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31 | 주일낮예배 | 부활주일 | 부활에 온전히 이름 | 빌립보서 3:8-12 | 문병호 목사
조회수 541
2024년 3월 31일 주일낮예배 설교 | 부활주일
부활에 온전히 이름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빌립보서 3:8-12
(빌립보서 3:8-12)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녹취록
1.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
저는 연중이 다 좋지만 춘분쯤에 이르러 낮이 길면 참 좋습니다. 추분이 지나면 싫어지는 것은 아니나 낮이 짧아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요새 새벽에 보면 밝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공부한 에딘버러는 날씨 자체가 (좋으면) 축제입니다. 부활의 찬송을 보면 봄에 관한 배경이 많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등에서 드물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데 본문에서도 부득이 말을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득불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버릴 것도 많다고 세상에서는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비해 사도 바울은 그렇습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자체를 보면 바울은 난 배경이나 학식이나 명망이나 살아온 내용을 보아도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최고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제자입니다. 또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이 있을 정도로 율법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위 청년 사울은 인간적으로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권위 있다’는 뜻이요,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전의 사울은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특별히 교회를 열심히 박해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큰 공로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이 지도자 역할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완벽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흩어진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다 잡아들이겠다고 증서를 소지하고 잡으러 간 것입니다. 독기가 가득 찼을 때 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날 때 그야말로 극적으로 만납니다. 핍박하는 자,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무리의 괴수로서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가지게 됨
그렇듯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어 보이던 그가 예수 앞에 서니 버릴 것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던 많은 것들이 예수 앞에 서니 다 쓸데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내가 더 세우려고 했던 것이 실상은 더 멀리하고 버려야 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극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없이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다 극적으로 예수 앞에 서서 가치관이 변하고 추구하던 열심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갈대아 우르, 즉 비옥한 땅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모세도 궁정에서 하나님이 내보내신 것입니다. 왕이 될 수도 있던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왕자가 목부가 되어 버립니다. 엘리사,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도 요한과 야고보도 그물과 가족과 형제를 버리고 떠나는 개념이 있습니다.
‘보라 새 것이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것이 우리 구원의 도입니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사는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이 빛과 생명과 대비되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앞에 섬으로,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그 앞에 서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이 가장 하찮은 것이 됩니다. 그것은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빛을 영접하는 것이요, 옛 옷을 버리는 것은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새 옷을 입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돌과 같은 마음이 살과 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제가 위가 조금 약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 하나하나가 철저히 반응을 합니다. 평소에는 모르는데 강한 음식을 먹으면 구별이 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내 주장을 하며 살다 보니 잘 모릅니다. 우리는 뭐가 독이 있고 가시를 품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서 살과 같은 마음이 되면 어제 먹던 것이 가시를 씹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이 해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도, 가말리엘 문하도 모두 해가 됩니다. 이것은 유익한 것을 새로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해가 떠야 달을 보냅니다. 밤에 달만 보내면 어두워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다 붙들면서 살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류의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는데 이런 아담의 옷을 입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의로 옷 입습니다. 주님의 의가 들어오면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없게 됩니다. 허무해집니다. 예수를 만나면 나머지는 다 거친 것이 됩니다. 예수가 가장 좋아집니다. 이 극단이 내 생명마저도 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어떤 소유를 버리고 문벌과 학식과 가문을 버리는 것을 넘어서서 내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담에 속했던 저주의 생명을 버리고 이제는 생명이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죽었던 내가 새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본문에 그리스도를 얻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만나기만 하면 모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착해지고 변화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적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의 것이 죽고 새 것이 삽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면 모두 다 일거에 없어집니다.
