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복음 역사 | 마 4:12-22; 막 1:14-20; 눅 4:14-15; 요 4:43-45 | 문병호 목사 | 사복음서병행강해 30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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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복음 역사 | 마 4:12-22; 막 1:14-20; 눅 4:14-15; 요 4:43-45 | 문병호 목사 | 사복음서병행강해 30 | 십자가지기교회 | 주일낮예배 | 20230212



마 4:12-22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막 1:14-20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눅 4:14-15

14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요 4:43-45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녹취록>


1. 갈릴리


우리가 사시사철을 구별하는 가장 분명한 것은 낮과 밤의 길이입니다. 낮과 밤은 우리가 빛으로 요량합니다. 빛이 비추는 땅, 빛이 비취지 않는 땅, 이 땅에 우리가 살면 시골이든 대구든 서울이든 학교를 따라 사는 곳이 달라도 어느 곳이 빛이 덜하고 더하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학을 가 보니 어느 땅에는 빛이 비추는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서 빛의 소중함을 생각해 봤습니다. 본문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공생애는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각색 병을 낫게 하시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는 과정을 말하는데 공생애의 대부분 삶을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보내십니다. 특별히 여러가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병자들을 낫게 하는 많을 일들을 갈릴리 호수가 인접한 땅에서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 우리에게 가장 쉽게 와닿는 것은 여러 곳에 머물고 여러 계층의 사람을 만나신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여러 복음서를 통해 비추어 봐도 일관되게 정리하기가 어렵습니다. 나사렛에서 나시고 애굽으로 가셨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고 다시 유월절에 들르시고, 지난 주 본 말씀에서 본 것처럼 사마리아 땅에도 가십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보면 사마리아에 이틀 유한 후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나사렛에 들르십니다. 그리고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크게는 이렇게 둘러볼 수 있는데 자세하게 기행문 쓰듯 예수님의 사역 경로를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으나 실제로는 나사렛에서 계속 자라셨으니 그곳 사람이라고 봐도 되는데 그곳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십니다. 혈육이나 연고가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더욱 그렇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러 곳을 다니시면서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2-13). 세례 요한이 왕의 부정한 행위에 대해 직고를 하여 잡힌 후 예수님이 갈릴리로 올라가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은 길을 예비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예수님과 겹치거나 상대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세례 요한이 잡혀서 옥에 들어가고 곧 죽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과 스불론, 납달리 지역은 갈릴리 지역입니다. 또한 해변에 있다고 할 때, 대해는 지중해이지만, 해변을 갈릴리 호수로 읽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샤론 땅, 사마리아 서쪽은 지중해입니다. 이스라엘 땅 중 넓고 비옥한 곳이 샤론입니다. 반면 본문에서 말하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서 해변은 갈릴리 호수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갈릴리 호수는 유일무이한 수원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가버나움은 큰 도시이고 로마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백부장이 회당을 짓습니다. 가버나움에는 또한 고기가 많이 잡힙니다. 왜냐하면 물이 흘러와서 물의 속도가 줄어들면서 부유물이 쌓이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로마군대가 주둔한 것은 해변길이라고 해서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실 가장 많은 일을 하신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예루살렘은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곳입니다. 이 가버나움이 스불리, 납달리 근처의 갈릴리 호수 지경인 곳입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셨다는 것은 나사렛에서 이사 가신 것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셨다고 합니다. 이때는 문맥적으로는 세례 요한이 잡힌 때일 수도 있고, 문맥적으로는 마태복음 본문 16-17절처럼 흑암이 짙은 때로 볼 수도 있습니다. 겨울이 짙으면 봄빛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해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추운 것처럼 말입니다. 해의 온기가 느껴지는 때입니다. 



