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26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6 | 나의 사랑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 | 요 15:9-17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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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26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6
나의 사랑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은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난 지지난주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신 말씀을 살피며,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의 사랑”과 “나의 기쁨”을 미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평안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와 같이 동사형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평안과 사랑과 기쁨의 주체가 나 자신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는 주어가 달라집니다. 내가 스스로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와 사랑할 대상, 감사할 조건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요소들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곧 평안이시며 사랑이시고 기쁨이십니다. 봄이 되어 만물이 자라날 때 우리는 “꽃이 핀다”, “식물이 자란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꽃을 피우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도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우리는 그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은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는 “나의 평안”이, 15장에는 “나의 사랑”과 “나의 기쁨”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들이 이어지는 14장부터 16장까지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중심을 이룹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이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앞서 살핀 것처럼 “평안을 끼친다”는 것은 나누어 주고, 허락하며, 함께 누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평안 자체이신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때 그분의 평안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이루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따로 기쁨이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곧 그것이십니다. 주님은 어떤 조건이나 근거로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며, 기쁨은 카라입니다. 이 기쁨은 무엇을 더 얻거나 이루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쁨이시기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자연스럽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랑을 받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받는 것조차 우리의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이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한 번 임하신 그분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붙잡아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지는 은혜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적게 받는 것도 아니고, 강하다고 해서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모든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 역시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언제나 완전한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프린스턴과 뉴욕에서 본 진리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물
이번에 여러분의 기도로 뉴욕에 처음 가 보았습니다. 그곳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중학교 때 이곳을 왔더라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에 이런 세계를 경험했다면, 이후의 시간 속에서 더 넓은 시야를 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쳤습니다.
예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넓은 도로와 큰 건물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 보니, 그 도시마저도 작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 와서 63빌딩을 보고 감탄하고, 남산터널을 보며 “어떻게 산 아래에 이런 길을 냈을까”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60층, 70층 높이의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규모조차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높이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한국칼빈-개혁신학연구소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작은 지하 공간이지만, 제 마음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밤이 깊도록 강의가 이어지고, 많은 이들이 성경을 깊이 있게 배우는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거대한 건물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런 소망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그런데 뉴욕의 높은 빌딩보다 더 깊은 인상을 준 곳은 프린스턴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큰 도시를 떠올렸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마치 시골 마을처럼 고즈넉했고, 과거 부흥운동의 흔적과 숲속에서 이루어졌던 신앙과 학문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웨스트민스터를 갈까 고민하다가, 찰스 하지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가르쳤던 장소를 직접 보고 싶어 전철과 기차를 타고 프린스턴으로 향했습니다.
UCLA를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UCLA가 규모와 활기를 드러낸다면, 프린스턴은 깊은 침묵과 여유를 품고 있었습니다. 작은 식당조차 그 분위기에 어울렸고, 터널을 지나 도착하는 기차 역시 한적한 정취를 더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은 작고 조용한 자리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결국 뉴욕과 같은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 내는구나. 진리와 배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에서 이루어진 공부가 결국 큰 건물과 문명을 세워 간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일본의 한 장군이 진주만 공격 전 미국을 둘러보고 “이 나라와는 싸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직접 그 땅을 보며, 그 힘과 자원, 그리고 축적된 역량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에서는 뜻밖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엘시 앤 매키 교수를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라틴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으로서, 예전에 고신대학교에서 함께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안내를 받으며 그의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던 중, 정말로 그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 잠시 재단 일로 방문했다고 했고, 짧은 대화 끝에 함께 사진을 남겼습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찰스 하지의 자취를 떠올렸습니다. 그의 『조직신학』은 미국 신학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단을 넘어 널리 읽히는 중요한 저작입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1812년 아치볼드 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졌고, 이후 찰스 하지와 그의 아들 A.A. 하지, 그리고 B.B. 워필드로 이어지며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특히 워필드는 미국 보수신학을 지켜 낸 중요한 인물입니다.
