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추수감사주일] 감사의 비밀 (시 50:14-15, 22-23)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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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십자가지기교회 주일낮예배: 추수감사주일] 감사의 비밀 (시 50:14-15, 22-23) 문병호 목사

  1.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2.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2.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음성파일: 게시물 하단 "관련링크"에서 청취 혹은 내려받기 가능합니다. 



<녹취록>


 

1. 추수감사절 단상 


추수감사절을 절기로 구약의 절기 지키듯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두 단어로 하면 은혜와 감사입니다.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 받은 사람들이 나와서 감사하는 이야기가 성경입니다. 성경은 은혜 받은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지 세사의 여느 위인전처럼 읽듯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온전하시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받은 복은 헤아려 보라고 합니다. 우리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코로나 와중에서도 우리를 더 은밀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적재 적소에 모든 일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속도를 잘 낸다고 격려한다면 그것은 불행이 될 것입니다. 코로나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제시키시는 것으로 의미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불편함과 불평이 간혹 있을지라도 감사함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금식도 그렇습니다. 항상 먹는 음식이라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을 통해 소중함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 이상기온으로 인해 곡식 생산량이 줄었다고 합니다. 여느 기업의 영업실적과 달리 제가 농부의 아들이라 그런지 농사가 몸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최근 티비를 보면 코로나 자체보다는 식량이 부족하여 식사를 굶는 아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더 취하는 것보다 쪼개서 나누는 마음이 더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2.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역사적, 신학적 의미


부활주일이 있으나 날마다 부활의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것처럼 추수도 그렇습니다. 절기나 기념일을 정하는 것이 한 날을 정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그 의미라면 추수감사절도 그렇습니다. 최고의 관심은 천국의 알곡으로 들어갈 우리를 잘 가꾸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몇 번 나눈 바 있습니다. 무르익은 곡식을 추수하라는 성경말씀에서 이 곡식은 바로 생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의 수장절, 장막절, 초막절입니다. 이것과 가장 가까운 의미를 가지는 신약의 날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역사적 의미도 있습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우리의 정통 장로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더이상 그곳에서 핍박을 이기지 못하니 메사추세츠 등 지금 미국의 동부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 도시 이름 중 프로비던스, 즉 하나님의 섭리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서원을 갚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추수감사절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미국에 오는 가운데 배에서도 많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정착해서도 많이 얼어 죽었습니다. 동부는 많이 춥고 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문명은 동부에서 시작되고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그들이 서원을 갚는다고 하여 교회부터 짓고 병원과 도서관 학교 등을 지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이 미국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 주일로 정착된 것입니다. 

성경적 절기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약의 절기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하여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키는 예식은 세례와 성찬밖에는 없습니다. 절기, 제사는 모두 폐하여졌으나 추수감사절은 좋은 뜻으로 새기므로 세계 교회가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 뿌리는 것, 여름에 자라는 것은 감사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같습니다. 잉태부터 전 생애를 온전히 사심으로 준비하여 죽고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구약의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 초실절, 맥추절,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 이 모든 절기가 추수감사절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추수감사절은 장막절만 기념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 의미를 기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절기적 의미가 아닌 총체적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3. 예배로서의 감사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배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첫째, 그가 계시는 것을 아는 것이고, 둘째,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아는 것이고, 셋째, 그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아는 것인지를 얘기했습니다. 즉 존재, 예배드리는 방법,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이 세 가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요약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므로 예배드리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유익하다'라는 말은 라틴어로 '프룩투스'(fructus), 바로 열매라는 의미입니다. 곧 우리가 가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열매를 올려 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일생 일대 우리에게 가장 복되고 귀한 것, 열매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종말이 바로 마지막 때 하나님의 곳간에 열매로 들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신랑이신 예수님을 마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 새 땅에서 가장 중요한 우리의 일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예배로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시 50:14),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2) 예배의 질서를 갖고, 부족할지라도 중심을 드리라 


아무리 사람이 착하고 선해도 예배에 대한 질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예배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혹시 좀 못하더라도 예배는 은혜 가운데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의 이끄심에 따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제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데 우리가 부족함으로 완전하지 못하므로 우리의 중심을 드려야 합니다. 중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축이 있어야 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온전하면 중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그러므로 우리의 불완전함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4. 직업을 주신 하나님께 직업으로써 영광을 돌리라


포도, 귤, 파인애플, 각각의 열매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 것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귀천이 없습니다.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청교도 정신입니다. 직업을 영어로 calling, vocation, occupation이라고도 합니다. 부르심, 소명, 열심히 몰두/종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귀천이 없습니다. 겨울에 춥다고 코트를 입으면서 옷을 만든 사람을 천하게 여기면 되겠습니까. 밥이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데 밥 만드는 사람을 천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잘못된 것을 옳게 하는 것, 기업의 제조하는 일 등이 모두 귀합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일하는 것입니다. 베버라는 사회학자는 이 직업소명설이 사실상 근대자본주의의 근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미국, 영국, 제네바 등에 가 보니 우리나라가 그래도 아직까지 직업의 귀천을 많이 따집니다. 직업소명설은 하나님이 이 땅에 우리에게 일을 주셨다는 것에 '아멘' 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맡기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직업을 귀하고 천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내가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한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더 균등히 분배되어야 합니다. 공부를 더 잘하고 해도 조금만 더 잘 살고 공부를 못했어도 조금만 더 못 살아야 합니다. 완전히 잘 살고 완전히 못 살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직업은 그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우리 기업이 흥왕합니다. 



