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온전하심으로 온전함 | 마 5:33-48; 눅 6:27-36 | 문병호 목사 | 202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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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6.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36


아버지의 온전하심으로 온전함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 5:33-48; 누가복음 6:27-36

33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2)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3-48).

27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27-36).




녹취록


1. "하나님의 앞에서"(coram Deo) 맹세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여러 교훈을 얻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리라고 합니다. 교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말씀의 진리를 체계적이고 고백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교리, 또 우리가 서 있는 선배들의 신앙, 교훈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코람데오'라는 말입니다. '코람'(coram)은 '앞에서, 면전(얼굴 앞)에서, 안전(눈앞)에서', 즉 현존을 뜻합니다. '데오'(Deo)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래서 코람데오는 '하나님 면전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앞에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가 듣고, 여호와께 여쭙니다. 저는 여러 일을 겪을 때 성경을 읽는 버릇이 있습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히브리서를 읽고, 교회에 관한 일이 있으면 고린도서를 읽고, 특별히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다윗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말씀을 읽고, 주야로 묵상하고, 여호와께 여쭙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말씀을 읽고, 어떤 일이 생기면, 우리의 연약함, 곤고함 등이 있을 때, 여호와께 여쭙는 것입니다. 이것이 코람데오입니다. 여호와께 여쭙는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듣는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에 대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칭찬하는 것이 다윗의 지혜입니다. 솔로문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일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했는데,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 같고, 더 정확하게 지키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고,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경하게 여기면 하늘에서도 경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도 경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산상복음의 가르침은 팔복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복 가운데, 심령이 가난하고, 긍휼을 구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명령이 큰 만큼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이 신약시대임을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맹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맹세는 미래에 속한 것을 현재를 조건으로하는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헛맹세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맹세는 코람데오, 하나님의 면전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체적으로 맹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속하고 현재에 계시며 미래는 의문부호로 남아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보시고, 함께 다스리시고, 과거, 현재, 미래 가운데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지만, 하나님은 처음이요 끝이요, 알파와 오메가이시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시기에, 우리가 하나님 품 속에 있는, 하나님 앞에 서는, 하나님께 여쭙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이미 영원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자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께 예 하고 아니요 하는 것이 맹세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이 없이, 그가 살아 계심이 없이, 그의 현존 가운데 있지 않으면서 맹세하는 것은 전부 헛맹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자가 자기 공로, 자질, 성격, 성품을 의지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확실히 약속해라고 하는 것은 다 헛맹세이고 거짓 맹세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망령되게'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고, 환난날에 찾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애통하며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이 이름을 자주 입에 올리는데 그저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여호와를 찾으면 그것은 여호와를 참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길 이끄시길 지시하고 이루시길 간절히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헛맹세 하지 말고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고 이야기할 때 이것은 나나 기타 다른 사물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가운데 한 약속이 헛맹세이자 거짓 맹세이고 무능한 맹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먼저 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말하고 친구한테도 말하며 확신하고 허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만이 맹세를 지키게 하신다


