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30, 36-46)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 14:26, 32-42)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녹취록
1. 겟세마네로 나아가시는 주님: 기도로 시작되는 고난의 길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후반부터 16장까지,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또 다른 보혜사, 곧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찬을 베푸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되어질 일을 가르치시고, 그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함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큰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기보다 보듬어 가셨습니다. “잠시 근심하겠으나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품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겟세마네로 나아가십니다. 그곳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시고, 재판받으시며, 십자가의 고난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처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 징계는 주님이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시는 길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이 큰 일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고난은 단순히 사건의 전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순종의 길이며, 그 길은 겟세마네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섬기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신 주님은 이제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그 찬미는 유월절 식사 후에 부르던 할렐루야 시편, 곧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특히 시편 118편에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의 고백이 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도 이 말씀과 연결됩니다. 또한 같은 시편에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버림받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집의 머릿돌, 신령한 반석이 되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 찬미를 부르시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앞산이며, 성경의 여러 장면과 연결된 중요한 산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도 감람산으로 갔고, 솔로몬 때에는 그곳에 이방 신들의 산당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감람산을 부활과 연결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무덤이 있습니다.
그 감람산에 겟세마네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감람 열매를 짜서 기름을 내듯이, 주님은 그곳에서 영혼 깊은 곳의 고통을 짜내듯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수고가 아니라, 영혼의 고통 가운데 드려진 기도입니다.
주님은 열한 제자를 데리고 가셨고, 그중 여덟 명은 남겨 두신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더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유혹은 시험과 같은 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 시험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첫째,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은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나라는 유혹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라는 유혹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셋째,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 테니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은 예배의 중심을 빼앗으려는 유혹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를 믿어야 하며,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영혼의 고통을 품은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자리에서 영혼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성을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깨끗하신 분만이 더러운 것을 건져 내실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고민하사”, “매우 고민하셨다”고 기록됩니다. 이것은 육체의 채찍을 맞기 전, 이미 영혼의 고통을 바라보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을 떠나는 유기와 단절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영혼이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지 주님께서 바라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놀라야 할 것을 주님이 놀라셨고,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을 주님이 슬퍼하셨으며, 우리가 고민해야 할 영혼의 징계와 저주의 상태를 주님이 대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영혼의 고통을 대신 지신 주님과 ‘아빠 아버지’의 기도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단지 육체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나 명예를 얻는 것이 구원의 본질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구원하십니다. 특별히 타락한 인간이 가장 먼저 상처 입은 곳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는 슬픔과 애통, 불안과 공포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상담도 있고 여러 지혜도 있지만, 인간 영혼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영혼의 고통의 절정은 죽음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죽음과 영혼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형편만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 근심과 공포까지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리에서 이미 놀라셨고, 이미 슬퍼하셨고, 이미 고민하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영혼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겟세마네의 기도는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가장 잘 설명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죽음에 속한 분도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에 계실 때”라는 표현도 단순히 육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셔서 영혼과 육체를 모두 가지신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겟세마네는 단순한 육체적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대신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여러 문제는 하나님께 가져가지만 정작 영혼의 깊은 상처와 두려움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그 영혼의 고통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역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현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만 기록된 이 표현은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가장 친밀한 호칭입니다. “아빠”는 부르는 말이고 “아버지”는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인물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기도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기도하는 아들의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을 담당하시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특권입니다.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십자가를 피하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성찬을 제정하시며 “이 잔은 새 언약의 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분이 갑자기 그 길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녀의 기도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른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기도합니다. 연약함도, 두려움도, 부족함도 모두 하나님께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깁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아들로 오셨고, 순종하는 아들로 오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고,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리며,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애써”라는 말은 단순히 애를 썼다는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영혼 깊은 곳의 극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땀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감람 열매를 눌러 기름을 짜내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영혼의 깊은 고통을 모두 쏟아 내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시며 끝내는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왔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함께”는 단순히 그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연약한 인간의 기도가 아니라, 장차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교회를 바라보시며 드리신 기도이기도 합니다.
3. 영혼의 고통을 모두 담당하신 그리스도
겟세마네에서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단순히 육체의 고난을 앞둔 두려움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주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매우 고민하셨다”고 반복하여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죄 아래에서 겪게 될 영혼의 고통을 주님께서 친히 바라보시며 대신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놀라신 것은 죽음 자체보다 하나님과의 단절,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의 깊이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처럼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는 상태가 얼마나 두렵고 절망스러운 것인지를 주님께서 바라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슬퍼하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인간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목자를 떠난 양이 생명을 잃듯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을 보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매우 고민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만 죄로 인해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징계이며,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리에 서셔서 그 징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며 인간이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와 심판을 주님께서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는 단순히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 대속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놀람을 주님께서 대신 놀라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슬퍼하셨으며, 우리의 고민을 대신 고민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한 구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4. 기도는 모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가지는 가장 깊은 신뢰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만 곧 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십니다.
