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어린이 주일] 어린이는 천국에서 큰 자 (마 18:1-6; 막 10:13-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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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어린이 주일] 어린이는 천국에서 큰 자 (마 18:1-6; 막 10:13-16)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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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막 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막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녹취록>
1. 본문 개관
본문의 두 군데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누가 천국에서 큰지 묻자 무리 중에 한 아이를 부르셔서 제자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지 못하며 이 아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려오자 제자들이 만류하는데, 예수님께서 이에 노하시며 천국이 이런 아이의 것이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농부, 포도원, 그물의 비유 등 입니다. 본문은 직접적인 비유는 아니나 교훈으로서 전체적으로 천국에 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어린아이를 귀중히 여기라
어릴 때 교회에 가면 천국에는 어린아이들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에는 연로하여 구부정한 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아이들의 발랄함과 생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래은, 이레, 시언, 세린, 세경, 준희가 있습니다. 예강이와 예림이도 어린아이라고 하기에는 그럴 수 있으나 역시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이 세상의 축복입니다. 가을만 있으면 세상이 쓸쓸하고 적막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봄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면류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일 뿐 아니라 한 가정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한 가정의 자녀이자 상속자입니다. 예배 중에 우리는 십계명을 읽으면서 새겼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 5-10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시민에 관한 말씀이 1-4계명에 속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이 계명에 속하는 천국 시민이자, 5-10계명의 이웃 사랑의 계명에 속하는 자녀입니다. 구원은 생명 단위로 주십니다. 생명의 시작은 모태의 잉태입니다. 어린이는 동물과 달리 연약하여 탯줄이 끊기면 한동안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어린이의 정의는 나이라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독립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서서 자립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린이라는 개념이 보호받는, 사랑받는 존재, 옆에서 거들어 주고 후견해 주고 안아 줘야 할 모든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아직 미성숙합니다.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아니므로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잣대를 요구하거나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바쁘고 힘이 듭니다. 아이들이 큰 가방을 매고 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자랄 때보다 더 힘들어 보입니다. 저도 영국에서 공부할 때 항상 책을 가득 넣어 통학을 했는데 요새 아이들을 보면 그만큼이나 무겁고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놀이터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전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삶이 참으로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을 우리가 잘 보호해 줘야 할 텐데 통계에 의하면 여학생의 30%, 남학생의 10% 이상이 어른들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보호자가 되는 어른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각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훨씬 더 힘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더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어린아이들은 무엇보다 그 생명 자체로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이를 백성의 수에 넣지도 않았고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게 하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3. 시대의 소망인 어린아이
성경에도 보면 중요할 때 출생이 있었고 어린아이들이 등장해서 한 시대를 책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성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삭과 야곱은 출생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에게 난 자라야 언약의 후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삭은 출생 자체가 복되어, 그 이름이 웃음이라는 뜻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한 시대를 여는 시작입니다. 출애굽의 시작은 모세의 출생으로 비롯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암흑기는 사사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종언을 구하는 것이 사무엘의 출생입니다. 한나의 기도로 그것이 시작됩니다. 세상은 크게 움직이고 강하게 움직이고 힘으로 되는 것 같아도 한 시대는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기도 가운데 나게 하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어린아이가 잘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그 시대의 소망인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말할 바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시고 베들레헴에서 나시며 나사렛에서 자라시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워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없으면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성경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이 바로 천국 개념입니다.