칸트 이후 서구 신학이 흔들리던 시기에, 프린스턴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바탕으로 다시 신학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분이 주시는 지식 안에서 공통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는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넘어서, 경건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길을 강조한 것이며, 그 뿌리는 칼빈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프린스턴을 둘러본 후 맨해튼으로 돌아와 타임스퀘어에 잠시 섰을 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프린스턴이 있기에 뉴욕이 있다.” 진리 위에 세워진 토대가 있기에 이런 거대한 문명도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비록 작은 등대처럼 보일지라도, 큰 배들이 방향을 찾는 역할을 하기를 늘 기도합니다.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면산 자락의 작은 공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었고,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가능하고, 진리가 있기에 문명이 세워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LA와 시카고, 그랜드래피즈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서부에서 중부를 거쳐 동부로 이어지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이번에 동부를 보며, 청교도 신앙이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떠올랐습니다. 매사추세츠와 뉴욕, 옛 뉴암스테르담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뉴욕 역시 그분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온전히 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것을 가르칩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본문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행 중에 요한복음 1장부터 14장까지 계속 읽었는데, 그 안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사랑, 앎, 그리고 거함입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또한 부활과 심판의 주제도 함께 흐르며, 믿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은혜로 드러나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흐름을 보며, 요한이 왜 신학자로 불리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은 먼저 하나 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둘째로, 이 사랑은 낳는 사랑입니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신 독생자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입니다.
셋째로, 이 사랑은 존재를 새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소유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세상 많은 일은 소유의 문제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명령이라기보다,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초청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하라”는 것은 먼저 사랑을 주시고 그 안에 머물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빛이 방 안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밝음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도 이와 같습니다. 주어지는 순간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아버지께 생명이 있듯이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눈물을 흘리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을 보고 놀랐습니다. 주님은 단지 감정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대속물로, 희생제물로, 화목제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 사랑을 계속 나누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을 누리는 일입니다. 사랑을 누리는 것이 곧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면 밝음이 드러나듯이, 사랑을 누리면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15장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계명은 사랑과 분리된 요구가 아니라,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천사는 지음을 받았지만, 우리는 낳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로서 그 사랑을 누리는 삶입니다. 집안의 자녀가 그 집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자녀답게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도 받은 사랑을 누릴 때 그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사랑과 순종을 함께 말합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참으로 사랑을 누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계명의 핵심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 내는 조건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우리가 먼저 지켜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을 누리기 때문에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랑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은혜 밖에서 따로 무엇을 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쉼을 약속하시면서 동시에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그 멍에는 억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결국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면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며, 넘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명 자체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억압의 법이 아니라 언약의 법이며,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말하는 “마침”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을 뜻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4.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는 은혜
오늘 13절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는 있어도, 그를 대신하여 생명을 내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휘페르'로, 경우에 따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바로 그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의 희생은 어디까지나 ‘위함’에 머물지만, 주님의 사랑은 ‘대신함’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내 대신에.” 이 가운데 마지막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실제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놓을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수많은 비극의 현장에서 부모들이 먼저 나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계명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까지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친히 이루십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기도입니다.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이 고백은 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결국 가능한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피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마음껏 명령하시옵소서. 다만 그 명령을 이루실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계명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6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 말씀은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심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열매는 앞서 말한 기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삶 자체가 열매입니다.
이어지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그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할 수 없기에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기도와 같은 흐름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루시옵소서.”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도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능력입니다. 특별한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은혜를 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며, 동시에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구하여 얻는 것만이 하늘의 상급이 되고, 그 상급마저도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고, 능력의 영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함께하심의 은혜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은 진리의 내주를,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는 약속은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이한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을 받는 것이 참된 능력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낍니다. 마노아처럼, 이사야처럼, 예레미야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십니다.