3.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여김
연초에 말했듯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으로 말미암아 소망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쁨거리, 내가 소망거리, 내가 감사거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줘서 기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쁨거리, 하나님이 인정하는 감사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나를 낳았으니 그러신 것입니다. 낳은 분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평생 기본적으로 율법을 공부한 학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가장 존경받는 자가 학자, 랍비입니다. 그런 학자로 최고봉에 오른 바울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내 전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 자체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가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봄을 좋아한다고 할 때 빛이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 이 부활의 날 최초의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고 보았다고 얘기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주를 만난 것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린 그녀가 예수님이 낫게 해 주시니 남자들은 다 도망가는 중에도 예수님을 따르고 결국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어제 모처럼 뒷산에 갔습니다. 책은 그렇지 않은데 운동은 몸에 어떤지 따져서 하게 됩니다. 어제 산에 가니 진달래와 산수유 꽃이 만개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단풍도 보니 파릇파릇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저 단풍나무의 나뭇잎처럼 나는 가장 자랑스러울 것이 무엇인가.’ 곧바로 예수 만난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내 자신이 변한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금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내 존재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 영생의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4. 그리스도를 얻어 그와 연합하여 살아감
십자가의 도만 전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도입니다. 설교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내가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사울이 죽이러 가는데 예수님이 사울에게 왜 핍박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실 때는 이미 그 가운데 은혜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울이 무엇인가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고꾸라지고 눈이 멀고 사흘만이 영안이 뜨이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에 핍박하러 간 사람이 예수를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거했을까요. “내가 예수 믿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웃으면서 바라본 그 예수를 자신이 만났다고 전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를 만나니 박해자가 찬양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지난주 오병이어 설교에서 단어 두 개를 봤습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할 때 축사는 감사의 의미도, 축복의 의미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감사와 축복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데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임을 바울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러, 승천하러,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몰아내야 합니다. 주님도 이전 것을 감당하시고 새것이 되셔야 하니 주님이 우리와 같이 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영 단번의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은 물리적인 소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요, 나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고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요, 부활의 권능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부활의 권능은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권능이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도만이 아니라 생활의 도이기도 합니다. 한번 죽고 살아나는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도 생활도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 새 창조의 권능입니다. 육체를 죽이고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데 영혼도 죽이고 살리는 주님이십니다.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권능이 우리 마음에도 일어납니다. 그 지식을 고상하다고 고백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 안에 권능이 일어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병이 낫는 것,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닌,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소유의 신앙이 아닌 존재의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와 연합하고 하나가 되려고 오신 것입니다. 소유는 어제 있다 오늘 없기도 합니다. 내 마음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항상”(행 1:8; 요 14:16; 마 28:20)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 권능이 우리가 참여합니다. 이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부활을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이 있거든 부활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부활이 항상 함께 합니다.
5. 부활의 권능을 누리며 부활을 향하여 살아감
12절에서 이미 우리는 붙잡힌 바 되었다고 합니다. 인 친 바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이미 잡혔는데 잡힌 것을 따라가는 것, 성도라고 불리는데 거룩하기에 힘쓰는 것,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의 부활, 첫째 부활을 모두 믿습니다. 영생의 부활로 우리는 나아갑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부활의 권능을 찬미하고, 내 일생일대에 가장 잘한 것이 예수 믿은 것, 부활의 권능을 얻은 것으로 고백하기 바랍니다. 어제 너무 기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공기도 좋다고 생각하십시오. 어제 산에서 조금 늦게 내려오는데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평화로운 곳에 우리가 예배드리고 부활의 권능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2024년 3월 31일 주일낮예배 설교 | 부활주일
