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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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신 주님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예언하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미리 될 일을 알려 주시며,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아시고, 이렇게 걱정하시고, 미리 대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알려 주시고, 제자들에게 신앙의 걸림이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실족할까 걱정하셨습니까? 첫째는 주님이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 7절의 말씀에 보면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하십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이 오시려면 주님께서 떠나셔야 하므로, 주님은 그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에 빠집니다. 둘째는 앞으로 닥칠 환난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임박한 고난이 있고, 그 고난 때문에 믿음을 버리거나 예수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제자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분이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은 아들의 영이라고 할 수 있고,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병행해서 보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들의 영이자 아버지의 영이고, 아버지의 영이자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부르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라 부르십니다. 한쪽만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참된 관계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도 주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안에 성자가 계신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아들의 영이며,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아버지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 가운데 고백되는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십니까, 아들의 영이십니까?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과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다른 성령이 아닙니다. 한 분 성령이십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은 하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이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증명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는 신앙이 바로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을 모르는 자들, 삼위일체 신앙이 없는 자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을 내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유대교도 그렇고, 무슬림도 그렇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말하고, 구약의 어느 부분까지는 자기들과 관련된다고 생각하며, 아브라함도 자기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이 나오면,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헛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면, 그 보내심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이 한꺼번에 표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보혜사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고백함
성경에는 삼위일체 신앙을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은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엡 4:5-6)라고 말씀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각자 다른 주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주님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큰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자란다고 주님이 모자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넉넉하다고 주님의 능력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한 분이신 주님입니다.
또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영은 서로 다른 영이 아닙니다. 초등학생도, 성도들도, 선교사님도 모두 동일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교회도 하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시므로,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교회도 하나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시고, 17절에서는 “그는 진리의 영이라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이라고 하였으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성부와 성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성자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이 나와 함께하시고 내 속에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아버지를 믿고, 아들을 믿고, 성령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또 예배 때 축복기도를 받을 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삼위일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때, 믿음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도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이 나온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중요한 말씀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 로마서 8장, 갈라디아서 3장과 5장 등에 나타나고, 성령이 오신 사건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성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역사한다고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성령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은 자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지나치듯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하나 새겨야 합니다. 말씀은 여기서는 다르고 저기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합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 속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 3절에 보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이 지식은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알려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불쌍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의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압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끝까지 보호하시고,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죄를 지어도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탕자가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듯이,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옛날에는 나그네였지만 이제는 그 집의 자녀로 들어갑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십니다.
또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아들을 압니다. 아들을 지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압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다고 하였듯이,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압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압니다.
우리는 모른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으니 믿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거룩에 거하고, 화평을 주셨으니 화평하고, 기쁨을 주셨으니 기뻐하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합니다. 존재로 누리는 것이 아버지 되심과 아들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아는 존재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도 알고 아들도 압니다. 나도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도 나를 “내 아들아”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이 함께 있는 데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3. 삼위일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의 핍박과 성도의 싸움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신령한 지식을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모르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이제 우리는 보혜사 성령 안에서 알고 예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세상 지식으로만 읽지 말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말씀하옵소서. 보혜사 성령의 지식을 주옵소서.” 이렇게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고 성자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 뜻대로 구할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 없으면 세상은 전쟁하고 갈등합니다. 유대인들은 성부만 믿고 삼위일체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입니다. 기독교 강요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도들을 출교할 뿐만 아니라 죽이려 합니다. 출교란 당시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나사렛파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할 때 저주문에 나사렛파를 넣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을 죽이는 자들이 되었고, 주님은 그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시대를 살면서 순교가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항상 순교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스데반도, 야고보도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고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하나님이 옥문을 열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성도들을 죽이려고 갔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단지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자들을 비판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이었을 때의 바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들의 열심과 우리의 열심이 부딪힙니다. 그래서 악한 영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성령의 검 곧 말씀을 가지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예비한 신발을 신고 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전신갑주를 말하면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실족할 일이 없어서 실족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고, 그 영을 받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성령이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며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수 있고, 실족할 일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판단의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면 판단합니다. 그러나 알면 누립니다. 놀이는 아이들이 가장 잘 압니다. 놀이기구를 만든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고 만들었다고 해서 놀이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꽃도 사진 찍는 사람이 알 수 있지만, 그 꽃을 지나가며 누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사과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누리는 사람이 압니다. 그러므로 실족하지 않으려면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둘째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리면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리지 않고 판단만 하면 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고 하십니다. 도마도 묻고 빌립도 묻기는 했지만,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려고 하는 데서 열매가 생깁니다. 