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 막 10:13-16 | 문병호 목사 | 어린이 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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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 막 10:13-16 | 문병호 목사 | 어린이 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01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녹취록>
1. 서론
오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짧게 기록된 다른 내용들과 달리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러 올라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인 본문 장을 보면 먼저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과 그리고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적인 잣대와 기준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 부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도에 대해 긴요하게 말씀하신 귀한 내용인 것입니다. 어릴 때 제가 자라던 곳에 뽕잎을 많이 키웠는데 애벌레가 자라는 정도에 따라 잎의 뻣뻣함도 더해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참 크다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고 한탄만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오늘 있는 것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봄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2. 어린아이를 그리스도께 데려오라
1) 어린아이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라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아니나 본문에 보면 '만져주기를 바라고'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 바로 주님이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 어른들을 아이를 주님이 축복하고 안수하게끔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아이들이 주일에 교회도 못가게 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휴전을 하고 주일에는 교회를 가게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교육을 아이들에게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입니다.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일진대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왜 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오느냐, 아이들을 집에 두고 어른들이 와야지 여기가 아이들이 올 자리냐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노하셨습니다. 성경에 주님이 노하시는 장면은 흔치 않습니다. 애통해하시고 체휼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말씀은 자주 나오나 노하신 것은 드뭅니다. 어떻게 보면 고대의 당시 풍습은 아이들을 천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노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그 본질이 아이를 닮아 있는 것임을,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베푸신 천국에 대한 누룩, 겨자씨 비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거짓이 없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연약하므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엄연한 인격체이고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도구나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위한 것인지, 아이를 위한 것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나로써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애틋함과는 별개로, 아이의 입장에서는 또 다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다 옳죠, 무슨 나쁜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제자들이 어찌 아이들을 방치하고 방기했겠습니까. 어린이는 그 자체로 인격체지 작은 어른이 아닙니다. 어른이 돼야 사람이고 아이일 때는 인격체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2) 사랑받아야 할 어린아이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이로 나셨습니다. 구유에서 갓 나셔서 강보에 싸여 계실 때 동방의 박사들이 찬미하고 하늘의 천사들이 찬미합니다. 그리고 40일 정결례를 행하실 때 시므온의 노래, 안나의 노래가 있습니다. 전부 어릴 때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의 사회상은 나이가 들어야 인간 구실을 한다는 것인데 우리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점과 같이 잉태되었을 때 세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이 잉태된 예수를 찬미한 것 등을 통해 태아일지라도 인격과 생명권을 존중하고 귀히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른이 어린이를 보는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다음 주 어버이 주일은 자녀들이 어른을 보는 입장에서 항상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받으실 만한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지혜와 키가 자라고 사랑스러워지더라 한 것은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함이시라고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양심이 부요해지는 것이요, 키가 자란다는 것은 육체가 자라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자라감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먼저 받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베푸는 자리, 사랑하는 자리에 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릴 때는 젖을 먹었으나 이제 장성하여 아이를 먹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어릴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한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랬듯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공부할 때 방문했던 현지의 개혁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해 만화 성경을 비치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만화라고 해서 대충 쓴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성경의 내용을 전하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개혁교회는 이렇습니다. 겉은 허술하고 창고 같은 건물에 있으나 아이들에게 말씀을 귀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신 것이 바로 이렇게 우리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순종되는 것입니다. 나중된 자, 포도원에 나중에 들어온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린아이에게 적용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다음세대의 신앙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가 아이들로 꽉 찼었습니다.
3)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의지하라
누구든지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가난한 자를 어린아이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어른으로 볼 수 있구요. 과부의 두렙돈 비유도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없지만 가진 전부를 가져가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보니 전체 성경이 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도 겸손하여 마지막 십자가의 험한 형틀에 달리실 때 멍에 매인 짐승, 나귀의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장성하고 강한 것이 아닌 연약하고 의지할 것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통해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한 어린잎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큰 양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 나중된 자, 종,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곧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그렇게 되라고 말씀하신 모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을 세워놓고 비교하지 말고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으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 데려다 놓으면 청결,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한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3. 본문의 문맥적 메시지
1)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호와 돌봄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병이 낫기를 원해 데려온 것은 있으나, 아이들을 만져주시기 위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안아주시고 맡기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저 바라보거나 말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본질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 우리 자신도 우리 아이들도 그저 맡기는 것입니다. 만져주기를 바란다는 말이 안수와 축복의 의미도 있겠으나 본문의 구성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즉, 부부에 대해 남편이 아내를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면서 악습으로 아내를 버리는 습속에 대해 먼저 책망하십니다. 가정에 대한 원칙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뒤이어 아이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아이는 한 가정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지 못한다면 사회가 그런 모습을 갖추도록 회복시키고 지원해주어야 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시작은 부부입니다.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한 가정의 아이가 되도록 회복시켜 주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히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어디 가서 의지할 데도 없다고 한다면 입양이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정이 없으면 어찌 클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가정으로 회복되고 이 사회도 그 일을 가장 크게 여겨야 합니다. 저도 운전을 하다 보면 초등학교 앞에 속도제한이 30킬로로 제한되다 보면 낯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그것은 시험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왜 경각심이 없냐, 왜 뛰쳐 나오냐고 해서 되겠냐 말입니다. 아이들은 물불 안가리고 뛰는 것이 속성인데 어른들이 아이들의 그러함을 맞춰 정책을 만드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날만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야말로 어린이를 위한 참된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리라는 말입니다.