부활에 온전히 이름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빌립보서 3:8-12
(빌립보서 3:8-12)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녹취록
1.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
저는 연중이 다 좋지만 춘분쯤에 이르러 낮이 길면 참 좋습니다. 추분이 지나면 싫어지는 것은 아니나 낮이 짧아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요새 새벽에 보면 밝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제가 공부한 에딘버러는 날씨 자체가 (좋으면) 축제입니다. 부활의 찬송을 보면 봄에 관한 배경이 많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후서 등에서 드물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데 본문에서도 부득이 말을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에 관한 복음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면 부득불 얘기를 하지만 결국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버릴 것도 많다고 세상에서는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 비해 사도 바울은 그렇습니다.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 자체를 보면 바울은 난 배경이나 학식이나 명망이나 살아온 내용을 보아도 율법에 의로는 흠이 없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입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최고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제자입니다. 또한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이 있을 정도로 율법을 행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위 청년 사울은 인간적으로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권위 있다’는 뜻이요,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는데 예전의 사울은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특별히 교회를 열심히 박해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큰 공로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이 지도자 역할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완벽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하는 자와 핍박받는 자의 관계로 만났습니다. 흩어진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거론하는 사람들은 다 잡아들이겠다고 증서를 소지하고 잡으러 간 것입니다. 독기가 가득 찼을 때 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날 때 그야말로 극적으로 만납니다. 핍박하는 자,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는 무리의 괴수로서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가지게 됨
그렇듯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어 보이던 그가 예수 앞에 서니 버릴 것밖에 없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던 많은 것들이 예수 앞에 서니 다 쓸데없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 내가 더 세우려고 했던 것이 실상은 더 멀리하고 버려야 할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러한 극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 없이 구원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다 극적으로 예수 앞에 서서 가치관이 변하고 추구하던 열심의 방향이 바뀌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갈대아 우르, 즉 비옥한 땅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납니다. 모세도 궁정에서 하나님이 내보내신 것입니다. 왕이 될 수도 있던 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왕자가 목부가 되어 버립니다. 엘리사,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도 요한과 야고보도 그물과 가족과 형제를 버리고 떠나는 개념이 있습니다.
‘보라 새 것이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것이 우리 구원의 도입니다. 옛것이 죽고 새것이 사는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이 빛과 생명과 대비되는 것이 우리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 앞에 섬으로,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그 앞에 서면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이 가장 하찮은 것이 됩니다. 그것은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어둠이 물러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빛을 영접하는 것이요, 옛 옷을 버리는 것은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새 옷을 입는 것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돌과 같은 마음이 살과 같이 부드러워집니다.
제가 위가 조금 약합니다. 어린아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 하나하나가 철저히 반응을 합니다. 평소에는 모르는데 강한 음식을 먹으면 구별이 됩니다. 주님 앞에 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내 주장을 하며 살다 보니 잘 모릅니다. 우리는 뭐가 독이 있고 가시를 품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서 살과 같은 마음이 되면 어제 먹던 것이 가시를 씹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 유익하던 것이 해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도, 가말리엘 문하도 모두 해가 됩니다. 이것은 유익한 것을 새로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해가 떠야 달을 보냅니다. 밤에 달만 보내면 어두워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다 붙들면서 살지 못합니다.
타락한 인류의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는데 이런 아담의 옷을 입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의로 옷 입습니다. 주님의 의가 들어오면 이전에 좋던 것이 이제는 값없게 됩니다. 허무해집니다. 예수를 만나면 나머지는 다 거친 것이 됩니다. 예수가 가장 좋아집니다. 이 극단이 내 생명마저도 내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은 어떤 소유를 버리고 문벌과 학식과 가문을 버리는 것을 넘어서서 내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아담에 속했던 저주의 생명을 버리고 이제는 생명이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죽었던 내가 새 생명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본문에 그리스도를 얻는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만나기만 하면 모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착해지고 변화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성경적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의 것이 죽고 새 것이 삽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면 모두 다 일거에 없어집니다.