여기서 친구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명령까지 맡기십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명령하시고, 그 일을 은혜로 이루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고백은 교만도 아니고 포기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친구로 부름받은 자의 길입니다.
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아가페의 도구로 부름 받았습니다
사랑의 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고린도전서 13장을 떠올립니다. 이 장은 은사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설명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을 실제로 사용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은사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사용될 때 비로소 은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요한일서 4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21절까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을 중심으로 사랑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먼저 읽고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먼저 받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인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수가 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생수이신 것처럼, 사랑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말씀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부모를 아는 자가 부모의 사랑을 누리듯,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빛을 누리면 빛을 비추며, 향기를 맡으면 향을 드러내게 됩니다.
셋째, 이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시는 사랑이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이며, 성령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삼위 하나님께 속한 사랑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고 멀리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 사랑은 위에서 내려오는 사랑이며, 먼저 시작된 사랑이고, 끝까지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곧 존재를 새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택하신 사랑 안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들으심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 안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프리즘을 통해 빛이 나뉘어 아름다운 색을 드러내듯,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도 주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꽃이 피는 계절을 보며 자연이 스스로 피어난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피우신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이 복되고, 풍성해지며, 더욱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6년 04월 26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6
나의 사랑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녹취록
1.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은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지난 지지난주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신 말씀을 살피며,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의 사랑”과 “나의 기쁨”을 미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평안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와 같이 동사형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평안과 사랑과 기쁨의 주체가 나 자신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는 주어가 달라집니다. 내가 스스로 평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평안을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뻐할 이유와 사랑할 대상, 감사할 조건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요소들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곧 평안이시며 사랑이시고 기쁨이십니다. 봄이 되어 만물이 자라날 때 우리는 “꽃이 핀다”, “식물이 자란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시선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꽃을 피우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도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우리는 그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은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는 “나의 평안”이, 15장에는 “나의 사랑”과 “나의 기쁨”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들이 이어지는 14장부터 16장까지는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이 중심을 이룹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이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앞서 살핀 것처럼 “평안을 끼친다”는 것은 나누어 주고, 허락하며, 함께 누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는 평안 자체이신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할 때 그분의 평안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모든 것의 근원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이루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따로 기쁨이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곧 그것이십니다. 주님은 어떤 조건이나 근거로 평안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며,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이며, 기쁨은 카라입니다. 이 기쁨은 무엇을 더 얻거나 이루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쁨이시기에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자연스럽게 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사랑을 받으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받는 것조차 우리의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이끄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한 번 임하신 그분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십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붙잡아 얻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지는 은혜는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적게 받는 것도 아니고, 강하다고 해서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모든 성도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 역시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은 언제나 완전한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도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여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2. 프린스턴과 뉴욕에서 본 진리의 능력과 하나님의 선물
이번에 여러분의 기도로 뉴욕에 처음 가 보았습니다. 그곳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중학교 때 이곳을 왔더라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에 이런 세계를 경험했다면, 이후의 시간 속에서 더 넓은 시야를 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쳤습니다.
예전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넓은 도로와 큰 건물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 보니, 그 도시마저도 작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 와서 63빌딩을 보고 감탄하고, 남산터널을 보며 “어떻게 산 아래에 이런 길을 냈을까”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60층, 70층 높이의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 규모조차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높이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한국칼빈-개혁신학연구소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작은 지하 공간이지만, 제 마음에는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을 허락해 주십시오. 밤이 깊도록 강의가 이어지고, 많은 이들이 성경을 깊이 있게 배우는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거대한 건물을 보면서도 오히려 그런 소망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그런데 뉴욕의 높은 빌딩보다 더 깊은 인상을 준 곳은 프린스턴이었습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큰 도시를 떠올렸지만, 실제로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마치 시골 마을처럼 고즈넉했고, 과거 부흥운동의 흔적과 숲속에서 이루어졌던 신앙과 학문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웨스트민스터를 갈까 고민하다가, 찰스 하지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가르쳤던 장소를 직접 보고 싶어 전철과 기차를 타고 프린스턴으로 향했습니다.
