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7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7 |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 | 요 15:18-27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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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7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7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5:18-27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2]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녹취록




1. 주의 빛 안에서 생명을 보는 백성

이제 우리가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 주일 두 주간의 말씀을 지나 다시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은 주께서 잡히시던 밤 마가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가르치신 말씀인데, 그 중심 주제는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부어 주시는 보혜사 성령입니다. 그리고 17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도 전체적으로 보혜사 성령에 대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에 눈부신 잎이 나고, 아름다운 꽃이 피고, 신령하고 싱그러운 열매가 맺히는 것은 포도나무와 가지가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잘라서 동여매야 하고, 새 살이 붙으면 한 몸이 되고 한 나무가 됩니다. 마디마다 양분이 통하고 수분이 통하여 싹도 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습니다.
이 계절은 창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눈부신 5월입니다. 달콤한 공기가 있고, 향긋한 바람이 불고, 생명의 대화가 만유 가운데 가득합니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운행하시고, 조화롭게 지키시고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생명의 기운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나님은 생기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호흡으로 만물을 붙드십니다. 시편 33편 6절은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늘과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입 기운, 생명의 호흡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편 65편 11절과 12절은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은택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면류관을 씌우신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이렇다면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시편 33편 13절에서 15절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시고,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며,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고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시고 굽어살피십니다.
무엇보다 시편 33편 11절과 12절은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자연을 보면서 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때가 더 빛난다고 할 수 없이, 언제나 찬란하고 아름답고 귀하며, 하나님은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모여 사는 교회와 함께, 자연을 통하여 우리로 호흡하게 하시고 자라가게 하시고 맛을 보게 하시고 향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십니다. 시편 33편 18절과 19절은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47편 11절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시며, 영육 간에 온전히 우리를 낫게 하십니다.
우리는 선택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빛을 받았습니다. 시편 36편 9절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빛이 우리에게 와 닿아서 우리가 빛을 봅니다. 주님도 요한복음 9장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이 복이 있는 것은, 그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가 그 빛 안에서 살며, 그 빛을 보고 비추며, 그 빛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인자를 강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봄이 버겁다고도 말합니다. 가장 빛나는 때가 오히려 가장 어렵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시편 68편 19절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사무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고, 은혜 외에는 영속되지 않으며, 은혜 외에는 불변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어로 삼아야 찬송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을 주어로 삼아야 내일 아침이 소망 가운데 기다려집니다. 나를 주어로 삼으면 갈수록 피폐해지고 연약해지며 실족거리가 많아지지만, 하나님을 주어로 삼으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2. 극상품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가지

포도나무와 가지가 서로 붙고, 접붙임을 받아 새 살이 붙으면 새 생명이 됩니다. 이사야 5장에는 하나님께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극상품 포도나무처럼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은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는 순수하고 탐스럽지만, 들포도는 모양은 있어도 맛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꾸미고 요철을 내고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순수한 모습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때가 차고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붙들려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평화와 기쁨과 사랑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과 15장에서 반복해서 본 세 단어가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 주님의 기쁨,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사형으로 써야 합니다. 주님은 단지 평안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평안을 끼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고 하시기 전에 기쁨을 주십니다. 사랑하라고 하시기 전에 원천적인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비추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안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이 임하면 그 사랑은 불과 같고, 그 빛으로 우리를 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의 평안,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기쁨이 나무의 물관과 체관을 통하여 양분과 수분이 흐르듯 우리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시절을 좇아 가지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이,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가가서 접붙임을 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나무에게서 가지에게로 주어집니다. 포도나무 되시는, 극상품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택함 받은 백성은 그저 생명을 연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을 내고, 향기를 내고, 맛을 내며,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습니다. 과거는 감사의 영역이요, 현재는 은혜의 영역이요,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원초적이고 원천적인 빛이 있기 때문에 참빛이라고 합니다. 그 참빛은 우리에게 비추는 빛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음성이 들렸고, 변화산에서도 주님의 얼굴에 광채가 있었습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접붙임을 받은 것은 우리가 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십니다. 계절은 속이지 않습니다. 때가 되면 비가 오고, 안 올 것 같아도 봄은 오고, 안 올 것 같아도 가을은 옵니다. 만물을 먹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이고 신령한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여 얻는 것만이 우리에게 기름진 것이요, 신령한 것이요, 영적인 것이요, 영생에 속한 것이요, 상급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며, 모든 것을 주께 구하여 얻는 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은 보혜사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부어 주시는 그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이 우리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 있고, 그가 우리 안에 계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3. 보혜사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된 삶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가 다락방의 말씀 전체 가운데,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첫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한 위인이 아니라, 아버지 품속에 영원히 독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단순히 훌륭한 인물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고, 예수를 믿고, 예수만 자랑하고, 예수만 알고,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 그것이 예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옛 나무에 붙어 있을 때는 모양만 있고 맛도 없고 양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잘려서 원 포도나무, 극상품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믿음의 비밀, 경건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주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주어로 너무 들뜨지도 말고, 내가 주어로 너무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십니다.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가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서를 읽고, 그 복음서의 은혜를 누리는 사도행전을 읽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다 이루신 것을 신약시대 성도들이 누리는 모습입니다. 누리니까 베풀고, 사랑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기도하기에 힘쓰고, 있는 것 없는 것을 서로 나누는 일이 일어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니 예수를 전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버지를 전하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며, 예수께 얻는 것이 아버지께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포도나무를 통하여 가지에게 주십니다. 농부는 성부시요, 포도나무는 성자시요, 그 포도나무에서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역사가 바로 보혜사 성령의 역사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5절은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구원 얻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포도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농부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그들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시편 65편의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라는 표현은, 성취의 시대에 기름 부음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표지였지만, 성취의 시대에는 기름 부음 받으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의 앞부분에는 주와 함께 핍박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이 있지만, 본질적인 중심은 요한복음 15장 26절과 27절에 있습니다. 성부가 성자 안에 계시고, 우리가 성자 안에 있으며, 성자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무가 가지를 알고, 양이 목자를 알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습니다. 가지가 제대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붙어서 많은 것을 누려야 합니다. 꽃보다 천 배, 만 배, 수만 배 누리는 것이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성도는 영적 유익을 누립니다. 예배는 양분과 수분이 통하는 것이고, 기도도 양분과 수분이 통하는 것이며, 헌신도 양분과 수분이 통하는 것입니다.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백에서 자라가고, 믿음에서 자라가고, 말씀에서 자라가고, 헌신에서 자라가고, 기도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지상에서 성도의 마땅함은 자라감입니다.