알려고 하는 법은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방법은 기도하고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믿음의 본분을 기도로 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혜사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 신학이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이 되어 끝없이 교회가 교회를 향하여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현실을 아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려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않을 때 걸려 넘어집니다. 끝까지 푯대를 향하여 “주께서 나를 붙드신다” 하고 가면 길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타협하면 실족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으로 악을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선하거든 배우고, 누군가 악하거든 거기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선하면 감사하게 그 선함을 배우고, 누군가 악하면 그 악에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악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지, 악으로 맞서거나 악에 지면 안 됩니다. 끝내 악의 경쟁이 되면 안 됩니다. 참아야 합니다. 할 수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침묵으로 여리고를 돌 듯이 참아야 합니다. 못 참아서 탈이지, 많이 참아서 탈 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선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13절은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순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 속에 거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살아 계셔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4. 주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인 이유와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아들의 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다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죽기까지 다 이루신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의 도입니다. 부활의 도도 물론 아들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께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 죽음에 머물지 않고, 아들의 죽음이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십자가의 도가 나오고,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의 도가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는 아들이 다 이루신 도이고, 부활의 도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죽음을 생명의 값으로 받으신 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음을 죽이는 죽음으로, 생명의 죽음으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가 값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이 죽은 뒤 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일처럼, 아들의 죽음, 아들의 십자가의 도를 아버지께서 부활의 도로 받으신 것입니다. 부활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내 것 삼아 주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입니다.
아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더 징계하겠다고만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것이 주일의 의미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명의 값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교통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시는 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올라가시는 것이 유익한 것은,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 곧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 강림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교회도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습니다. 이 신앙을 모르는 사람은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담대하라 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
오늘 말씀 전체는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실족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당할 일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는 일 때문에 제자들이 근심할 것도 아셨고, 핍박과 출교와 죽음의 위협이 올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떠나심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 위한 길입니다. 주님이 떠나셔야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셔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유익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라 부르심을 압니다. 또한 아들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을 압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이시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삽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은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쫓아내고, 죽이는 일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성도는 악한 영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고,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세상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도는 판단의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을 알면 판단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누리고, 말씀을 누리고, 은혜를 누립니다. 누리는 자에게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만 하는 자는 쉽게 실족합니다. 가까이 가서 주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려는 자리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을 보혜사 성령께서 하십니다.
또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않을 때 실족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타협할 때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악으로 악을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누군가 선하면 감사히 배우고, 누군가 악하면 그 악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할 수 있어도 참아야 하고, 침묵으로 여리고를 돌 듯이 참아야 합니다. 모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권면하는 것이 순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성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성부는 그 죽음을 생명의 값으로 받으셨으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고, 성도는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하나 됩니다. 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이 핍박할지라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2026년 05월 2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68
우리에게로 오신 보혜사 성령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6:1-7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녹취록
1.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신 주님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예언하시는 말씀을 계속해서 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미리 될 일을 알려 주시며,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걸려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앞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믿음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아시고, 이렇게 걱정하시고, 미리 대비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미래를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알려 주시고, 제자들에게 신앙의 걸림이 없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 제자들이 실족할까 걱정하셨습니까? 첫째는 주님이 떠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떠나시면 제자들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오늘 7절의 말씀에 보면 주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고 하십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이 오시려면 주님께서 떠나셔야 하므로, 주님은 그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근심에 빠집니다. 둘째는 앞으로 닥칠 환난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에게 임박한 고난이 있고, 그 고난 때문에 믿음을 버리거나 예수 믿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아버지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제자들을 핍박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분이며,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은 아들의 영이라고 할 수 있고,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은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병행해서 보아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아들의 영이자 아버지의 영이고, 아버지의 영이자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과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성령은 아버지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내 아들아, 내 딸아”라고 부르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라 부르십니다. 한쪽만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참된 관계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서도 주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가 아들 안에 있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우리에게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안에 성자가 계신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아들의 영이며,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시는 아버지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 가운데 고백되는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십니까, 아들의 영이십니까?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주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과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다른 성령이 아닙니다. 한 분 성령이십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은 하나이시고, 아버지와 아들도 하나이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증명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믿는 신앙이 바로 우리의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을 모르는 자들, 삼위일체 신앙이 없는 자들이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을 내지만,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성도들을 핍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유대교도 그렇고, 무슬림도 그렇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말하고, 구약의 어느 부분까지는 자기들과 관련된다고 생각하며, 아브라함도 자기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이 나오면,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헛말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면, 그 보내심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이 한꺼번에 표현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보혜사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고백함
성경에는 삼위일체 신앙을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6절은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엡 4:5-6)라고 말씀합니다. 주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각자 다른 주님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주님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큰 주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자란다고 주님이 모자라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넉넉하다고 주님의 능력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한 분이신 주님입니다.