4. 천국은 은혜로 하나 되는 곳이다
순수하고 가녀린 듯하나 쉬이 부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작습니다. 키나 외모나 능력이 출중하지 않습니다. 심령도 굳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잘 울고 잘 웃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오늘 이 어린아이가 크다고 하십니다. 다만, 어디에서 크냐 하니 천국에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서 크다고 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물으니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세우고 그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기준은 다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오래 참아야 열매를 맺습니다. 말석에 앉아야 상석에 앉습니다. 지상은 나의 자질로 사나, 천국은 은혜로 삽니다. 지상은 이룬 것으로, 천국은 받은 것으로 능력을 삼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얼마나 하나님께 매여 의지하고 사는지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 지상과 천국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스스로 높여야 높아지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은혜만 받으면 세례 요한보다 큽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받아 거듭나므로 누구든지 이 은혜를 받으면 세례 요한보다 큰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석청을 먹거나 광야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라도 천국에서 그보다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천국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관심사 자체가 지상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상급을 얘기하나, 사실 상급은 하나님의 비밀이요,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립니다. 다시는 눈물과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천만 가지가 같다면 한 가지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상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자들이 먼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서로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크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들어감과 못 들어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잘하는지 누가 더 큰지 물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가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이므로 절대가치는 누릴 줄 알아야 기쁜데, 제자들은 상대가치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둘 다 세 개 가지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명이 다섯 개 가지고 나머지는 더 가지면 다섯 개 가져도 불평합니다. 그래서 범죄가 더 생기는 것입니다. 많이 가질수록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높낮이를 재고 비교하는 교만이자 판단이자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 자질을 내세웁니다. 그저 잠잠히 더불어 살면 되는데 누구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5. 천국에는 자기 공로가 없기에 비교의식이 없다
제자들의 본문의 질문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본문 18장 전,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니 예수님이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고 고난 당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또 17장에서는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시고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고 병자와 아픈 자를 고치고 또 고난 당하실 것을 두 번째로 예언하십니다. 인자가 잡혀 고난당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자꾸 낮아지시려 하고 죽음의 고난의 길로, 낮은 자의 자리로 들어가시려고 하십니다.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높은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계속 낮아져 자기를 죽이시는 자리까지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은 촉수를 더 세워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로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 누가 크나이까"라고 합니다. '나아온다'는 것은 역동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을 원어로 보면 최상급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꾸 낮아지려 하시는데도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공로를 이야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크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자질과 공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누가 크냐'라는 질문이 있으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내가 감사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누가 크다는 것, 그것은 천 분의, 만 분의 일도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 백성, 자녀되는 것, 영생의 열매를 얻고 예수의 신부로 영원한 삶을 사는 것,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사망이 없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은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 그리고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빨리 갔다고 두 데나리온 주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갔다고 반 데나리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가나 늦게 가나 들어가기만 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비교를 없애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받는 것,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자질이면 앞장서서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큰지에 대한 질문이 좋은 질문입니다. 더 나은 자로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그 질문은 성립되기 힘든 질문입니다.
6. 천국 백성은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보면 사람의 축에도 못드는데 그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본문 14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1) 악에는 어리석어지며 날로 순결해지라
첫째,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올바른 것을 아는 것은 자꾸 멀리하고 악만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어른의 모습입니다. 남을 윽박지르고 속이는 것을 처세술로 가르치는 것, 이런 모습이 어른의, 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끼리는 그렇다고 해도 요즘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이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지혜는 점점 늘리고 악은 점점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세상의 때가 묻는 것을 멀리하고 중심을 하나님의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 후세들에게 그것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올바른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고 남겨야 합니다.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깨끗하고 순수하고 맑아야 합니다. 옹달샘같이 물이 작아도 맑고 깨끗한 윗샘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강도 낙동강도 수원지는 옹달샘입니다. 그 맑은 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양자강이 넓지만 흙탕물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기보다 맑은 것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넓게만 이물 저물 섞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줄기가 흐르더라도 맑은 물로 흐르는 것, 그것이 어린아이로 돌이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2) 자기 자신을 앎으로 겸손하라
둘째,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일수록 더 깍듯이 대하는 신사와 숙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약한 자에게 대할 때 인품이 드러납니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오히려 잘 대하고 높고 강한 사람에게는 직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판단하면 이미 마음이 달라집니다. 잘살든 못살든 그 조건을 떠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을 볼 때 옷을 잘 입었는지 외모를 살피지 않고 그저 한 어른으로 봅니다. 판단하지 말고 낮추어야 합니다. 물이 차려면 처마라도 낮아져야 합니다. 세상의 처세술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겸손하면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흉내만 내지 말고 끝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추는 방법은 한 가지, 즉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19-20). 진정으로 겸손해지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나야말로 정말 맛없이 버려진 소금과 같은데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도 가장 겸손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입니다. 내가 가장 겸손할 때 내가 가장 못나고 소자이고 말째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자기를 낮출 때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면 긍휼의 그릇입니다. 그릇은 가라 앉아야 담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말합니다. 이 그릇은 바짝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빗방울이라도 쌓입니다. 모자라 보여도, 푸석푸석해도 낮추면 물이 쌓입니다. 우리도 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7. 하나님 앞에서 어른과 어린아이가 다르지 않다
1) 어린아이를 귀히 여기라
아이들은 바로 우리와 동일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생명 단위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어느 사회든지 아이들을 업신여기고 노리개 삼고 일 시키고 매매하는 나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사회가 천국인 것입니다. 이 땅의 천국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잘 섬기고 어린아이가 주인되는 사회입니다.
