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죽지 않는 삶 | 요 11:25-27 | 문병호 목사 | 부활 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404

조회수 235


영원히 죽지 않는 삶 | 요 11:25-27 | 문병호 목사 | 부활 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10404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녹취록>



1. 봄과 부활


해마다 이때 쯤이면 많은 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맞는 새 힘과 소망을 갖게 되는 계절이고, 주위의 세상 만물이 무엇하나 부정적인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파릇파릇하게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지천에 번지는 형형색색, 각양각색 꽃들의 향연을 보면 잔치도 이런 잔치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꽃뿐이 아닙니다. 쑥이면 쑥, 풀과 각종 식물들이 모두 그렇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올해는 벚꽃도 진달래도 더 만발해서 피는 것 같습니다. 봄비가 와서 꽃잎이 떨어져서 바닥에 알록달록 새겨지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많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아름답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명이 있음이 얼마나 귀한지요. 그냥 물이 흘러가는 곳에 다리도 놓고 하지만 그런 것만 있다면 얼마나 삭막하나요. 움직임이 있고 생명의 역사들이 있으니 얼마나 우리가 즐겁습니까. 우리가 혹 죽어서 그냥 죽은 채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덧없겠습니까. 도무지 우리의 삶을 우리가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 존재의 영원함과 영속성이 있으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괜히 어렵고 슬프고 나를 내리치는 것 같은 어려움과 고뇌가 있어도 그것들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속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생명이요, 다시 살아나는 그 도를 우리가 믿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땅의 삶 가운데 전혀 부족함이 없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2. 부활의 표적


유대인들이 많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일하게 믿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이삭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표적을 구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상 많은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표적은 기적 중에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주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오신 것을 드러내는 표적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죽음 가운데 사흘 계시고 부활하신 그 표적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표적 중에 첫 번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죽은 것과 같은 상태요, 두 번째로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은 상태로 이루어집니다. 그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죽어도 마땅한 그 잔인한 족속에게 전하니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또 다른 것으로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것에서 그 성전은 예수님의 육체를 두고 한 말입니다(요 2:18-20). 제자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성전보다 안식일보다 큰 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3.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태초에 말씀이 있는데 그것이 빛이요 그것을 영접하면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에는 표적들이 많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기적, 38년 된 베데스다 못의 병자가 치료받는 표적,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신 기적, 실로암에서 날 때부터 맹인인 자가 다시 보게되는 표적 등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핵심, 다른 표적들이 지시하는 바가 되는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입니다.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없지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부활은 아닙니다만 다시 날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이고, 다시 살아난다는것입니다. 24절은 마르다가 부활 때 다시 살아나지 않겠냐고 물으나 누가 부활이고 누가 생명인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성경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마르다의 말에 예수님이 이와 같이 답하십니다. 이 말씀에 믿는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믿는다'는 말을 한 말씀에 세 번이나 하십니다. 마르다가 이에 대해 답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부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특히 26절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어로 분사가 두 개 들어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과 '믿는'으로, '살아 있는 자로서 믿는 자는'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자로서 믿는 자입니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믿는 자로서 살아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달리 생각하면 '믿어서 살아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믿어야 우리가 살아 있습니까?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고 하면 내가 살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고 믿는 자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는 자가 살아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믿나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는 자는 살아 있는 자고 영원히 안 죽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4.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죽음과 부활하심을 최소한 세 번 예고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이 가장 귀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베드로는 같은 고백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두 사람으로 여기는데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후술하는 것은 전술의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지금 살아 계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로마서의 말씀, 육체로는 사람의 아들,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그래서 본문 말씀은 요나의 표적, 죽고 부활하시는 표적,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적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는 이것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름'은 존재 자신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름이 뭔가 물을 때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 부활의 고백


부활의 고백은 믿어서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의 은혜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실상 그대로 두면 유대인 군중, 로마 병정과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가야바, 안나스, 헤롯과 다름없는 자들입니다. 예수께 돌을 던지고 갈대로 치고 침을 뱉는 그런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특별히 그러하다기보다 인류는 그 죄로 인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반길 수 없습니다. 흑암의 권세를 잡은 죄의 종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인 것을 하나님이 살리셨도다,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로다'라고 하는 이 말씀과 고백이 초대교회 설교의 핵심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죽인 예수가, 내가 죽인 예수가 나의 생명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못나서도 나빠서도 쩨쩨해서도 내버리고 옆에 두기 싫을 텐데,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우리를 예수님이 안으십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버린 돌이 우리를 성전 삼아 세우시는 모퉁이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 4:11). 이 돌이 보배로운 산 돌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벧전 2:4). 이것이 다 부활의 신앙입니다. 그 돌이 다니엘서 2장에서는 손대지 않은 돌, 뜨인 돌입니다. 신상의 환상에서 금, 은, 놋, 철로 비유되는 세상의 권세를 깨부수는 가공되지 않은, 인간의 손대지 않은 돌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의 권세, 흑암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것이 부활의 권세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는데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시지 않으면 우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체로 영원히 삽니다.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고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6. 부활의 증인


오늘 새벽 예배에서 전한 것으로 예수의 부활 첫 모습을 본 자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 일찍 무덤에 가니 돌이 굴려져 없었습니다. 그러자 급히 제자들에게로 내려가서 예수님이 어디 가고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 요한이 가서 빈 무덤을 봅니다. 이 빈 무덤을 보고 그들이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 집에 갑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습니다. 무덤 속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지점이라고 생각됐습니다. 제자들도 똑같이 봤으나 그들은 얼음 같아서 안 계신데 어떻게 하겠냐, 시체를 찾던지 아니면 부활하셨다고 전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이 집에 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이것과 같습니다. 같은 것을 보지만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여자는 더욱 힘이 없으니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 그것이 부활의 신앙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신앙은 평온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적어 놓을 것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어떻게 보면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제 성경에 제가 언제 적었는지 몰라도 그 막달라 마리아 기사에 라틴어로 'apostola apostolorum'(남자 사도들 가운데서 있는 여자 사도)라는 메모를 해 놓은 것을 봤습니다. 물론 여자 사도는 없습니다. 부활은 내가 사는 것이고 내가 증인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본문에서 사실상 죽음 앞에 맞딱뜨려서 계속 믿음만 나오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살아 있는 자고 살아 있는 자는 죽지 않고 죽어도 다시 살고, 이 말은 단순합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믿느냐고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말의 대조, 생명과 삶, 죽음의 대조가 나옵니다.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자 그 말씀에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3대 고백이라고 하면 베드로의 고백, 마르다의 고백, 도마의 고백이 있습니다. 도마는 내가 만져봐야 알겠다고 하여 만진 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7. 결론


우리는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생명나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몸이 우리의 지성소요 그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의 살과 피에 동참하여 영생을 누림을 고백합니다. 이 부활의 첫 증인으로 굳이, 열두 사도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가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있고 어둠에 속한 죽음에 속한 것 다 짓누르고 이기신, 제 육시부터 구시까지 모든 흑암을 끌어모아 깨부순 십자가의 죽음, 그 죽음이 아버지께 받아들여져서 생명의 부활의 역사를 이루는 그 일이 성도와 가정과 사회와 국가, 전세계에 퍼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