4. 진리의 성령과 예수 중심의 신앙

성도는 붙어 있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서 끌어당기는 존재입니다. 생화는 끌어당기고, 조화는 붙어 있기만 합니다. 생화는 양분을 끌어당기고 수분을 끌어당깁니다. 조화는 붙어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성도도 단지 붙어 있는 성도가 아니라, 한 몸이 되어 끌어당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작은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기도도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부르시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 있으니 들으러 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포도나무가 가지를 택한 것입니다. 그 끌어당김이 사실상 기도입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의 영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계시며, 영원히,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마태복음 28장 20절, 요한복음 14장 16절과 17절의 말씀처럼, 보혜사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며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6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열매가 항상 있게 하시고, 우리가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받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구하게 하셔서 베푸시고, 그리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하여 얻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먼저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이 구하기를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 준비해 놓고 주듯이,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보혜사 성령이 진리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계신 것을 알며, 우리가 그 안에 있고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을 압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받은 대로 기도하여 구하여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 곧 아버지의 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에는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신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자 아들의 영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시며 아들의 영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받은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물관과 체관으로 양분이 흐르듯이,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와 공로와 값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며, 예수님이 순종하셔서 우리가 은혜를 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가 약화되면 그 자리에 다른 우상이 들어옵니다. 예수를 떠나면 신비주의가 되고, 예수를 떠나면 윤리주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의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과 요한복음 15장 26절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은 이 신앙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앙이며, 오늘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5. 칭송 가운데 핍박을 받고, 핍박 가운데 예수를 전함

오늘 말씀의 앞부분은 너희를 핍박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접붙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는다고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잘해주는 것만 칭찬도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동시에 핍박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금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기뻐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인해 능욕받고, 수치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기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에 나오는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더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를 전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그러나 핍박한다고 해서 우리는 세상을 향해 저 사람은 사기꾼이다, 저 사람은 도둑놈이다 하고 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송 가운데 핍박이 있습니다. 이 깊은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핍박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하는 일이 욕먹을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전도지를 주려 하면 던지고, 노려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연세 드신 분들이 그랬다면, 요새는 젊은이들이 더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태원 같은 곳에서 노방전도를 해 보면 그런 일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핍박은 맞고, 거부도 맞고, 거역도 맞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여 칭송을 받으면서도 핍박을 받았듯이,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칭송하면서도 핍박하는 이유는 예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혜사 성령을 받아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시고,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며,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압니다. 오늘 말씀에도 진리의 성령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아도 그들이 예수를 알게 해야 합니다.
핍박을 받는다고 예수 외의 것을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몰라서 핍박하니까, 예수를 알게 해야 합니다. 예수를 몰라서 핍박한다고 오늘 말씀이 나오니, 우리는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한다면, 저들도 우리처럼 접붙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풍성히 누리기를 구해야 합니다.
그들도 넝쿨장미나 흰 장미나 작약보다 천만 배 더 큰 기쁨을 누리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 그 양분의 흐름을 누리도록, 모든 것을 주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 기도하고, 이 봄으로부터 여름과 가을로 가면서 전도에 대한 기도와 열성을 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핍박을 받는다고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알게 되고, 접붙임을 받게 되고, 포도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게 되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참빛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기쁨과 사랑과 평안입니다.
오늘 말씀 전체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가운데 있지만, 실제로는 보혜사 성령의 역사에 대한 말씀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예수를 알고, 예수 안에 거하며,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고 교회의 삶입니다. 단순히 교회를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붙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양분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예배로, 찬송으로, 헌신으로, 고백으로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운동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는 끌어당기지 못합니다. 조화는 붙어 있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화는 살아 있기 때문에 양분을 끌어당깁니다. 성도는 붙어 있기만 한 성도가 아니라, 끌어당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작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입니다. 내가 먼저 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접붙여 주셨습니다. 내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은혜입니다. 인간의 열심은 왔다가 가고, 결심도 흔들리며, 감정도 오르락내리락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함께하시고, 속에 계시고, 영원히 계십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성도는 혼자가 아닙니다. 낙심할 때도, 연약할 때도, 기도하지 못할 때도, 흔들릴 때도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다시 예수께로 이끄십니다. 다시 포도나무에 붙게 하시고, 다시 양분을 끌어당기게 하시며, 다시 기도하게 하시고, 다시 예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 더욱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 가운데, 기도 가운데, 예배 가운데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친히 공급해 주시고, 친히 열매 맺게 하시며, 친히 자라가게 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예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알게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도 접붙임을 받아 생명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가운데,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생명의 역사 가운데, 우리는 더욱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고, 더욱 보혜사 성령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더욱 기도하고, 더욱 전도하고, 더욱 열매 맺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