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4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1 |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따라 담대함 | 요 16:25-33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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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1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1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따라 담대함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녹취록
1. 마가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과 보혜사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말부터 14장, 15장, 16장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 이후에는 17장에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무엇이 남습니까? 가르침이 남습니다. 공간 자체보다도 그곳에 담긴 교훈, 따뜻한 가르침, 위로와 찔림이 함께 있는 말씀이 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도 그러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각기 흩어지고 주님을 홀로 둘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근심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만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의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하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 것도 그러합니다. 그 근심은 믿음의 자리에서 오는 근심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주님의 부르심에 미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아시고 주님께서 세우신다는 자리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띠 띠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띠, 소명의 띠에 매여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실 때에도 믿음을 주셨는데 왜 쓰지 않느냐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시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 영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고, 기도하게 하며,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게 합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들이 친히 행하십니다.
오늘 말씀 중에는 우리가 잠시 멈칫할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주님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도해야 주님이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고,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만인 제사장직과도 연결됩니다. 중세에는 기도도 사제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제사장이심을 믿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가장 뚜렷하게 반복되는 말씀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임마누엘의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경의 큰 맥락은 임마누엘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함에서 벗어나 숨게 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자리이지만,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또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면 더 이상 이것저것 묻는 방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능력의 영은 아들이 다 이루신 공로와 순종의 의를 우리가 누리게 하십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가장 강조되는 것은 기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이제 구하라. 너희가 친히 구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의 법은 이러합니다. 첫째,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하며, 우리가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내가 하는 것이지만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아들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보혜사 성령의 기도이며 아들의 간구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25절도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셋째, 예수께서 친히 행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친히 행하리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주님이 친히 행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께서 간구하시는 그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도하시고 성자가 기도하시는 그 자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인이나 나그네처럼 여기지 않으시고 한자리에 두십니다. 마지막 석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내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의 자리,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보혜사 성령이 임한 새 시대의 영입니다.
2. 진리의 영이 밝히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뜻
주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나 포도원의 비유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교훈과 격언에 가까운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훈으로 알려 주셨지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과 소명을 알게 하시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며,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의 역사는 언제나 기도와 함께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받은 사람만 사랑을 알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거룩한 경건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생활의 영입니다. 막연하게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세밀한 것까지 알려 주십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을 알려 주시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자리까지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멀리서 교훈만 하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직접 이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믿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을 베푸십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히 교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3. 사랑하느냐와 믿느냐의 질문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서는 비교가 사라집니다. 단순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더 사랑하느냐, 덜 사랑하느냐가 아닙니다. 사랑하느냐를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 앞에서 근심합니다. 그러나 그 근심은 믿음의 근심입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서는 근심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질문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도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물으십니다. 질문은 소명이고 고백이며 은혜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질문을 듣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질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이 길을 가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주님은 단순히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질문하십니다. 질문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억지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며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것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이제는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가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은 결국 믿음과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말씀입니다.
4.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담대함의 삶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 다락방 강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들은 사랑, 기쁨, 평안입니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요, 평안의 영입니다. 세상적인 소유만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과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던 세상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침공했을 때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으로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성도의 담대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팔이 아니라 하나님의 팔이 함께한다는 믿음이 담대함의 근거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도하시고 주님께서 간구하시고 주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성도
설교의 마지막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담대함에 대한 적용입니다. 담대함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 자신을 정죄하고 붙들고 있으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거리이고 위로거리이며 긍휼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하는 자가 용서를 누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움 속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서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배워서 뛰는 것이 아니라 뛰면서 배우듯이, 성도의 삶도 걸어가면서 배우는 삶입니다. 연약하지만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는 단순히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나입니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믿음과 사랑의 질문에 응답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그 승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2026년 06월 14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1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따라 담대함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6:25-33
[25]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29]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녹취록
1. 마가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과 보혜사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
마가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말부터 14장, 15장, 16장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오늘 말씀 이후에는 17장에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대제사장적 기도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 무엇이 남습니까? 가르침이 남습니다. 공간 자체보다도 그곳에 담긴 교훈, 따뜻한 가르침, 위로와 찔림이 함께 있는 말씀이 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가르침도 그러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각기 흩어지고 주님을 홀로 둘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근심은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만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하지만 미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베드로가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의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하여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한 것도 그러합니다. 그 근심은 믿음의 자리에서 오는 근심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주님의 부르심에 미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 아시고 주님께서 세우신다는 자리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 마음대로 띠 띠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띠, 소명의 띠에 매여 사는 자가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책망하실 때에도 믿음을 주셨는데 왜 쓰지 않느냐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시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그 영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로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고, 기도하게 하며,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게 합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면 아들이 친히 행하십니다.