     진정한 맹세는 성경에서 서원이라고 합니다. 서원은 이미 미래의 일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이루셨음을 믿고 지금 감사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시고 이루심에 대한 맹세입니다. 우리가 안수 받고 직분을 받는 것이 서원입니다. 내가 끝까지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인 치시고 마지막까지 이끌어가시는 견인에 대한 신앙고백이 서원이고 맹세입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안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맹세는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적 맹세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헛된 맹세와 무능하고 인간적인 맹세를 의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 23:21-23). 자원한 예물은 입으로 정한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현존 가운데 우리가 삽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약속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것을 우리가 헤아립니다.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갔는데 비슷한 돌만 주워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바로 서고 현존 가운데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심을 믿고 그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지경이 넓어지고 우리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입니다.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달란트 선물을 주신 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애써야 합니다. 나는 못한다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고르반 하고 여기까지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의 무능과 연약함을 내어 놓고 오직 은혜, 코람데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과 현존 가운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맹세입니다. 이 전체가 맹세입니다. 어느 한 마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이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성입니다. 그리고 내 머리로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우리가 희고 검게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머리카락 붙들고 건물 보고 하늘과 땅 보고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닌 여호와를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예수님의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과 모순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금지한 맹세는 심리적인 맹세입니다. 복음적인 맹세, 십자가를 붙드는 맹세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사용하시면 종이 하겠나이다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맹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히 6:13-16). 하나님이 맹세의 최후 확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을 찾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민수기의 축복기도처럼 이 기도를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만물의 여호와의 얼굴빛이 비취는 것을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그 빛에 비추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나머지는 일순간 좋아보여도 곧 썩어 버립니다. 곧 악취가 납니다. 일순간 좋아보여도 그 끝이 나를 짓누릅니다. 다이아몬드라고 갖다 놨는데 그것이 내 머리에 떨어지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면전에서 옳다 혹은 아니라를 정확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의 예의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아멘 할 수 있고 옳다라고 할 수 있고 그리 되었나이다, 다 이루었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옳은 것, 완전한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이 옳다, 예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예수를 부여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우리를 꾀더나, 세상에서는 무력해 보이나 우리에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여호와의 현존, 코람데오 가운데 서라는 것입니다.



3. 복수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본문이 깁니다. 이것을 어떻게 묶을까 하다가 '여호와의 면전에서'로 보았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는 말이 구약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것을 동해보복이라고 법에서 칭하기도 합니다. 같은 해를 가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짐승을 죽인 자는 짐승을 죽이거나 값을 주거나, 생명은 생명으로 갚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은 눈, 이는 이로 갚으라고 성경에서 봤는데 어찌 주님이 39절 이하에 그러지 말라고 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구약이 틀린 것이 아니라 구약의 형벌, 동해보복법은 형법, 재판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적인 공정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용서나 하나님의 이웃을 사랑하는 명령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고대는 작은 일로도 전쟁이 나고 죽음이 일어나고 하는 무한 보복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직 그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귀한 말씀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 24:29). 우리 성도들도 '두고 보자', '최소한 나도 그만큼은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우리가 죽여야 합니다. 악순환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행한 것 같이 나도 행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형벌은 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칼을 든 자라고 했습니다. 죄에 대해 보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저주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우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집에 온 강도를 그대로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보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우리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욕을 당하되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되 위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갚으면 상급이 없습니다. 꾹 참아야 합니다. 용서에는 끝이 없습니다. 용서를 아무리 해도 우리가 받은 용서만큼 안됩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면 물을 먹이고 주리면 먹이라고 했습니다. 진정 원수를 벌하기 원한다면 그를 먹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복수라고 합니다. 내가 갚지 않아야 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원수가 오면 참아야 합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그렇게 바보같이 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끝까지 당해야 합니다. 끝까지 당해야 합니다. 왜요, 코람데오,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면 상급이 없습니다.



4. 본질적 가치를 위하여 비본질적인 것에 희생을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대라고 했습니다. 제가 본 잘된 주석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견딜 수 없다고 합니다. 분노가 생기고 원수 갚을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왼 뺨까지 맞으면 좌절하거나 혈기로 갚거나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왼 뺨까지 맞으라고 한 것이라고 한 주석을 보았습니다. 이런 주석은 처음 봤습니다. 직장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왼 뺨도 아예 갖다 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런 불의한 것, 부정한 것들에 대해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에게 지지 않고 악에게 지지 않으려면 아예 우리를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삶이 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돌을 던지고 정의를 찾는 것, 내가 판단하면 악순환이 된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왜 그렇게 많이 순교했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그들이 판단을 못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 보면 오른 뺨 맞을 때 가장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왼 뺨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막아 주시기도 하고 하나님이 갚아 주시기도 합니다.