이미 성찬에서 이 잔을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이 반드시 마셔야 할 잔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십자가를 피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그대로 아뢰는 것이 자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겟세마네 기도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으로 오셨고, 순종하는 분으로 오셨으며, 끝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애써”라는 말은 영혼 깊은 곳의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땀이 핏방울같이 될 만큼 자신의 영혼을 쏟아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입니다. 감람 열매에서 기름이 나오듯,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5.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왔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함께”입니다. 겟세마네에서는 아직 제자들이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그날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가장 먼저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은 영혼입니다. 삶의 문제와 형편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상처와 두려움, 불안과 공포까지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는 영혼의 고통을 담당하셨고, 십자가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담당하셨으며, 끝내 죽음 자체의 고통까지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영혼의 고통을 모두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그 고통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영혼의 짐을 홀로 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의 놀람도, 슬픔도, 근심도, 공포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보다 먼저 놀라셨고, 먼저 슬퍼하셨고, 먼저 고민하셨으며, 끝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순히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2026년 06월 21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2
겟세마네의 '아빠 아버지' 기도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 26:30, 36-46; 막 14:26, 32-42; 눅 22:39-46
(마태복음 26:30, 36-46)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가복음 14:26, 32-42) [26]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 [32]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35]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7] 돌아오사 제자들이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39]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40]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함이라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더라 [41] 세 번째 오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 되었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누가복음 22:39-46)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녹취록
1. 겟세마네로 나아가시는 주님: 기도로 시작되는 고난의 길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후반부터 16장까지,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또 다른 보혜사, 곧 보혜사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찬을 베푸시며,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되어질 일을 가르치시고, 그 가운데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함께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큰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기보다 보듬어 가셨습니다. “잠시 근심하겠으나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는 말씀처럼, 주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끝까지 품으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겟세마네로 나아가십니다. 그곳에서 기도하시고, 잡히시고, 재판받으시며, 십자가의 고난으로 들어가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의 말씀처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 징계는 주님이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를 받으시는 길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이 큰 일은 기도로 시작됩니다. 주님의 고난은 단순히 사건의 전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순종의 길이며, 그 길은 겟세마네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섬기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신 주님은 이제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그 찬미는 유월절 식사 후에 부르던 할렐루야 시편, 곧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특히 시편 118편에는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호산나의 고백이 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도 이 말씀과 연결됩니다. 또한 같은 시편에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버림받는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집의 머릿돌, 신령한 반석이 되십니다.
주님은 바로 이 찬미를 부르시며 감람산으로 나아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앞산이며, 성경의 여러 장면과 연결된 중요한 산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도 감람산으로 갔고, 솔로몬 때에는 그곳에 이방 신들의 산당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감람산을 부활과 연결하여 생각했기 때문에 그곳에는 많은 무덤이 있습니다.
그 감람산에 겟세마네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을 가진 곳입니다. 감람 열매를 짜서 기름을 내듯이, 주님은 그곳에서 영혼 깊은 곳의 고통을 짜내듯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의 수고가 아니라, 영혼의 고통 가운데 드려진 기도입니다.
주님은 열한 제자를 데리고 가셨고, 그중 여덟 명은 남겨 두신 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더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유혹은 시험과 같은 말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이 시험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첫째,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은 말씀의 기준에서 벗어나라는 유혹입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둘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시험하라는 유혹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믿습니다. 셋째,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 테니 사탄에게 경배하라는 시험은 예배의 중심을 빼앗으려는 유혹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을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의심하지 않고 아버지를 믿어야 하며,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영혼의 고통을 품은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자리에서 영혼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성을 가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담당하실 수 있습니다. 깨끗하신 분만이 더러운 것을 건져 내실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고민하사”, “매우 고민하셨다”고 기록됩니다. 이것은 육체의 채찍을 맞기 전, 이미 영혼의 고통을 바라보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을 떠나는 유기와 단절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영혼이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지 주님께서 바라보신 것입니다.