또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받은 영은 서로 다른 영이 아닙니다. 초등학생도, 성도들도, 선교사님도 모두 동일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교회도 하나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시므로, 그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교회도 하나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하시고, 17절에서는 “그는 진리의 영이라 …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7)고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그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이라고 하였으므로,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말씀은 성부와 성자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신다는 말씀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성자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이 나와 함께하시고 내 속에 계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때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아버지를 믿고, 아들을 믿고, 성령을 믿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또 예배 때 축복기도를 받을 때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습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도 삼위일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고 할 때, 하나님 아버지와 독생자 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할 때, 믿음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도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이 나온다면,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중요한 말씀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 로마서 8장, 갈라디아서 3장과 5장 등에 나타나고, 성령이 오신 사건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성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믿음이 역사한다고 할 때,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는 성령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역사를 받은 자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지나치듯 읽으면 안 됩니다. 하나하나 새겨야 합니다. 말씀은 여기서는 다르고 저기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합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 속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받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말씀 3절에 보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지식을 가졌습니다. 이 지식은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에게 참된 지식을 알려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것이 얼마나 불쌍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아버지의 이름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압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고, 끝까지 보호하시고,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죄를 지어도 불꽃 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탕자가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듯이,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옛날에는 나그네였지만 이제는 그 집의 자녀로 들어갑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아버지를 알게 하십니다.
또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아들을 압니다. 아들을 지식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고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압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하였고,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다고 하였듯이, 성령이 임하면 예수를 압니다. 보혜사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아버지를 알고 아들을 압니다.
우리는 모른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고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더 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믿으니 믿고, 거룩하게 하셨으니 거룩에 거하고, 화평을 주셨으니 화평하고, 기쁨을 주셨으니 기뻐하고, 사랑받았으니 사랑합니다. 존재로 누리는 것이 아버지 되심과 아들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아는 존재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하셨습니다. 이 아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도 알고 아들도 압니다. 나도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도 나를 “내 아들아”라고 부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과 아들의 영이 함께 있는 데에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3. 삼위일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의 핍박과 성도의 싸움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신령한 지식을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모르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했지만, 이제 우리는 보혜사 성령 안에서 알고 예배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도 세상 지식으로만 읽지 말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말씀하옵소서. 보혜사 성령의 지식을 주옵소서.” 이렇게 구해야 합니다. 성령은 성부의 영이고 성자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 뜻대로 구할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이 없으면 세상은 전쟁하고 갈등합니다. 유대인들은 성부만 믿고 삼위일체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은 삼위일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입니다. 기독교 강요도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구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성도들을 출교할 뿐만 아니라 죽이려 합니다. 출교란 당시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쫓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나사렛파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할 때 저주문에 나사렛파를 넣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을 죽이는 자들이 되었고, 주님은 그것을 미리 보셨습니다.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의 시대를 살면서 순교가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항상 순교의 믿음은 순종의 믿음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스데반도, 야고보도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고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하나님이 옥문을 열어 나오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처음에는 성도들을 죽이려고 갔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단지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제자들을 비판하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울이었을 때의 바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들의 열심과 우리의 열심이 부딪힙니다. 그래서 악한 영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구원의 투구를 쓰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성령의 검 곧 말씀을 가지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복음의 예비한 신발을 신고 서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 전신갑주를 말하면서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실족할 일이 없어서 실족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실족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고, 그 영을 받았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아버지가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성령이 너희와 함께, 너희 속에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망하지 말며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는 걸려 넘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시험이 우리에게도 올 수 있습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는 것과 같은 시험이 올 수 있고, 실족할 일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판단의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면 판단합니다. 그러나 알면 누립니다. 놀이는 아이들이 가장 잘 압니다. 