2) 어린아이도 언약백성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의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중고등부를 섬기니 농구도 해 보고 아이들과 어울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15살만 되도 어른같아 보입니다. 높임말도 없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의견을 내고 하면 어른들이 그대로 따라갑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반대로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면 함께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린아이와 함께하도록 포함되는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질까요? 바로 유아 세례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신앙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이것이 우리 주님이 아이를 보시는 시각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의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만큼 유창하게 표현하거나 섬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도 믿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믿고 있는데 걷지 못하고 차도 못 타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라
그러므로 부모가 할 가장 큰 일은 마가복음 본문처럼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기를 써서 예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학원에도 어린이집에도 데려가야 하지만, 제1중심은 예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은 영으로 분별합니다. 아이들을 쉽게 보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가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최고의 일입니다. 이 아이들을 마가복음 본문 15절에 보면 ‘받든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받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올 때 제일 먼저 말하고 생각한 것이 아이들을 위한 유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규모에 비해 넓게 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디서 발표할 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제일 먼저 아이들의 에어컨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데리고만 가면 주님이 안수하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어쨌든 데려가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리게 하고 그 자리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부모가 궁극적으로 안수하고 축복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부모는 그저 예배의 자리에 데려가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일단 데려가면 예수님이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고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이 소자에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조금 무슨 일로 잘될 것 같아도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못될 것 같아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 데리고만 오면 안고 손을 얹고 축복하십니다.
8. 결론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의 비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악에 무뎌질 수 있습니다. 다시금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바랍니다. 넓은 물줄기만 생각하지 말고 순순한 옹달샘, 윗샘의 물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축복하고 무엇보다 예배에 데려오는 은혜가 있기를 오늘 말씀을 통해 축원합니다.
[2019050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어린이 주일] 어린이는 천국에서 큰 자 (마 18:1-6; 막 10:13-16) 문병호 목사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본문 개관
본문의 두 군데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누가 천국에서 큰지 묻자 무리 중에 한 아이를 부르셔서 제자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지 못하며 이 아이가 천국에서 큰 자라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려오자 제자들이 만류하는데, 예수님께서 이에 노하시며 천국이 이런 아이의 것이고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비유가 많이 나옵니다. 농부, 포도원, 그물의 비유 등 입니다. 본문은 직접적인 비유는 아니나 교훈으로서 전체적으로 천국에 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어린아이를 귀중히 여기라
어릴 때 교회에 가면 천국에는 어린아이들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국에는 연로하여 구부정한 분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아이들의 발랄함과 생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래은, 이레, 시언, 세린, 세경, 준희가 있습니다. 예강이와 예림이도 어린아이라고 하기에는 그럴 수 있으나 역시 함께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이 세상의 축복입니다. 가을만 있으면 세상이 쓸쓸하고 적막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봄과 같습니다. 어린이는 면류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일 뿐 아니라 한 가정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한 가정의 자녀이자 상속자입니다.
예배 중에 우리는 십계명을 읽으면서 새겼습니다.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의 계명, 5-10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시민에 관한 말씀이 1-4계명에 속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이 계명에 속하는 천국 시민이자, 5-10계명의 이웃 사랑의 계명에 속하는 자녀입니다.
구원은 생명 단위로 주십니다. 생명의 시작은 모태의 잉태입니다. 어린이는 동물과 달리 연약하여 탯줄이 끊기면 한동안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어린이의 정의는 나이라기보다는 그가 얼마나 독립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서서 자립할 수 있는지가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어린이라는 개념이 보호받는, 사랑받는 존재, 옆에서 거들어 주고 후견해 주고 안아 줘야 할 모든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아직 미성숙합니다. 어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아니므로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잣대를 요구하거나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요새 아이들이 바쁘고 힘이 듭니다. 아이들이 큰 가방을 매고 가는 것을 보면 우리가 자랄 때보다 더 힘들어 보입니다. 저도 영국에서 공부할 때 항상 책을 가득 넣어 통학을 했는데 요새 아이들을 보면 그만큼이나 무겁고 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 놀이터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전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삶이 참으로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을 우리가 잘 보호해 줘야 할 텐데 통계에 의하면 여학생의 30%, 남학생의 10% 이상이 어른들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보호자가 되는 어른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 어린아이들이 얼마나 각박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것입니다. 대체로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훨씬 더 힘이 들지 않는가, 그래서 더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어린아이들은 무엇보다 그 생명 자체로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이를 백성의 수에 넣지도 않았고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않게 하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3. 시대의 소망인 어린아이
성경에도 보면 중요할 때 출생이 있었고 어린아이들이 등장해서 한 시대를 책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장성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삭과 야곱은 출생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에게 난 자라야 언약의 후손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삭은 출생 자체가 복되어, 그 이름이 웃음이라는 뜻을 지닌 자가 되었습니다. 야곱도 그렇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출생 이야기를 잘 압니다. 야곱은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우리가 압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는 한 시대를 여는 시작입니다. 출애굽의 시작은 모세의 출생으로 비롯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암흑기는 사사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종언을 구하는 것이 사무엘의 출생입니다. 한나의 기도로 그것이 시작됩니다. 세상은 크게 움직이고 강하게 움직이고 힘으로 되는 것 같아도 한 시대는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기도 가운데 나게 하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어린아이가 잘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 그 시대의 소망인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말할 바 없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신 것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시고 베들레헴에서 나시며 나사렛에서 자라시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사랑스러워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없으면 어떻게 구원이 우리에게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성경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어리다'는 것이 바로 천국 개념입니다.