2. 빛이신 그리스도


이 말씀이 이사야 예언에 나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1-2). 이 말씀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요단의 서편으로 갈릴리에 올라가는 지역은 베뢰아 지역을 말합니다. 모두 갈릴리 지역이라고 통칭할 수 있습니다. 왜 이 땅을 이방의 갈릴리라고 했을까요? 분명 이스라엘 12지파 지역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이 지역이 가장 먼저 다른 민족과 섞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사사기 시대부터 시작됩니다. 조금 올라가면 시돈이 있고 사렙다 과부가 나오는 이세벨의 고향, 바알신을 섬기는 지역입니다. 처음부터 변방 지역인 것입니다. 어쨌거나 요는 변방으로 볼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게돈도 이 지역입니다. 싸움이 가장 빈번한 곳이 이 지역입니다. 또한 동 본문 16절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합니다. 흑암이 지나가는 것은 들었는데 주저 앉은 것은 무엇인가요. 아무 희망도 없이 흑암 속에 살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 사마리아 지역, 갈릴리 지역 등지는 흠모할 만한 지역이 아닙니다. 흑암에 앉았다고 할 때 어둠에 순응하여 길들여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두더지와 같이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기독교강요>에 나온 우리 인생은 두더지보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표현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곳에 들어간 것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참 빛, 큰 빛이 이 지역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바로 참 빛이시고 세상의 빛이시고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3-5). 요한복음 1장 4절의 말씀처럼 참 빛이 임했는데 사람들이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참 빛이 임했는데 그것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 14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빛은 우리를 살아나게 하고 눈을 뜨게 하고 길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빛이 임하면 우리가 양분을 얻습니다. 식물뿐 아니라 동물도 빛이 있어야 합니다. 



3. 빛의 역사


이 빛이 이사야서 49장 6절에 가면 이방의 빛으로 선포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이제 유대인들에게는 끝물같이 부끄러운 이름의 땅이지만 이 이름이 사실상 우리의 이름입니다. 우리가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스불론, 납달리, 그늘에 앉아 있던 소망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외인이요 나그네요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빛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사 49:6). 그래서 우리가 빛의 자녀(엡 4:5-10)이고 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엡 5:8-10)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밤은 낮과 같이 단정하게 행하여 빛 가운데 거하여야 하는 시간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이 회심한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운 이 때가 바로 주님의 빛이 임한 때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경계선이 있습니다. 가장 추운 때는 한겨울이 아니라 초겨울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한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런데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불론, 납달리, 갈릴리 땅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이사야서 말씀의 ‘큰 빛이 비취리라’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의 저자가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빛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취하여 명성을 얻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서 빛을 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이 즐겁습니다. 그래야 살 맛이 납니다. 그래야 우리가 초장에서 뛰어놉니다. 그래야 시냇가의 나무 같이 자랍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그런데 같은 장 19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가 영원한 빛이 되신다고 합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사 60:19). 이 일이 저주 받은 땅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에베소서의 이 말씀이 이런 맥락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갔던 부흥회 숙소가 부흥회 장소로부터 20분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부안 근처인데 아침에 커튼을 걷으니 빛이 환히 들어왔습니다. 그때 이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 죽어 있고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흑암에 앉아 있습니다. 주저앉아 있습니다. 모두가 세상의 거짓, 술취함, 음란함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비추시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흑암에 앉은 우리에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래서 예수가 빛이고 곧 그를 믿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빛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는 것이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의 기록입니다. 



4. 천국 복음의 때


한편 마가복음에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은 이때부터 때가 찼다고 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막 1:14) 때는 하나님의 때입니다. 한글이나 영어에는 한 단어만 있는데, 헬라어에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물리적인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의미적인 시간 구원의 시간입니다. 내가 거듭났다고 할 때 육신의 생일이 있지만 거듭난 날이 있는 것처럼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습니다. 본문은 이런 카이로스의 시간을 지칭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천국이 도래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태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삼가하여 하늘나라라는 많이 나옵니다. 누가복음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썼으므로 하나님 나라라고 직접 부릅니다. 표현이 다른 것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곧 천국이 가까워왔는데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신약의 때가 다가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시고 그것을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때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말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나라, 천국이 다가왔다는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오신 것, 복된 소식, 복음이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가 메시아고 그리스도고 샘물이고 세상의 구주임을 선포한 것이 복음입니다. 



5. 사람을 낚는 어부


이 복음을 예수님이 스스로 증거하시고 그리고 그 복음을 본문을 통해 본 것처럼 제자들을 통해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전하시고 제자들을 세워 전하는데 베드로, 안드레,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 요한이 그들입니다. 예수님도 친히 전하시지만 이들을 세워서 전하는 것은 때가 차서 하나님의 전할 말씀을 제자들이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네 제자를 세우는 것은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다 나오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어도 요지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원어대로 보면 ’사람 어부‘인데 세상에 이런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쓰신 이 단어는 사실상 생업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생업 가운데 예수님이 제자를 세우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계획하고 행하는 것은 곧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이 아버지와 품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갑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 이것이 우리 십자가지기교회의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밤의 일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주님을 따르며 예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