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쁨의 좋은 소식 | 눅 2:8-14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성탄주일 낮예배 |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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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 | 눅 2:8-14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성탄주일 낮예배 | 20221225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녹취록>
1.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신 하나님의 아들
어제 주보를 작성하는데 보니 52주차입니다. 해마다 52번 예배를 드리는데 올해는 마지막 예배를 성탄으로 올립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눈이 오면 더 좋아하는데 올해는 눈이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 꼭 이때 오신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학자들이 살피고 연구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결론 내린 날이 이 날입니다. 이 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본 것처럼 예수님의 성육신은 탄생이 아니라 잉태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시는 그 때부터 인생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저히 우리와 똑같이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 우리의 죄를 속하시려고 그리 잉태되고 그리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잉태는 나사렛에서, 탄생은 베들레헴입니다. 이 땅에 짐승의 구유에 태어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디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땅의 현인들이나 성자들은 우리에게 닮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낮으신 곳에 오신 구주는 자신을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닮는다는 것은 일순간 좋고 내 의가 있으나 곧 우리의 무능을 발견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삽니까. 저도 미국, 영국, 제네바도 다녀 봤으나 가장 부지런한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자면 유대민족 정도 될 것입니다. 또 우리 민족은 똑똑합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처럼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부지런함으로 우리가 스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갖추면 갖출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열기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거우면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는 빌립보서 말씀,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추시고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낮아지고 비워져야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채웠는데 무거워지니, 소유는 많은데 존재는 가라앉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우리의 대속을 위한 성육신
중세시대 안셈이라는 신학자가 유명한 신학책,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제목의 성육신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속죄를 위함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삼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번역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 역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올라갈 수 없으므로 사람이 되신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지각과 사고로는, 지식과 정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셔야 하나님을 알고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한 무름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른 것처럼 말입니다. 이방 여인 룻을 값주고 사서 유다 지파로 들이고 보아스와 룻 사이에 다윗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후손으로 나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윤택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복과 같은 말입니다. 선이라는 말, 복이라는 말은 진리 가운데 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 가운데 복된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신령하며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선함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선한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선한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주신 선한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값을 주고 물러 샀듯 그래서 한 가정을 이루듯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는 우리 자리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유일하신 그리스도, 중보자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온 것은 우리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셔서 그와 함께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 삼으시려고 하심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9-17).
3. 구주가 나심
성탄은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베들레헴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에서 다스릴 자가 난다고 이미 예언하여 그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육신으로 보면 흠모할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낮은 것으로 오셨습니다. 이것도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언된 대로 유다 지파에서 오셨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수님은 예언된 대로 처녀에게 잉태하여 임마누엘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입니다. 다윗이 이곳에서 났습니다. 이곳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하는데, 구주는 우리의 주인이시로되 구원하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내 생명을 구원하신 주,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제사장, 선지자,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 그리스도 주, 그분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뭐가 될지 물을 때 죄인이 된다고 할 자가 없습니다. 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선한 심성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되어 늪과 같이 몸부림칠수록 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나 불능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생 주시고 자녀 삼으시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불순종하는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 순종할 수도 없으며,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우리 중심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무능할 뿐 아니라 이 무능이 우리를 부패로 이끌어갑니다. 달리기를 할 때 달리는 사람은 싸우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릴 수 없으면 판단을 합니다. 무능한 것에는 부패가 따라옵니다. 파릇파릇한 것은 썩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으니 이제 생명을 거역합니다. 빛이 될 수 없으니 빛에 대적합니다. 인간은 선함에 무능할 뿐 아니라 악함에 밝아집니다. 악을 행하기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히 아름답게 지으셨는데 아무도 그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통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분들을 보면 모두 아름답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식들도 심성이 곱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선한 마음들이 많습니다. 평생 애써서 모은 것을 돕기 위해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처한 모습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름다움을 위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마음이 남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내 마음이 저주가 됩니다. 축복해야 할 혀가 사르는 불과 죽이는 독이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축복의 혀가 저주의 혀로 바뀝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르 값주고 물러 주셔서 사 주셔야 하나님의 자녀의 심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흑암의 그늘에 죄의 노예와 종으로 살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혜의 그늘 아래 빛의 그늘 아래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삼으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4. 존재의 구원에 관한 기쁨의 좋은 소식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에 이르므로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이것보다 더 큰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요새는 어떤 기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락은 많은데 기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자화상을 누가 사진을 찍어 모아본다면 어디든지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오락과 기쁨의 개념은 다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기쁨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 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것, 값주고 사신 것. 이 큰 기쁨은 우리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소유적인 수준의 기쁨이 아닙니다. 뭘 하나 보고 기뻐하고 뒤돌아서서 다시 슬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기쁨, 나의 나 된 것이, 나의 존재 자체가 기쁜 근원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부모가 자녀를 기뻐하니 자녀가 당당한 것입니다. 부모의 기뻐함을 자녀가 누리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낳았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자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영광 가운데 우리가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존재적인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가 가장 먼저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적인 것,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 의를 우리 것 삼아주시는 그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나 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를 자랑하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자신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노인은 아이들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본연의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 됨입니다. 이것이 기뻐야 우리가 넉넉합니다.
