를 원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가지신 분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그 두루마리의 비밀을 푸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말씀이 풀립니다. 요한계시록 10:10을 보면, 그 두루마리를 먹으니 입에는 꿀과 같이 다나, 배에는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는 두루마리를 창자에까지 넣으니 꿀과 같이 달라고 하였는데, 왜 요한계시록에서는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다고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이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말씀을 내 속에만 넣어두지 말고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왜 종말론적 삶을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직 구원받을 백성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찔레가 있든 형극이 있든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9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강한 말씀입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표현입니다. 밥의 냄새를 맡아서는 안 되고 밥을 먹어야 삽니다. 먹고 소화까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밥이 양분이 되어 힘을 얻습니다. 양분이 없으면, 웃지도 못합니다. 드셔야 웃습니다.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말씀을 다르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듣기에 힘쓰고 말씀에 아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장하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고 교훈하고 책망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4. 말씀을 전하도록 이끄심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먹으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20:9을 보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찌 우리가 나이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복음을 못 전한다고 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감옥에 있었음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을 알려면 앞의 8절을 보면 됩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우리 주의 기도는 이처럼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자랑거리 삼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예레미야가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여행을 하면, “진리의 부흥을 주옵소서, 처처에 말씀의 일꾼을 세우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크게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여호와가 열심히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내어 주시는 열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다 됩니다. 기도하면 다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이 나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사자가 되어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기도합시다. 목사만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익어 희어 추수할 곡식이 내 옆에, 내 가족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면 안아 주시고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5.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이 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요? 에스겔 2:6을 보면,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제가 좀 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약하는 사람들을 피해만 다녔을까? 내가 그 벤치에 앉아서 기도라고 했어야 하지 않는가? 과연 내가 목사인가? 그들을 피하여 숙소로 돌아오는 내 모습이 아쉬웠습니다. 많은 선교정책, 전도학이 있습니다. 현대전도학, 현대교회학, 현대상담학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리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없이는 교회가 부흥할 수 없습니다.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선교하겠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전도의 대상자가 놋과 같고 철과 같을지라도 주님이 부술 줄 믿습니다.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님만이 그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0:16에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보호하시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령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기도 제목은, 말씀이 온전히 증거되는 곳에 부흥이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에 순교자가 많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의 종이 많이 나와서 구령의 역사를 크게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의 무대에 서기를 좋아하는 이 세태에 예레미야가 수치거리가 되게 해달라고 하며 겸손히 기도했듯이 말입니다. 디모데후서 2: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매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담대히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밀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우리 교회를 움직이시고 심령을 움직이셔서 중국과 북한의 복음사역과 다문화 복음사역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쳐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