놀이기구를 만든 사람이 한 번도 타 보지 않고 만들었다고 해서 놀이터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꽃도 사진 찍는 사람이 알 수 있지만, 그 꽃을 지나가며 누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사과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누리는 사람이 압니다. 그러므로 실족하지 않으려면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둘째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리면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리지 않고 판단만 하면 나중에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다”고 하십니다. 도마도 묻고 빌립도 묻기는 했지만,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참으로 알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알려고 하는 데서 열매가 생깁니다. 알려고 하는 법은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방법은 기도하고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믿음의 본분을 기도로 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보혜사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 신학이 판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이 되어 끝없이 교회가 교회를 향하여 욕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다. 현실을 아는 것은 좋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려야 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않을 때 걸려 넘어집니다. 끝까지 푯대를 향하여 “주께서 나를 붙드신다” 하고 가면 길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면 됩니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타협하면 실족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악으로 악을 대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선하거든 배우고, 누군가 악하거든 거기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보다 선하면 감사하게 그 선함을 배우고, 누군가 악하면 그 악에 끌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내가 악에 끌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지, 악으로 맞서거나 악에 지면 안 됩니다. 끝내 악의 경쟁이 되면 안 됩니다. 참아야 합니다. 할 수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침묵으로 여리고를 돌 듯이 참아야 합니다. 못 참아서 탈이지, 많이 참아서 탈 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선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13절은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순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내 안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 속에 거하십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살아 계셔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4. 주님이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인 이유와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아들의 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다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죽기까지 다 이루신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의 도입니다. 부활의 도도 물론 아들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께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죽음이 죽음에 머물지 않고, 아들의 죽음이 생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는 십자가의 도가 나오고,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부활의 도가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는 아들이 다 이루신 도이고, 부활의 도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죽음을 생명의 값으로 받으신 도입니다. 아버지께서 죽음을 죽이는 죽음으로, 생명의 죽음으로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부활은 무엇입니까?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가 값으로 받으신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이 죽은 뒤 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일처럼, 아들의 죽음, 아들의 십자가의 도를 아버지께서 부활의 도로 받으신 것입니다. 부활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그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내 것 삼아 주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입니다.
아들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내려 주십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더 징계하겠다고만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그들을 용서하시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것이 주일의 의미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생명의 값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고 부활하신 성자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교통됩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 삼아 주시는 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올라가시는 것이 유익한 것은, 삼위일체의 구원 역사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 곧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시는 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 강림이 바로 교회의 시작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교회도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교회가 있습니다. 이 신앙을 모르는 사람은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담대하라 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5.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긴다
오늘 말씀 전체는 보혜사 성령을 받은 성도가 어떻게 실족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당할 일을 아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는 일 때문에 제자들이 근심할 것도 아셨고, 핍박과 출교와 죽음의 위협이 올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떠나심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기 위한 길입니다. 주님이 떠나셔야 성령이 오시고, 성령이 오셔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심은 제자들에게 유익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버지를 압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라 부르심을 압니다. 또한 아들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있음을 압니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고 아들의 영이시므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삽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은 성도들을 핍박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 쫓아내고, 죽이는 일까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성도는 악한 영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입고,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세상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도는 판단의 자리에 서지 말고 누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을 알면 판단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누리고, 말씀을 누리고, 은혜를 누립니다. 누리는 자에게 열매가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만 하는 자는 쉽게 실족합니다. 가까이 가서 주님의 뜻을 알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말씀대로 살려는 자리에서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을 보혜사 성령께서 하십니다.
또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않을 때 실족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악과 타협할 때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악으로 악을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누군가 선하면 감사히 배우고, 누군가 악하면 그 악에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할 수 있어도 참아야 하고, 침묵으로 여리고를 돌 듯이 참아야 합니다. 모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권면하는 것이 순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성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성부는 그 죽음을 생명의 값으로 받으셨으며, 성령은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를 우리 것으로 삼아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시작되고, 성도는 삼위일체 신앙 안에서 하나 됩니다. 이 신앙을 모르는 자들이 핍박할지라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