2)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라
첫 번째로 아이가 가정에 속해야 한다면 두 번째는 한 가정의 아이이자 하나님께 속해야 할 것입니다. 필히 한 가정의 아이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항상 지금 이 순간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전에 왕십리 교회에 있을 때 여름에 더우니 어른들이 어른들 예배처의 에어컨을 먼저 신경쓰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 주일학교에 먼저 시설을 하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첫번째로 한 가정의 아이어야 되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가 어린이주일을 맞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주위를 살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교회를 다니던 아니던 우선 건져 보호하고,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오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들라
세 번째로, 본문 15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합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되지 말라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무엇일까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의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두고 가르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꾸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가 맞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씀이 맞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따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말씀을 굳이 그렇게 그대로 따라야 하냐고 하여 변형합니다. 그리고 임의로 편의를 따라 만든 그 규율을 신주처럼 모십니다. 말씀을 그대로 두고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 본문에 나옵니다. 17절의 부자 청년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하신 예수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신이 선하다, 그런데 나도 선하니 내가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보다 조금 더 선한 것 같으니 따라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청년의 결국은 그러므로 나를 쳐서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선한데 말씀대로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은 안되겠으니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4.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해 주심
본문 16절은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는 것은 일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려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른처럼 행세하려 하지 마시고 어린아이처럼 되려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에게 맡기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어른처럼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각 각정과 속한 곳에서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어른다움은 주님께 어린아이와 같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을 우선 잘 돌보아 속할 가정과 의지할 곳이 있게 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전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린 아이와 하나님의 나라 | 막 10:13-16 | 문병호 목사 | 어린이 주일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20501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녹취록>
1. 서론
오늘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은 짧게 기록된 다른 내용들과 달리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러 올라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인 본문 장을 보면 먼저 부부가 한 몸이라는 것과 그리고 천국이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적인 잣대와 기준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정, 부부,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도에 대해 긴요하게 말씀하신 귀한 내용인 것입니다. 어릴 때 제가 자라던 곳에 뽕잎을 많이 키웠는데 애벌레가 자라는 정도에 따라 잎의 뻣뻣함도 더해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참 크다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고 한탄만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오늘 있는 것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봄의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2. 어린아이를 그리스도께 데려오라
1) 어린아이를 인격체로서 존중하라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아니나 본문에 보면 '만져주기를 바라고'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아이들을 데리고 왔느냐, 바로 주님이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기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 어른들을 아이를 주님이 축복하고 안수하게끔 데려와야 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아이들이 주일에 교회도 못가게 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전쟁을 하더라도 휴전을 하고 주일에는 교회를 가게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교육을 아이들에게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입니다. 어른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일진대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왜 아이들을 주님께 데려오느냐, 아이들을 집에 두고 어른들이 와야지 여기가 아이들이 올 자리냐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노하셨습니다. 성경에 주님이 노하시는 장면은 흔치 않습니다. 애통해하시고 체휼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말씀은 자주 나오나 노하신 것은 드뭅니다. 어떻게 보면 고대의 당시 풍습은 아이들을 천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노하신 것은, 이 땅에 오신 그 본질이 아이를 닮아 있는 것임을,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베푸신 천국에 대한 누룩, 겨자씨 비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거짓이 없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연약하므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엄연한 인격체이고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도구나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위한 것인지, 아이를 위한 것인지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나로써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애틋함과는 별개로, 아이의 입장에서는 또 다를 수 있습니다. 어른들이 다 옳죠, 무슨 나쁜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제자들이 어찌 아이들을 방치하고 방기했겠습니까. 어린이는 그 자체로 인격체지 작은 어른이 아닙니다. 어른이 돼야 사람이고 아이일 때는 인격체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2) 사랑받아야 할 어린아이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의 아이로 나셨습니다. 구유에서 갓 나셔서 강보에 싸여 계실 때 동방의 박사들이 찬미하고 하늘의 천사들이 찬미합니다. 그리고 40일 정결례를 행하실 때 시므온의 노래, 안나의 노래가 있습니다. 전부 어릴 때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의 사회상은 나이가 들어야 인간 구실을 한다는 것인데 우리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점과 같이 잉태되었을 때 세례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이 잉태된 예수를 찬미한 것 등을 통해 태아일지라도 인격과 생명권을 존중하고 귀히 여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른이 어린이를 보는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다음 주 어버이 주일은 자녀들이 어른을 보는 입장에서 항상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사랑스럽고 받으실 만한 자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자라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지혜와 키가 자라고 사랑스러워지더라 한 것은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함이시라고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지혜가 자란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양심이 부요해지는 것이요, 키가 자란다는 것은 육체가 자라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자라감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먼저 받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베푸는 자리, 사랑하는 자리에 가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릴 때는 젖을 먹었으나 이제 장성하여 아이를 먹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어릴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에 대한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랬듯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예배 드리는 것이 가장 큰 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공부할 때 방문했던 현지의 개혁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해 만화 성경을 비치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이 만화라고 해서 대충 쓴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성경의 내용을 전하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개혁교회는 이렇습니다. 겉은 허술하고 창고 같은 건물에 있으나 아이들에게 말씀을 귀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신 것이 바로 이렇게 우리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순종되는 것입니다. 나중된 자, 포도원에 나중에 들어온 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린아이에게 적용해 보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가장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다음세대의 신앙일 것입니다. 예전에는 주일학교가 아이들로 꽉 찼었습니다.