5. 자기를 낮추고 비움의 복됨
성탄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지극히 비우는데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말석에 앉는 자가 상석에 앉고 늦게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우는 것입니다. 너무 무거워지지 않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성탄에 제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꾸 오히려 무거워져서 뭐가 하나 더 붙긴 붙는데 높이 날아야 신령한 것을 보고 먼 곳을 보는데, 오히려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에 우리도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어로 minimal life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소치의 삶이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고 버리고 비울 때 하나님의 기쁨과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곳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온 백성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그네, 외인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면 신약시대에는 민족도 혈통도 언어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더 전하되 우리를 비움으로서 그렇게 하는 일이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은 실해지는 것입니다. 실하다는 것은 단단하고 단단함이나 경직되지 않는 것, 생명력이 있는 단단함입니다. 바위같이 완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씹으면 작은 것이라도 며칠을 연명할 수 있는 음식 같은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 실한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영광과 기쁨과 평화는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요 영광이요 의입니다.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쁨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기쁨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기뻐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을 기뻐하고 돌보는 것을 알면서 기뻐하듯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가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거든 기쁨의 근원을 나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늘 한 날도 나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에서 내 자신의 기쁨을 찾기 원합니다. 평화 역시 같습니다. 평화는 샬롬입니다. 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제 자리에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 물의 근원에 가닿아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제 자리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의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이 성탄에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과 그가 베푸시는 기쁨 가운데 평화가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봐야 합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우리를 비우고 나를 부인하고 예수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내가 자라감이 있는 실한, 신령한 모든 성도가 되기를 성탄에 축원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 | 눅 2:8-14 | 문병호 목사 | 십자가지기교회 | 성탄주일 낮예배 | 20221225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녹취록>
1. 자기를 낮추시고 비우신 하나님의 아들
어제 주보를 작성하는데 보니 52주차입니다. 해마다 52번 예배를 드리는데 올해는 마지막 예배를 성탄으로 올립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눈이 오면 더 좋아하는데 올해는 눈이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 꼭 이때 오신 그것으로 좋은 것입니다. 학자들이 살피고 연구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으로 결론 내린 날이 이 날입니다. 이 날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본 것처럼 예수님의 성육신은 탄생이 아니라 잉태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시는 그 때부터 인생을 취하여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철저히 우리와 똑같이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 우리의 죄를 속하시려고 그리 잉태되고 그리고 탄생하신 것입니다. 잉태는 나사렛에서, 탄생은 베들레헴입니다. 이 땅에 짐승의 구유에 태어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높디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땅의 현인들이나 성자들은 우리에게 닮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낮으신 곳에 오신 구주는 자신을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닮는다는 것은 일순간 좋고 내 의가 있으나 곧 우리의 무능을 발견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삽니까. 저도 미국, 영국, 제네바도 다녀 봤으나 가장 부지런한 민족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자면 유대민족 정도 될 것입니다. 또 우리 민족은 똑똑합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이처럼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부지런함으로 우리가 스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갖추면 갖출수록 더 무거워집니다. 열기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무거우면 올라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우리에게 중요한 단어는 빌립보서 말씀,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낮추시고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도 낮아지고 비워져야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채웠는데 무거워지니, 소유는 많은데 존재는 가라앉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우리의 대속을 위한 성육신
중세시대 안셈이라는 신학자가 유명한 신학책, <<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제목의 성육신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한 속죄를 위함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삼은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존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제가 번역한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 역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가 올라갈 수 없으므로 사람이 되신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지각과 사고로는, 지식과 정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셔야 하나님을 알고 뜻을 알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한 무름의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른 것처럼 말입니다. 이방 여인 룻을 값주고 사서 유다 지파로 들이고 보아스와 룻 사이에 다윗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후손으로 나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윤택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함은 복과 같은 말입니다. 선이라는 말, 복이라는 말은 진리 가운데 복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진리 가운데 복된 것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신령하며 멸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선함의 극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시고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선한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육신의 부모라도 좋은 것으로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선한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 주신 선한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값을 주고 물러 샀듯 그래서 한 가정을 이루듯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는 우리 자리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으로서는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유일하신 그리스도, 중보자가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딤전 2:5-6). 아기 예수가 우리에게 온 것은 우리의 형편을 나아지게 하려 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셔서 그와 함께 자녀 삼으시고 상속자 삼으시려고 하심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9-17).