3.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을 가장 귀하게 여김
연초에 말했듯 내 자신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으로 말미암아 소망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쁨거리, 내가 소망거리, 내가 감사거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줘서 기쁘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쁨거리, 하나님이 인정하는 감사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기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버려도 하나님이 나를 낳았으니 그러신 것입니다. 낳은 분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평생 기본적으로 율법을 공부한 학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가장 존경받는 자가 학자, 랍비입니다. 그런 학자로 최고봉에 오른 바울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내 전체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 존재 자체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은 내 자신이 그리스도가 좋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봄을 좋아한다고 할 때 빛이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주일, 이 부활의 날 최초의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내가 주를 만났다고 보았다고 얘기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다면 막달라 마리아는 주를 만난 것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조금 안으로 들어간 곳입니다. 일곱 귀신이 들린 그녀가 예수님이 낫게 해 주시니 남자들은 다 도망가는 중에도 예수님을 따르고 결국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어제 모처럼 뒷산에 갔습니다. 책은 그렇지 않은데 운동은 몸에 어떤지 따져서 하게 됩니다. 어제 산에 가니 진달래와 산수유 꽃이 만개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단풍도 보니 파릇파릇합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저 단풍나무의 나뭇잎처럼 나는 가장 자랑스러울 것이 무엇인가.’ 곧바로 예수 만난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를 만나고 내 자신이 변한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금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내 존재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 영생의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4. 그리스도를 얻어 그와 연합하여 살아감
십자가의 도만 전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도입니다. 설교 때마다 말씀드리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내가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사울이 죽이러 가는데 예수님이 사울에게 왜 핍박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실 때는 이미 그 가운데 은혜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울이 무엇인가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로 고꾸라지고 눈이 멀고 사흘만이 영안이 뜨이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에 핍박하러 간 사람이 예수를 증거합니다. 어떻게 증거했을까요. “내가 예수 믿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웃으면서 바라본 그 예수를 자신이 만났다고 전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를 만나니 박해자가 찬양하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지난주 오병이어 설교에서 단어 두 개를 봤습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할 때 축사는 감사의 의미도, 축복의 의미도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감사와 축복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데 그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임을 바울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러, 승천하러,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 안에 보내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몰아내야 합니다. 주님도 이전 것을 감당하시고 새것이 되셔야 하니 주님이 우리와 같이 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므로, 영 단번의 제사를 드리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에서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얻었다는 것은 물리적인 소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요, 나와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고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도요, 부활의 권능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부활의 권능은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떠나서는 아무 권능이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의 도만이 아니라 생활의 도이기도 합니다. 한번 죽고 살아나는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명도 생활도 부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 새 창조의 권능입니다. 육체를 죽이고 살리는 것도 불가능한데 영혼도 죽이고 살리는 주님이십니다. 예수가 죽고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의 권능이 우리 마음에도 일어납니다. 그 지식을 고상하다고 고백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 안에 권능이 일어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었습니다.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병이 낫는 것,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닌,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소유의 신앙이 아닌 존재의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와 연합하고 하나가 되려고 오신 것입니다. 소유는 어제 있다 오늘 없기도 합니다. 내 마음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땅 끝까지” “영원토록” “세상 끝날까지” “항상”(행 1:8; 요 14:16; 마 28:20)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함께 하심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 권능이 우리가 참여합니다. 이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부활을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이 있거든 부활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죽음과 부활이 항상 함께 합니다.
5. 부활의 권능을 누리며 부활을 향하여 살아감
12절에서 이미 우리는 붙잡힌 바 되었다고 합니다. 인 친 바 된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이미 잡혔는데 잡힌 것을 따라가는 것, 성도라고 불리는데 거룩하기에 힘쓰는 것,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니 붙잡힌 바 된 그것을 붙잡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인의 부활, 첫째 부활을 모두 믿습니다. 영생의 부활로 우리는 나아갑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이 부활의 권능을 찬미하고, 내 일생일대에 가장 잘한 것이 예수 믿은 것, 부활의 권능을 얻은 것으로 고백하기 바랍니다. 어제 너무 기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공기도 좋다고 생각하십시오. 어제 산에서 조금 늦게 내려오는데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평화로운 곳에 우리가 예배드리고 부활의 권능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