우리가 놀라야 할 것을 주님이 놀라셨고,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을 주님이 슬퍼하셨으며, 우리가 고민해야 할 영혼의 징계와 저주의 상태를 주님이 대신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우리의 영혼의 평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영혼의 고통을 대신 지신 주님과 ‘아빠 아버지’의 기도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단지 육체가 구원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나 명예를 얻는 것이 구원의 본질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과 육을 함께 구원하십니다. 특별히 타락한 인간이 가장 먼저 상처 입은 곳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인간 안에는 슬픔과 애통, 불안과 공포가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상담도 있고 여러 지혜도 있지만, 인간 영혼의 근본적인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영혼의 고통의 절정은 죽음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죽음과 영혼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형편만을 가지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마음의 상처와 두려움, 근심과 공포까지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리에서 이미 놀라셨고, 이미 슬퍼하셨고, 이미 고민하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영혼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 겟세마네의 기도는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가장 잘 설명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죽음에 속한 분도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육체에 계실 때”라는 표현도 단순히 육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셔서 영혼과 육체를 모두 가지신 가운데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겟세마네는 단순한 육체적 고난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대신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여러 문제는 하나님께 가져가지만 정작 영혼의 깊은 상처와 두려움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미 그 영혼의 고통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역시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표현은 “아빠 아버지”입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서만 기록된 이 표현은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가장 친밀한 호칭입니다. “아빠”는 부르는 말이고 “아버지”는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인물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기도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땅에 기도하는 아들의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심판을 담당하시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는 기도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어진 특권입니다. 로마서 8장과 갈라디아서 4장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는 십자가를 피하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성찬을 제정하시며 “이 잔은 새 언약의 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분이 갑자기 그 길을 거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녀의 기도입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을 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른처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기도합니다. 연약함도, 두려움도, 부족함도 모두 하나님께 내어놓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십니다.“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깁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아들로 오셨고, 순종하는 아들로 오셨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고,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간구와 소원을 올려드리며, 믿음과 경건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애써”라는 말은 단순히 애를 썼다는 정도의 표현이 아닙니다. 영혼 깊은 곳의 극심한 고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땀이 핏방울같이 될 정도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감람 열매를 눌러 기름을 짜내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영혼의 깊은 고통을 모두 쏟아 내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러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없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아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시며 끝내는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왔다.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함께”는 단순히 그 순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연약한 인간의 기도가 아니라, 장차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갈 교회를 바라보시며 드리신 기도이기도 합니다.
3. 영혼의 고통을 모두 담당하신 그리스도
겟세마네에서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단순히 육체의 고난을 앞둔 두려움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주님께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시고”, “매우 고민하셨다”고 반복하여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죄 아래에서 겪게 될 영혼의 고통을 주님께서 친히 바라보시며 대신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놀라신 것은 죽음 자체보다 하나님과의 단절,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게 되는 영원한 고통의 깊이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처럼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는 상태가 얼마나 두렵고 절망스러운 것인지를 주님께서 바라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슬퍼하신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인간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를 떠난 가지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목자를 떠난 양이 생명을 잃듯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을 보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매우 고민하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만 죄로 인해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징계이며,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리에 서셔서 그 징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안나스와 가야바,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며 인간이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정죄와 심판을 주님께서 담당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는 단순히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 대속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놀람을 주님께서 대신 놀라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슬퍼하셨으며, 우리의 고민을 대신 고민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한 구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4. 기도는 모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아빠 아버지”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듯 하나님께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가지는 가장 깊은 신뢰를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지만 곧 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하십니다.
이미 성찬에서 이 잔을 새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이 반드시 마셔야 할 잔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십자가를 피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그대로 아뢰는 것이 자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믿음이 겟세마네 기도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현실을 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는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들으심을 얻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분으로 오셨고, 순종하는 분으로 오셨으며, 끝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주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애써”라는 말은 영혼 깊은 곳의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땀이 핏방울같이 될 만큼 자신의 영혼을 쏟아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을 짜는 틀입니다. 감람 열매에서 기름이 나오듯,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혼을 모두 쏟아내셨습니다.
5.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라
주님께서는 세 번이나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연약함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고 쉬라. 때가 왔다. 일어나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함께”입니다. 겟세마네에서는 아직 제자들이 함께하지 못했지만,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일어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그날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가장 먼저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은 영혼입니다. 삶의 문제와 형편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의 상처와 두려움, 불안과 공포까지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은 이미 그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는 영혼의 고통을 담당하셨고, 십자가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시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담당하셨으며, 끝내 죽음 자체의 고통까지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영혼의 고통을 모두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그 고통에서 해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영혼의 짐을 홀로 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의 놀람도, 슬픔도, 근심도, 공포도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주님께서 이미 우리보다 먼저 놀라셨고, 먼저 슬퍼하셨고, 먼저 고민하셨으며, 끝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의 기도는 단순히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빠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초청하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