3. 구주가 나심
성탄은 예언된 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베들레헴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 유대 땅 베들레헴입니다. 그곳에서 다스릴 자가 난다고 이미 예언하여 그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예수님은 육신으로 보면 흠모할 것이 없습니다. 지극히 낮은 것으로 오셨습니다. 이것도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언된 대로 유다 지파에서 오셨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예수님은 예언된 대로 처녀에게 잉태하여 임마누엘 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로 오셨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입니다. 다윗이 이곳에서 났습니다. 이곳에서 구주가 나셨다고 하는데, 구주는 우리의 주인이시로되 구원하신 주님을 의미합니다. 내 생명을 구원하신 주,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제사장, 선지자, 영원한 왕이십니다. 그 그리스도 주, 그분이 우리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합니다. 아무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 얻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뭐가 될지 물을 때 죄인이 된다고 할 자가 없습니다. 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선한 심성입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되어 늪과 같이 몸부림칠수록 더 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나 불능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생 주시고 자녀 삼으시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불순종하는 죄가 들어와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니 순종할 수도 없으며,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우리 중심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무능할 뿐 아니라 이 무능이 우리를 부패로 이끌어갑니다. 달리기를 할 때 달리는 사람은 싸우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달릴 수 없으면 판단을 합니다. 무능한 것에는 부패가 따라옵니다. 파릇파릇한 것은 썩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으니 이제 생명을 거역합니다. 빛이 될 수 없으니 빛에 대적합니다. 인간은 선함에 무능할 뿐 아니라 악함에 밝아집니다. 악을 행하기 바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히 아름답게 지으셨는데 아무도 그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애통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분들을 보면 모두 아름답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식들도 심성이 곱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 선한 마음들이 많습니다. 평생 애써서 모은 것을 돕기 위해 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한계이자 인간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처한 모습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아름다움을 위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마음이 남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내 마음이 저주가 됩니다. 축복해야 할 혀가 사르는 불과 죽이는 독이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죄가 들어오면 축복의 혀가 저주의 혀로 바뀝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르 값주고 물러 주셔서 사 주셔야 하나님의 자녀의 심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사망의 그늘에 흑암의 그늘에 죄의 노예와 종으로 살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은혜의 그늘 아래 빛의 그늘 아래 그리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삼으시려고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4. 존재의 구원에 관한 기쁨의 좋은 소식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를 믿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에 이르므로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이것보다 더 큰 소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요새는 어떤 기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락은 많은데 기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자화상을 누가 사진을 찍어 모아본다면 어디든지 앉아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말하는 오락과 기쁨의 개념은 다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기쁨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새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 것이 지나갔으니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 것, 거듭난 것, 그리스도의 것, 값주고 사신 것. 이 큰 기쁨은 우리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소유적인 수준의 기쁨이 아닙니다. 뭘 하나 보고 기뻐하고 뒤돌아서서 다시 슬퍼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기쁨, 나의 나 된 것이, 나의 존재 자체가 기쁜 근원적인 기쁨입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17). 부모가 자녀를 기뻐하니 자녀가 당당한 것입니다. 부모의 기뻐함을 자녀가 누리는 것입니다. 하니님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를 낳았을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자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 영광 가운데 우리가 거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존재적인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가 가장 먼저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적인 것,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가 중요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 의를 우리 것 삼아주시는 그 가운데 우리를 향하신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나 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를 자랑하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내 자신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저는 아름다운 노인은 아이들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본연의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 됨입니다. 이것이 기뻐야 우리가 넉넉합니다.
5. 자기를 낮추고 비움의 복됨
성탄에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지극히 비우는데 넉넉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말석에 앉는 자가 상석에 앉고 늦게 된 자가 먼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비우는 것입니다. 너무 무거워지지 않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성탄에 제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꾸 오히려 무거워져서 뭐가 하나 더 붙긴 붙는데 높이 날아야 신령한 것을 보고 먼 곳을 보는데, 오히려 높이 날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니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에 우리도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어로 minimal life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소치의 삶이라는 말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십자가의 능력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를 낮추고 버리고 비울 때 하나님의 기쁨과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아직 복음을 접하지 않은 곳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온 백성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제는 나그네, 외인도 없습니다. 구약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특별히 선택하셨다면 신약시대에는 민족도 혈통도 언어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더 전하되 우리를 비움으로서 그렇게 하는 일이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은 실해지는 것입니다. 실하다는 것은 단단하고 단단함이나 경직되지 않는 것, 생명력이 있는 단단함입니다. 바위같이 완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씹으면 작은 것이라도 며칠을 연명할 수 있는 음식 같은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 실한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영광과 기쁨과 평화는 우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요 영광이요 의입니다.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외에 다른 것은 알지 않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기쁨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기쁨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기뻐합니다. 아이들이 부모가 자신을 기뻐하고 돌보는 것을 알면서 기뻐하듯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가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아침에 일어나거든 기쁨의 근원을 나에게서가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오늘 한 날도 나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에서 내 자신의 기쁨을 찾기 원합니다. 평화 역시 같습니다. 평화는 샬롬입니다. 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제 자리에 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려 물의 근원에 가닿아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 제 자리에 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의 때 예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러 오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께 이 성탄에 하나님의 온전한 영광과 그가 베푸시는 기쁨 가운데 평화가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라봐야 합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우리를 비우고 나를 부인하고 예수를 인정하고, 그 가운데 내가 자라감이 있는 실한, 신령한 모든 성도가 되기를 성탄에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