4. 천국은 은혜로 하나 되는 곳이다
순수하고 가녀린 듯하나 쉬이 부러지지 않는 것, 그것이 어린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작습니다. 키나 외모나 능력이 출중하지 않습니다. 심령도 굳거나 강하지 않습니다. 잘 울고 잘 웃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오늘 이 어린아이가 크다고 하십니다. 다만, 어디에서 크냐 하니 천국에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서 크다고 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지 물으니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세우고 그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기준은 다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됩니다. 오래 참아야 열매를 맺습니다. 말석에 앉아야 상석에 앉습니다. 지상은 나의 자질로 사나, 천국은 은혜로 삽니다. 지상은 이룬 것으로, 천국은 받은 것으로 능력을 삼습니다. 천국의 기준은 얼마나 하나님께 매여 의지하고 사는지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 지상과 천국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스스로 높여야 높아지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은혜만 받으면 세례 요한보다 큽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까지 세례 요한이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받아 거듭나므로 누구든지 이 은혜를 받으면 세례 요한보다 큰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석청을 먹거나 광야에 나가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우리가 지극히 작은 자라도 천국에서 그보다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천국에는 크고 작음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관심사 자체가 지상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상급을 얘기하나, 사실 상급은 하나님의 비밀이요,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립니다. 다시는 눈물과 사망이 없는 것입니다. 천만 가지가 같다면 한 가지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상급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자들이 먼저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천국에는 서로 구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크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들어감과 못 들어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잘하는지 누가 더 큰지 물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가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이므로 절대가치는 누릴 줄 알아야 기쁜데, 제자들은 상대가치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둘 다 세 개 가지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명이 다섯 개 가지고 나머지는 더 가지면 다섯 개 가져도 불평합니다. 그래서 범죄가 더 생기는 것입니다. 많이 가질수록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높낮이를 재고 비교하는 교만이자 판단이자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 자질을 내세웁니다. 그저 잠잠히 더불어 살면 되는데 누구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5. 천국에는 자기 공로가 없기에 비교의식이 없다
제자들의 본문의 질문 배경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본문 18장 전, 16장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니 예수님이 이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말씀하시고 고난 당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또 17장에서는 변화산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시고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이시고 병자와 아픈 자를 고치고 또 고난 당하실 것을 두 번째로 예언하십니다. 인자가 잡혀 고난당하고 죽을 것을 예언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자꾸 낮아지시려 하고 죽음의 고난의 길로, 낮은 자의 자리로 들어가시려고 하십니다.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높은 자리로 가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계속 낮아져 자기를 죽이시는 자리까지 나아가시는데 제자들은 촉수를 더 세워 더 높아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로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 누가 크나이까"라고 합니다. '나아온다'는 것은 역동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질문을 원어로 보면 최상급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꾸 낮아지려 하시는데도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공로를 이야기한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크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스스로의 자질과 공로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누가 크냐'라는 질문이 있으면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일차적으로 내가 감사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누가 크다는 것, 그것은 천 분의, 만 분의 일도 관심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 백성, 자녀되는 것, 영생의 열매를 얻고 예수의 신부로 영원한 삶을 사는 것, 눈물과 곡하는 것과 사망이 없는 신령한 몸으로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은 마지막 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영원한 형벌에 들어갈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 그리고 주 예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빨리 갔다고 두 데나리온 주는 것이 아닙니다. 늦게 갔다고 반 데나리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 가나 늦게 가나 들어가기만 하면 한 데나리온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비교를 없애야 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받는 것,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자질이면 앞장서서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누가 큰지에 대한 질문이 좋은 질문입니다. 더 나은 자로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그 질문은 성립되기 힘든 질문입니다.