5. 서원으로서의 감사


나에게 맡기신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받으신다는 약속, 그래서 우리 기업이 흥왕되기를 원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제가 이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약속, 이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제물이 서원의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에 기도가 들어가면 서원이 됩니다. 감사는 과거적 감사와 미래적 감사가 있는데 기도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킵니다. 이전의 것에 감사할 뿐 아니라 미리 있을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익숙해지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1)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셨음을 '아멘' 하라


본문의 저자 아삽은 당시 예배를 섬기는 자이고, 이 시는 제사의 시입니다. 그런데 8절에 번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제물, 속죄제와 번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없다는 것이 본문의 요지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아멘의 번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시고 싶어도 영광이 안되므로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고 구원을 보인다(23절)는 말은 온전히 우리 모든 것을 형통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되 감사로 드리라고 하는데 그 일을 서원으로 갚는다고 합니다(14절). 이미 된 줄 알고 감사하는 서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형식적인 예배는 드리지만 감사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시작이고 끝이라는 고백이 없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이 선하신 뜻을 이루실 줄 믿고 미리 감사하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는 항상 약속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환란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란이라는 단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 때면 사실 이것을 알 기회가 없습니다. 세상이 험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보면 압니다. 그런데 이런 환란 날에 여호와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환란은 사실 인생 자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영, 악한 영이 있으므로 인생 그 자체가 어찌 보면 환란입니다. 비관론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소망이 시작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환란입니다. 죽음을 제외한 최고의 환란은 감옥에 갇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환란 가운데 있습니다. 핍박이 심하고 환란이 극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라고 합니다. 즉 미래의 일에 대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회고하면서 결산할 때가 아니라 미리 될 것을 믿음으로 이루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사방에 우겨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감사함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미래의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원입니다. 이게 서원기도입니다. 


3) 하나님께서 행하시되 우리 안에서도 행하시니 그를 부르라


여러분, 서원은 우리가 먼저 드려서 갚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내가 먼저 드리니 미래의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떻게 될지 확실히 모르지만 하나님이 해 주시므로 무조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으로는 완전히 감사하지 못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니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행하시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다시 전도하게 하십니다. 본문 시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라 하시고 서원을 갚으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르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시키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하거나 모자르시지 않은데 왜 시키실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6. 하나님을 잊지 말고 불러 찾으라


다시 칼빈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을 본문 20절은 잊지 말고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 시편은 제사를 드리는데 여호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침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한 명만 돌아옵니다. 그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이방인입니다. 감사하다고 칭찬 받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향유 옥합을 깬 여인입니다. 크게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크게 사랑하고 크게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쌀 한 톨이라도 생각하고 먹읍시다. 서 있는 것도 은혜라는 것을 생각하고 감사합시다. 푹푹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건강을 안 주시면 말입니다. 먼 데 못가더라도 주변의 아름다운 사물을 통해서도 감사합시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황량한 모래바람만 부는데 하루 이틀은 살아도 일 년 내내 살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시사철 꽃과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아름답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믿는 도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별을 봐도 달을 봐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로 환란날에 우리를 건지시는 주를 부르십시오. 시간 남는데 뭐할까 하면 잠시 잠깐 시간이 나더라도 기도하고 성경 보십시오. 시간 따로 내는 것도 좋지만 잠시 잠깐 그때 그때 시간 날 때 기도하십시오. '제 기업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맡깁니다. 종은 백번째 좋은 것도 생각하지 못하오나 하나님은 최선을 아시오니 받아 주시옵소서' 하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을 부를 때, 찾기만 해도 상 주십니다. 세상은 두 번 세 번 찾으면 귀찮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달리시면 기뻐하십니다.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것이 이 모든 일 가운데 대원칙입니다. 내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불러서 하나님이 건지시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화롭게 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드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생각하고 부르고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7. 결론


모든 성도의 삶은 감사의 삶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제 1계명을 해석하면서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라는 이 말씀에 대해 네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경배, 둘째는 확신, 셋째는 기도, 넷째는 감사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더욱 흥왕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부르시고 찾으십시오. 절대자이자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오히려 약하고 흠이 더 많은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감사하는, 항상 감사의 은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