UCLA를 방문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UCLA가 규모와 활기를 드러낸다면, 프린스턴은 깊은 침묵과 여유를 품고 있었습니다. 작은 식당조차 그 분위기에 어울렸고, 터널을 지나 도착하는 기차 역시 한적한 정취를 더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은 작고 조용한 자리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결국 뉴욕과 같은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 내는구나. 진리와 배움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두막에서 이루어진 공부가 결국 큰 건물과 문명을 세워 간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저력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예전에 일본의 한 장군이 진주만 공격 전 미국을 둘러보고 “이 나라와는 싸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직접 그 땅을 보며, 그 힘과 자원, 그리고 축적된 역량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프린스턴에서는 뜻밖의 만남도 있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엘시 앤 매키 교수를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라틴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으로서, 예전에 고신대학교에서 함께 발표한 적도 있었습니다. 안내를 받으며 그의 이야기를 하고 지나가던 중, 정말로 그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 잠시 재단 일로 방문했다고 했고, 짧은 대화 끝에 함께 사진을 남겼습니다. 의미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 찰스 하지의 자취를 떠올렸습니다. 그의 『조직신학』은 미국 신학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단을 넘어 널리 읽히는 중요한 저작입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1812년 아치볼드 알렉산더에 의해 세워졌고, 이후 찰스 하지와 그의 아들 A.A. 하지, 그리고 B.B. 워필드로 이어지며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특히 워필드는 미국 보수신학을 지켜 낸 중요한 인물입니다.
칸트 이후 서구 신학이 흔들리던 시기에, 프린스턴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바탕으로 다시 신학의 토대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분이 주시는 지식 안에서 공통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이는 회의론과 불가지론을 넘어서, 경건한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길을 강조한 것이며, 그 뿌리는 칼빈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프린스턴을 둘러본 후 맨해튼으로 돌아와 타임스퀘어에 잠시 섰을 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프린스턴이 있기에 뉴욕이 있다.” 진리 위에 세워진 토대가 있기에 이런 거대한 문명도 존재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비록 작은 등대처럼 보일지라도, 큰 배들이 방향을 찾는 역할을 하기를 늘 기도합니다. 연구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면산 자락의 작은 공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었고,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가능하고, 진리가 있기에 문명이 세워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LA와 시카고, 그랜드래피즈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습니다. 서부에서 중부를 거쳐 동부로 이어지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이번에 동부를 보며, 청교도 신앙이 이 지역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떠올랐습니다. 매사추세츠와 뉴욕, 옛 뉴암스테르담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다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뉴욕 역시 그분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그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온전히 하시고 풍성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것을 가르칩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본문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행 중에 요한복음 1장부터 14장까지 계속 읽었는데, 그 안에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 사랑, 앎, 그리고 거함입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계속 이어집니다. 또한 부활과 심판의 주제도 함께 흐르며, 믿는 이들에게는 심판이 은혜로 드러나 결국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이 모든 흐름을 보며, 요한이 왜 신학자로 불리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은 먼저 하나 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사랑 안에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둘째로, 이 사랑은 낳는 사랑입니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에게서 나신 독생자이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시는 사랑입니다.
