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주님이 베푸시는 평강 | 요 20:19-23 | 문병호 목사 | 부활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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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이 베푸시는 평강 | 요 20:19-23 | 문병호 목사 | 부활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417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녹취록>



1. 부활과 신앙고백


주님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특별히 제자들에게 세 번 나타나셨음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주님이 부활 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한 나 바울에게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 자신의 사도권을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에서 만나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증인에 의거하여 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이 본문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여 저녁에 문을 닫고 있는데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도마가 있을 때입니다. 11명이 있었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가이사랴 호수, 디베라 바다라고도 하는 이 호수에서입니다. 워낙 호수가 크니 바다라고도 부릅니다. 이때는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도마,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제자가 더 있었는데 이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도마는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손을 넣어 보라고 하시자 신앙고백을 합니다. 또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중요할 때 예수님과 항상 같이 다닌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있습니다. 이 나다나엘은 바돌로메라고도 하는 제자입니다. 이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신앙고백을 역시 잘 한 자입니다. 이렇게 보면서 잠시 신앙고백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2. 부활의 기쁨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고 제자들이 흩어지고 겟세마네부터 기도하지 않은 그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책망할 법도 한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처음 인사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손은 못박힌 손이요, 옆구리는 창에 뚫린 그 옆구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보며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생업을 버리고 주님을 3년간 따라다닌 그들에게 상실감이 매우 클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명예로운 죽음이었다면 그나마 자부심이라도 있었을 텐데 가장 흉악한 범죄자가 죽는 저주의 형벌을 당하니 그 예수를 쫓는 사람들은 전부 다 저주의 무리가 된 것입니다. 반역자 무리, 반도가 된 것이니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문에 그들이 두려워하여 문을 꼭 닫은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 기뻐한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음은 어쨌거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에는 이 기쁨이 지속적으로 흐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원어로 '카라'라고 하는데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마음이 너무 기쁜 것입니다. 



2. 평강


1) 축복


그때 주님이 한 번 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이 말은 구약으로 하면 '샬롬'입니다. 신약은 '에레네'라고 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영어로 'peace to you'입니다. 한번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면 인사라고 보겠으나 두 번을 말씀하신 것은 축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내년에 우리 교단의 총회가 250만 성도와 함께 샬롬과 부흥을 가지고 기도하겠다고 총회장 되실 분이 저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저에게 이 부분에 대해 교리적인 토대에 대해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시기도 했습니다. 성경의 가장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아멘이 두 번 나오면 축복이고 영광입니다. 그런데 세 번 나오면 하나 됨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샬롬을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갈수록 제자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서 더 멀어집니다. 좌편 우편을 따지고 자신의 자리와 명예를 생각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시간이 가까울수록 제자들에게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것을 낱낱이 뒤져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민수기 6장 14절부터 29절이 바로 구약의 축복 구절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 주시고 ...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축복기도입니다. 브니엘이 생각납니다. 얍복 강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이 그를 이긴 자라 해주시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함이 뛰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은 모가 없습니다. 깎입니다. 그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평강입니다. 신약시대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함께 있을지어다'로 완성됩니다. 


2) 제자리에 있음


'샬롬'은 평강이나 평안인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악과 범죄가 바로 그것에서 어긋난 것입니다. 자기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유혹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받아 누리게 하셨는데 그것을 감사하지 않고 배도하니 교만과 판단이 들어옵니다. 감사가 떠나면 판단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두고 뱀이 유혹한 것입니다. 감사를 버리고 교만하여 판단하게 한 것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았으면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샬롬은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죄를 지어 제자리를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요한일서 1장 3, 6, 7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3, 6, 7). 다시 여호와와 가까워져야 하는데 이 일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어둠은 빛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소멸됩니다. 이 사귐을 우리가 결코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사귐을 다시 회복하려면 우리와 같이 되시되 죄가 없이 오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그 임마누엘이 한 아기, 한 아이를 우리에게 주시니 기묘요 묘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평강의 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평강의 왕이 바로 샬롬의 왕입니다. 오늘 인사하러 오신 '에이레네', '샬롬'이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러니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락방에서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나셨을 때 천사들이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강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가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로 제자리 찾기


제자리에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과일이 여기저기 돌아다녀 땀을 흘려 맺지 않습니다. 나무는 그 자리에 있어서 비와 햇빛을 받으면 다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제자리에 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뭔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불평이 있습니다. 감사만으로도 부족한데 말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저 누리면 되는데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한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합니다. 예수가 평강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지배하고 다스리시는데 평강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최고 자주 나오는 인사말이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있어야 평강이 따릅니다. 구원 없이 세상이 주는 평강은 전부 거짓 평강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들이 책망한, 거짓 선지자들이 외친 바로 그 거짓 평강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시는 참 평안, 진정한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그런데 먼저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 거듭남 없이 아무 평강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4) 잠잠함


그래서 우리의 평강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는 것입니다. 은혜 앞에 잠잠한 것이 평안입니다. 그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없이 조용한 것은 거짓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하루가 고요한 가운데 정립되는 것, 그것이 평화입니다. 여리고를 돌 때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보다가 '됐다' 하고 외치게 합니다. 그것은 공로가 아닙니다. 찬양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한 찬양인 것입니다. 잠잠함의 가장 큰 본을 보이신 분은 바로 우리 주님입니다. 도수장에 글려가는 양처럼 온순하게 순종하신 예수님의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떠들게 되어 있습니다. 바알신, 아세라신을 섬기는 수백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없으니 매일 춤추고 장구 치고 몸을 벤 것입니다. 시끄럽게 떠듭니다. 무당도 그렇습니다. 갖가지 색으로 시끄럽게 굿을 하고 난리를 칩니다. 여호와가 계시니 우리는 잠잠한 것입니다. 



3. 임마누엘 예수: 은혜와 평강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름이 두 개였습니다. 예수와 임마누엘입니다. 각각 은혜와 평안입니다. 예수가 계셔야 임마누엘이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예수가 있어야 그가 주시는 평강이 있습니다. 거듭남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송축과 아멘이 있어야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 모세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함께, 임마누엘이 있었던 것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오늘 부활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는 그에 뒤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것을 '후속 열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요, 그것으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 20:21-22). 그런데 그 임마누엘의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본문과 그대로 통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것이 부활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묘합니다. 모든 말씀이 귀하게 다 이루어집니다. 또한 본문 23절은 고린도후서 5장 18절 말씀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신 것인데, 화목이 바로 평강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예수님이 화목케 하시는 주인데 우리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마을의 각 집에 가서 평화를 선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인 것입니다.



4. 결론


샬롬의 주께서 우리를 샬롬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맡긴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화목입니다. 전쟁을 하다가도 부활절에는 병기를 놓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화목의 은혜가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모든 분쟁에 임하기를 바랍니다. 도무지 전쟁이 일어나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안나고 그저 받아들입니다. 잘못됐다, 잘됐다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하는데 무감각하게 받아들입니다. 무기를 놓아야 하는데 자꾸 만드는 것이 이 세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십니다. 이 평강이 26절에도 나옵니다.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요 20:26). 부활하신 주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서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이 '샬롬', 진정한 평강, '에이레네'가 우리 안에 있고 그것으로 감사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