3)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고 의지하라
누구든지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가난한 자를 어린아이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자는 어른으로 볼 수 있구요. 과부의 두렙돈 비유도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없지만 가진 전부를 가져가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게 보니 전체 성경이 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도 겸손하여 마지막 십자가의 험한 형틀에 달리실 때 멍에 매인 짐승, 나귀의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장성하고 강한 것이 아닌 연약하고 의지할 것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을 통해 이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한 어린잎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과 같다고 했습니다. 큰 양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 나중된 자, 종,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곧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그렇게 되라고 말씀하신 모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을 세워놓고 비교하지 말고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으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 데려다 놓으면 청결, 심령이 가난한 것, 애통한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3. 본문의 문맥적 메시지
1) 어린아이는 부모의 보호와 돌봄과 양육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아이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이 거의 없습니다. 물론 병이 낫기를 원해 데려온 것은 있으나, 아이들을 만져주시기 위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안아주시고 맡기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저 바라보거나 말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본질이 여기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 우리 자신도 우리 아이들도 그저 맡기는 것입니다. 만져주기를 바란다는 말이 안수와 축복의 의미도 있겠으나 본문의 구성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겠습니다. 즉, 부부에 대해 남편이 아내를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면서 악습으로 아내를 버리는 습속에 대해 먼저 책망하십니다. 가정에 대한 원칙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뒤이어 아이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즉, 아이는 한 가정에서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지 못한다면 사회가 그런 모습을 갖추도록 회복시키고 지원해주어야 함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의 시작은 부부입니다. 아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한 가정의 아이가 되도록 회복시켜 주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히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어디 가서 의지할 데도 없다고 한다면 입양이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정이 없으면 어찌 클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가정으로 회복되고 이 사회도 그 일을 가장 크게 여겨야 합니다. 저도 운전을 하다 보면 초등학교 앞에 속도제한이 30킬로로 제한되다 보면 낯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그것은 시험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니 말입니다. 아이들에게 왜 경각심이 없냐, 왜 뛰쳐 나오냐고 해서 되겠냐 말입니다. 아이들은 물불 안가리고 뛰는 것이 속성인데 어른들이 아이들의 그러함을 맞춰 정책을 만드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날만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이야말로 어린이를 위한 참된 사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리라는 말입니다.
2)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인도하라
첫 번째로 아이가 가정에 속해야 한다면 두 번째는 한 가정의 아이이자 하나님께 속해야 할 것입니다. 필히 한 가정의 아이에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항상 지금 이 순간 주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전에 왕십리 교회에 있을 때 여름에 더우니 어른들이 어른들 예배처의 에어컨을 먼저 신경쓰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 주일학교에 먼저 시설을 하자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첫번째로 한 가정의 아이어야 되고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가 어린이주일을 맞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주위를 살펴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교회를 다니던 아니던 우선 건져 보호하고,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오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들라
세 번째로, 본문 15절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합니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되지 말라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못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무엇일까요? 어린아이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의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두고 가르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꾸 법을 바꾸려고 합니다. 내가 맞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말씀이 맞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따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말씀을 굳이 그렇게 그대로 따라야 하냐고 하여 변형합니다. 그리고 임의로 편의를 따라 만든 그 규율을 신주처럼 모십니다. 말씀을 그대로 두고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 본문에 나옵니다. 17절의 부자 청년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선하신 예수여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당신이 선하다, 그런데 나도 선하니 내가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보다 조금 더 선한 것 같으니 따라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청년의 결국은 그러므로 나를 쳐서 말씀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선한데 말씀대로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은 안되겠으니 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4.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해 주심
본문 16절은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는 것은 일 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를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려고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른처럼 행세하려 하지 마시고 어린아이처럼 되려 하십시오. 그래서 주님에게 맡기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어른처럼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각 각정과 속한 곳에서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된 어른다움은 주님께 어린아이와 같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을 우선 잘 돌보아 속할 가정과 의지할 곳이 있게 하고,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전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는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