셋째로, 이 사랑은 존재를 새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소유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달라지는 일입니다. 세상 많은 일은 소유의 문제에 머물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은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명령이라기보다,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초청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거하라”는 것은 먼저 사랑을 주시고 그 안에 머물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빛이 방 안에 들어오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밝음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도 이와 같습니다. 주어지는 순간 피할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아버지께 생명이 있듯이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는 것은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때 눈물을 흘리셨고, 사람들은 그 사랑을 보고 놀랐습니다. 주님은 단지 감정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대속물로, 희생제물로, 화목제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 사랑을 계속 나누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사랑을 누리는 일입니다. 사랑을 누리는 것이 곧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빛을 누리면 밝음이 드러나듯이, 사랑을 누리면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15장 10절에서는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계명은 사랑과 분리된 요구가 아니라,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천사는 지음을 받았지만, 우리는 낳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녀로서 그 사랑을 누리는 삶입니다. 집안의 자녀가 그 집의 사랑과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자녀답게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도 받은 사랑을 누릴 때 그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사랑과 순종을 함께 말합니다. 사랑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참으로 사랑을 누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사랑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계명의 핵심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 힘으로 이루어 내는 조건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주어진 약속입니다. 우리가 먼저 지켜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을 누리기 때문에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랑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갑니다. 은혜 밖에서 따로 무엇을 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쉼을 약속하시면서 동시에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그 멍에는 억압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누리는 삶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도 결국 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누리지 못한다면 증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며, 넘치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명 자체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억압의 법이 아니라 언약의 법이며, 은혜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서 말하는 “마침”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을 뜻합니다. 결국 주님의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4.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는 은혜
오늘 13절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는 있어도, 그를 대신하여 생명을 내어 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위하여”라는 말은 헬라어 '휘페르'로, 경우에 따라 “대신하여”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디도서 2장 14절에서는 바로 그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리의 희생은 어디까지나 ‘위함’에 머물지만, 주님의 사랑은 ‘대신함’으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날 위하여”, “내 대신에.” 이 가운데 마지막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실제로 그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생명을 내놓을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수많은 비극의 현장에서 부모들이 먼저 나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 계명의 본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까지 명령하시고, 그 명령을 친히 이루십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기도입니다.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이 고백은 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은혜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결국 가능한 것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피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마음껏 명령하시옵소서. 다만 그 명령을 이루실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계명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6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 말씀은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시작도 하나님이시고, 이루심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열매는 앞서 말한 기쁨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삶 자체가 열매입니다.
이어지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그 방법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할 수 없기에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기도와 같은 흐름입니다. “주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루시옵소서.”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도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능력입니다. 특별한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은혜를 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며, 동시에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구하여 얻는 것만이 하늘의 상급이 되고, 그 상급마저도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고, 능력의 영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은 함께하심의 은혜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은 진리의 내주를, “구하라 그러면 이루리라”는 약속은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이한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응답을 받는 것이 참된 능력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모두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낍니다. 마노아처럼, 이사야처럼, 예레미야처럼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 부르십니다.
여기서 친구란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명령까지 맡기십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명령하시고, 그 일을 은혜로 이루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고백은 교만도 아니고 포기도 아닙니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친구로 부름받은 자의 길입니다.
5.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아가페의 도구로 부름 받았습니다
사랑의 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고린도전서 13장을 떠올립니다. 이 장은 은사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설명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사랑을 실제로 사용하는 삶을 강조합니다. 은사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사용될 때 비로소 은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근원을 이해하려면 요한일서 4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21절까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을 중심으로 사랑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먼저 읽고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먼저 받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로 인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 한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생수가 우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생수이신 것처럼, 사랑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말씀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부모를 아는 자가 부모의 사랑을 누리듯,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은혜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빛을 누리면 빛을 비추며, 향기를 맡으면 향을 드러내게 됩니다.
셋째, 이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내어 주시는 사랑이시고, 아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랑이며, 성령은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시는 분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아가페는 삼위 하나님께 속한 사랑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20절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외면하고 멀리했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 사랑은 위에서 내려오는 사랑이며, 먼저 시작된 사랑이고, 끝까지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조건이 없고 변함이 없으며,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 곧 존재를 새롭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택하신 사랑 안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들으심을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 안에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관점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사랑하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프리즘을 통해 빛이 나뉘어 아름다운 색을 드러내듯,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도 주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꽃이 피는 계절을 보며 자연이 스스로 피어난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께서 피우신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이 복되고, 풍성해지며, 더욱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