     속옷을 가지려 하면 겉옷을 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속옷은 그리 비싼 옷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겉옷은 광야에서 밤에 이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니가 신명기나 출애굽기를 보면 겉옷을 저당잡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합니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도 가지게 하라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주석된 것입니다. 내가 속옷을 뺏겼는데 겉옷까지 빼앗기면 나는 못참는다고 하는 그 때 내 성격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히 10:33).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눈 앞의 것을 보게 마련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소경 바디매오가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을 들어갈 때 겉옷을 던져 두고 발을 내딛게 합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두었을 때 누가 주워 가면 어쩔건가요. 그런데 겉옷을 두고 예수를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최고 지고한 가치가 없으면 속옷, 겉옷에 좌절합니다. 겉옷을 빼앗겨도 우리에게 예수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속옷을 달라거든 겉옷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꽃도 피게 하시고 열매도 맺게 하십니다. 나의 나된 것이 지금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부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에 내 본질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본질은 생명입니다. 우리 본질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혼을 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를 동행하라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이것은 오리를 걸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재판을 해서 짐꾼을 오 리, 1마일 정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복되게도 하시고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죄에 지면 안 됩니다. 주변의 여건에 압도당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이고 십자가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꾸고자 하는 자에게 주라는 말씀은 구약에 계속 나옵니다. 꾸어주는데 이자를 받지 않으며, 가난한 자가 있으면 같이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나 양식을 꾸어 주지 말고 그냥 주라고 합니다.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레 25:37). 이 말씀을 하시면서 딱 한마디를 하십니다. 애굽에서 이끌어내면서 가나안 땅을 주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었는데 어찌 소유 몇 가지를 못 나눠 주냐는 말입니다. 



5.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원수를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본문 후반부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는 말에서 제사장들은 레위기의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고 한 말을 뺍니다. 선대하라는 것은 사랑을 베풀라는 말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고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마음으로도 사랑하되 사랑하는 일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일을 베풀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무조건 아멘 하십시오. 그래야 언약의 복을 누립니다. 처음부터 아니라고 닫아 놓으면 지경이 안 넓어집니다.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를 어떻게 축복합니까. 지난 주에 라가라 하고 미련하다 하면 지옥불에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을 들었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 안됩니까? 어렵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자를 입양했습니다. 손 목사님이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입니까. 그가 했으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할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 할 때 우상 섬기지 못한다고 감옥에 계셨고 한국전쟁 때는 끝까지 나환자들과 함께 하다가 총에 맞아 죽은 손양원 목사님이 자식 둘을 죽인 그 아들을 입양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게 기독교라 생각합니다. 이게 예수의 자녀된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내 마음으로, 내 성정으로, 성품으로는 안됩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예수님도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시고 죄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용서할 때 우리가 화평이 있고 지경이 넓어집니다. 박해하는 자, 해꼬지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다 잘라버리는 것은 죄인과 세리도 한다고 나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판 자들입니다. 먼저 자기 자리를 사려고 뇌물을 로마 관리에게 주는데 그 돈을 보전해야 하니 많은 세금으로 착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리입니다. 그러니 세리들도 이자 받고는 꾸어준다는 것입니다. 죄인들도 죄인들에게 받을 줄 알고 빌려주는데 너희들이 그렇게 한다면 죄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받았으니 그들에게 사랑을 먼저 베푸는 것이, 사랑을 받은 자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이것이 본문의 결론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듯 우리도 사랑을 베푸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코람데오가 아니면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판단의 도구로 삼게 됩니다. 성경을 저주의 도구로 삼게 됩니다. 성경을 내 의의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므로 우리도 그 은혜를 받아 나를 온전하게 세우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의 말씀처럼 성경이 완전한 자로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완전한 자로 세웁니다. 그 은혜가 있으니 우리가 완전한 자가 되고 이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면 손양원 목사님처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함과 같이 우리도 온전하고 자비로워지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우리가 용서하고 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하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당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판단하지 말고 용서하고 보듬고 서로 진정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과 같이 우리를 그 자비로움으로 자비롭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우리도 거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은혜 베푸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구약의 완전함은 아직 기다리는 것, 소망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취된 시대를 삽니다. 주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아버지의 완전함과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약 백성에 대한 헌장으로 본문이 제시된 것입니다. 그 완전함 가운데 우리가 누리는 것, 빛이 임하면 빛을 비추듯, 잘 누리는 것,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들, 어려운 것, 힘든 것, 내가 이것은 못 참겠다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