6. 천국 백성은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보면 사람의 축에도 못드는데 그들을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가복음 본문 14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1) 악에는 어리석어지며 날로 순결해지라
첫째,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올바른 것을 아는 것은 자꾸 멀리하고 악만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어른의 모습입니다. 남을 윽박지르고 속이는 것을 처세술로 가르치는 것, 이런 모습이 어른의, 악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른들끼리는 그렇다고 해도 요즘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이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해 봅니다. 이 말씀은 지혜는 점점 늘리고 악은 점점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정반대의 삶을 삽니다. 세상의 때가 묻는 것을 멀리하고 중심을 하나님의 것에 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 후세들에게 그것을 남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올바른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고 남겨야 합니다. 악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깨끗하고 순수하고 맑아야 합니다. 옹달샘같이 물이 작아도 맑고 깨끗한 윗샘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강도 낙동강도 수원지는 옹달샘입니다. 그 맑은 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양자강이 넓지만 흙탕물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기보다 맑은 것을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넓게만 이물 저물 섞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한줄기가 흐르더라도 맑은 물로 흐르는 것, 그것이 어린아이로 돌이키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2) 자기 자신을 앎으로 겸손하라
둘째,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한 사람일수록 더 깍듯이 대하는 신사와 숙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약한 자에게 대할 때 인품이 드러납니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오히려 잘 대하고 높고 강한 사람에게는 직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낫습니다. 판단하면 이미 마음이 달라집니다. 잘살든 못살든 그 조건을 떠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을 볼 때 옷을 잘 입었는지 외모를 살피지 않고 그저 한 어른으로 봅니다. 판단하지 말고 낮추어야 합니다. 물이 차려면 처마라도 낮아져야 합니다. 세상의 처세술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겸손하면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의 흉내만 내지 말고 끝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낮추는 방법은 한 가지, 즉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 7:19-20). 진정으로 겸손해지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인데 나야말로 정말 맛없이 버려진 소금과 같은데 하나님이 나를 살려 주셨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겸손해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저도 가장 겸손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때입니다. 내가 가장 겸손할 때 내가 가장 못나고 소자이고 말째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고 자기를 낮출 때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면 긍휼의 그릇입니다. 그릇은 가라 앉아야 담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은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 말합니다. 이 그릇은 바짝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빗방울이라도 쌓입니다. 모자라 보여도, 푸석푸석해도 낮추면 물이 쌓입니다. 우리도 아이와 같이 겸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7. 하나님 앞에서 어른과 어린아이가 다르지 않다
1) 어린아이를 귀히 여기라
아이들은 바로 우리와 동일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생명 단위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업신여기면 안 됩니다. 어느 사회든지 아이들을 업신여기고 노리개 삼고 일 시키고 매매하는 나라는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사회가 천국인 것입니다. 이 땅의 천국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를 잘 섬기고 어린아이가 주인되는 사회입니다.
2) 어린아이도 언약백성이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의아한 것이 있었습니다. 저도 중고등부를 섬기니 농구도 해 보고 아이들과 어울려 봤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15살만 되도 어른같아 보입니다. 높임말도 없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의견을 내고 하면 어른들이 그대로 따라갑니다. 보통 한국에서는 반대로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면 함께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린아이와 함께하도록 포함되는 말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엡 3:6).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질까요? 바로 유아 세례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신앙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이것이 우리 주님이 아이를 보시는 시각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의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만큼 유창하게 표현하거나 섬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도 믿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합니다. 믿고 있는데 걷지 못하고 차도 못 타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라
그러므로 부모가 할 가장 큰 일은 마가복음 본문처럼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입니다. 어쨌든 기를 써서 예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학원에도 어린이집에도 데려가야 하지만, 제1중심은 예수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영은 영으로 분별합니다. 아이들을 쉽게 보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가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최고의 일입니다.
이 아이들을 마가복음 본문 15절에 보면 ‘받든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받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올 때 제일 먼저 말하고 생각한 것이 아이들을 위한 유아실입니다. 그래서 교회 규모에 비해 넓게 공간을 만든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어디서 발표할 때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름이 되면 제일 먼저 아이들의 에어컨을 점검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데리고만 가면 주님이 안수하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어쨌든 데려가는 것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리게 하고 그 자리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부모가 궁극적으로 안수하고 축복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일은 주님이 하십니다. 부모는 그저 예배의 자리에 데려가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일단 데려가면 예수님이 그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고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이 소자에게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조금 무슨 일로 잘될 것 같아도 하나님은 항상 계십니다. 못될 것 같아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 데리고만 오면 안고 손을 얹고 축복하십니다.
8. 결론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의 비밀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악에 무뎌질 수 있습니다. 다시금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 바랍니다. 넓은 물줄기만 생각하지 말고 순순한 옹달샘, 윗샘의 물이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다름 아닌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축복하고 무엇보다 예배에 데려오는 은혜가 있기를 오늘 말씀을 통해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