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세마네 기도 | 막 14:32-42 | 문병호 목사 | 고난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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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기도 | 막 14:32-42 | 문병호 목사 | 고난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10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녹취록>



1. 고난주간


우리가 1년 중 이 한주간에 가장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호산나 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옷으로 주를 맞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바라바를 놓아주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죄 없으신 예수를 정죄합니다. 이렇게 고난을 당하시다 십자가에 못박혀 부활하시는 일이 이 한주에 일어납니다. 한 입에서 호산나의 찬송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구약의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사순절은 성경적 근거가 있는 절기가 아닙니다. 특히 사순절에 관상기도니 묵상이니 하여 인간의 공로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더욱 가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일년 내내 주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주에는 주님의 고난에 대해, 그리고 다음 주는 부활에 대한 말씀으로, 그리고 그 다음주에는 계속 보던 요한계시록 말씀을 볼 예정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그곳에 가셨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14장에 한 장 전체가 기도문으로 차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겟세마네 기도는 서로 내용은 다르지 않으나 표현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시되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각 상황에 맞추어 기록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가는 이방인들, 누가는 선교를 위한 목적으로 기술된 특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성찬 제정과 배반할 제자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이제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밤은 주님이 주무시지 못하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던 날입니다. 이 만찬은 유월절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음식을 드셨는데 주님이 그곳에서 성찬을 마지막 만찬과 함께 거행하십니다. 이것을 제1차 성찬, 성찬 제정이라고도 합니다. 이후로 주님이 이 성찬을 계속 거행하실 것을 명하십니다. 이것을 특정 주간에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우리는 통상 부활절에 하게 됩니다. 이 만찬에서 주님은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자신의 몸으로, 잔으로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죽으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단순한 피가 아니라 새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을 봐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을 이루시는, 성취의 언약, 마지막 종결하는 완성의 언약의 피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이 그 밤에 잡히시고 죽으실 것을 정확히 예언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 죽음의 의미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 것으로 삼으실 것임을 명확히 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구원하실 마지막 제사를 드리실 것임을 정확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성찬을 거행하시면서 주님은 세 가지 예언을 하십니다. 첫째는 가룟 유다의 배반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이미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주님을 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던 가룟 유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 모습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흩어질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목자를 치리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는 예언입니다. 목자를 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난 후에 먼저 갈릴리에 가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을 제정하는 일 바로 앞에 나온 말씀입니다. 갈릴리는 주님이 제자들을 첫 번째 만난 곳이요 생업의 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예언을 하시자 베드로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자신은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데리고 가신 제자들은 기도를 잘하거나 의리가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주님을 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주님을 부인할 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배반치 않는 사람, 부인치 않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믿을 수 없을 만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의 기도


실제로 가보면 겟세마네에는 기드온 시내가 흐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이 바로 보입니다.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은 오늘 날에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셔서 감람산에 거하시면서 성전을 다니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마가복음으로 삼았지만 사복음서의 내용을 모두 종합하여 말씀하겠습니다.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다니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평소에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제자 파송하실 때,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실 때, 이 모든 중요한 일의 순간에 홀로, 밤에,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밤에 기도했다는 것은 감사일 수 있습니다. 미리 맡긴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밤이 주는 시간적 의미라기보다 감사와 미리 내일 일을 주님께 맡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자를 낫게 할 때도 보면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는 것을 보시면서 믿음 없음을 탓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신을 축사하실 때 기도 외에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말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 역시 육체도 쓰이지만 영혼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섬기는 영입니다. 예배하지 않습니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오직 천사와 사람인데, 그 중에서 자녀 삼으시는 존재는 오직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지으셔서 기도하는 존재 삼으신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본문 36절에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 말씀은 복음서 중 이곳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총 세 군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마가복음 말씀은, 기도는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 나를 하나님 앞에 데려가서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대야라도 듣는 대야가 있고 말하는 대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됨은 베품을 얻고 누리고 그 가운데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 부족함으로 기도하여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1) 우리는 필연히 연약하므로,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성자가 성부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영혼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많은 주석 학자들이 히브리서 5장 7절의 말씀을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하고 바울이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좋을 때는 좋지만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주님을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할 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기도가 완전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 있는 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들이 믿음 달라고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가실 때 셋만 데리고 가신 것처럼 겟세마네 기도에도 세 명만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으란 말은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혹은 죄가 있어서 들어오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이 연약하므로 죄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습니다. 죄가 없는데 시험 상태에 놓입니다. 죄가 없어도 시험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귀 사탄이 더 덤비고 유혹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혹을 받을 때 내 죄 때문으로 자책하기보다 연약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연약하므로 먹어야 합니다. 배고플 때 시험이 들어옵니다. 연약함과 죄성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은 죄가 있으니 회개하라는 것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연약하니 항상 깨어있으라, 즉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딱 붙어 있는 것, 우리가 연약하니 하나님께 꼭 붙어 있는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2) 우리를 위하여 영혼의 고통을 당하심


본문 33절과 34절은 예수님이 심히 고민하고 놀라셨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놀람은 고통으로 인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미리 바라보신 것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주님이 보신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분명히 있습니다. 죽음은 영혼의 고통입니다. 사고나 다치는 것 등은 육체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그것 말고도 죽음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이 있습니다. 죽음 자체의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아담의 원죄가 없었다면 그 죽음이 안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인류가 이 죽음을 겪어야 합니다. 그것은 깜짝 놀라고 슬퍼할만한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이 인간의 상태를 보셨기에 슬퍼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죽음과 슬픔과 고통과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자리에서 이것을 겪은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겟세마네의 영혼의 고통 겪으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영혼의 고통을 우리 주님이 겪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것이 바로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3) 우리를 위한 주님의 기도


제자들이 한시도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으로 주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체휼하셨습니다. 세 번이나 일어난 이 일에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한 것으로 체휼하시고 또 다른 곳에는 그들의 슬픔이 큰 것을 보시고 체휼하십니다. 스승은 이제 곧 죽는다, 떠나간다 하지, 3년간 쫓아다닌 주님에 대한 이 슬픔에 겨워 자고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한 것을 보신 것입니다. 배반하지 않는다고 확언하고 각자 자신의 자리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 제자들 가운데 있는 본질적 약함을 주님이 보신 것입니다. 기도도 약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날 위해 기도하셨으므로 기도의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5. 우리의 겟세마네


제가 요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를 계속 읽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제자들은 더 약해지고 무지해지고 나태해지고 불신앙이 커집니다. 십자가라는 대 고난 앞에서 더 예수님과 멀어집니다. 더 무지해집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큰 일을 하실 때는 전적 은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도운 제자는 없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고 하고 누가복음은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얼굴을 땅에 댔다고 합니다.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힘쓰고 애써 더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아빠 아버지라 할 때 아빠는 호칭이요 아버지는 고백입니다. 이 말에 호칭과 고백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아버지께서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신 기도는 처음부터 모두 아버지께 맡긴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그러는 것처럼 주님의 믿음이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즉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는 고백이요, 중언부언이 아닌 동일한 말씀입니다. 맡기는 것은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중언부언은 내 말을 할 때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라는 것은 밤새 천번을 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주님께 계속 맡기는 것입니다. '주여, 주의 뜻대로 이루소서'라고 만 번을 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이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1-12). 이것이 영혼의 고난 당하심입니다. 

또한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2, 4). 저는 이 뜰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생각해 봅니다. 주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므로 우리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집,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때 지금 우리에게 겟세마네는 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겟세마네입니다. 주의 뜻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자녀입니다. 천사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도울 뿐입니다. 무슨 일이 있든 우리가 주의 뜰에 거하여 기도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