오늘 말씀 중에는 우리가 잠시 멈칫할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하셨는데, 여기서는 주님이 아버지께 구하겠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도해야 주님이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곧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이고,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만인 제사장직과도 연결됩니다. 중세에는 기도도 사제에게 부탁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말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제사장이심을 믿고,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가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가장 뚜렷하게 반복되는 말씀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임마누엘의 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경의 큰 맥락은 임마누엘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함에서 벗어나 숨게 하지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합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자리이지만,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합니다.
또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면 더 이상 이것저것 묻는 방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능력의 영은 아들이 다 이루신 공로와 순종의 의를 우리가 누리게 하십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가장 강조되는 것은 기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이제 구하라. 너희가 친히 구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의 법은 이러합니다. 첫째, 기도는 보혜사 성령이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하시고 우리가 하며, 우리가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도 내가 하는 것이지만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는 아들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보혜사 성령의 기도이며 아들의 간구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7장 25절도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보혜사 성령이 기도하시고,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셋째, 예수께서 친히 행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친히 행하리라.”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때 주님이 친히 행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령께서 간구하시는 그 자리에 우리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은혜의 자리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듣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도하시고 성자가 기도하시는 그 자리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인이나 나그네처럼 여기지 않으시고 한자리에 두십니다. 마지막 석양에 집으로 돌아갈 때 내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의 자리,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자리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보혜사 성령이 임한 새 시대의 영입니다.
2. 진리의 영이 밝히 알려 주시는 하나님의 뜻
주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나 포도원의 비유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교훈과 격언에 가까운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훈으로 알려 주셨지만,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과 소명을 알게 하시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며,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의 역사는 언제나 기도와 함께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받은 사람만 사랑을 알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거룩한 경건의 경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은 생명의 영이며 생활의 영입니다. 막연하게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세밀한 것까지 알려 주십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것을 알려 주시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자리까지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멀리서 교훈만 하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직접 이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과 믿음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을 베푸십니다. 흑암의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은혜를 누리게 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은 단순히 교훈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시는 삶입니다.
3. 사랑하느냐와 믿느냐의 질문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첫 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에서는 비교가 사라집니다. 단순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합니다. 더 사랑하느냐, 덜 사랑하느냐가 아닙니다. 사랑하느냐를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 앞에서 근심합니다. 그러나 그 근심은 믿음의 근심입니다. 자기 능력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서는 근심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질문하십니까? 바로 그 질문 자체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경 바디매오에게도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물으십니다. 질문은 소명이고 고백이며 은혜입니다.
기도는 바로 이 질문을 듣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질문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믿느냐?”, “네가 이 길을 가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주님은 단순히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질문하십니다. 질문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방식입니다. 억지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며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것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이제는 믿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가 다락방의 마지막 가르침은 결국 믿음과 사랑의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말씀입니다.
4. 세상을 이기신 주님과 담대함의 삶
주님께서는 마지막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 다락방 강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어들은 사랑, 기쁨, 평안입니다. 주님은 평안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요, 평안의 영입니다. 세상적인 소유만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기쁨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과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던 세상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이 침공했을 때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으로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성도의 담대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팔이 아니라 하나님의 팔이 함께한다는 믿음이 담대함의 근거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잘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기도하시고 주님께서 간구하시고 주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5.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성도
설교의 마지막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담대함에 대한 적용입니다. 담대함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용서하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셨는데 내가 나 자신을 정죄하고 붙들고 있으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거리이고 위로거리이며 긍휼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용서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하는 자가 용서를 누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두려움 속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서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배워서 뛰는 것이 아니라 뛰면서 배우듯이, 성도의 삶도 걸어가면서 배우는 삶입니다. 연약하지만 순종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는 단순히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나입니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믿음과 사랑의 질문에 응답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그 승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