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8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3 |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 요 17:1-5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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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6월 28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3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녹취록
1. 대제사장의 기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보혜사 성령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모두 마치신 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는 장차 오실 보혜사 성령과 제자들에게 주어질 위로와 평안, 사랑에 대한 약속이 중심이었다면, 17장은 그 모든 약속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고별 강화의 결론이며, 동시에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주님의 마지막 중보기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러 왔습니다. 이 명칭이 붙게 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기 직전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제물을 준비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제물이 되시는 참 대제사장이십니다. 이제 자신의 몸을 향기로운 제물과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직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헌신의 기도이며, 겟세마네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드리셨던 기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기도입니다.
둘째, 이 기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며 드리는 서원의 기도입니다. 아직 십자가도, 부활도, 승천도, 오순절 성령 강림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고 신약 교회가 세워지며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처럼 감사하며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서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미래를 현재로, 미래를 과거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령께서 임하시면 신약 교회가 시작되고, 택하신 백성이 복음을 통하여 모여들며,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역사를 이미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감사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셋째, 이 기도는 장차 하늘 성소에서 계속될 영원한 중보기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의 참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항상 살아 계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은 단지 십자가 직전에 한 번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중보기도를 미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제정하신 것처럼, 이 기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첫 중보기도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죽음을 앞두고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며 “나는 이 말씀에 첫 닻을 내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소망과 확신이 바로 이 기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소망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절부터 5절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6절부터 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떠나신 이후에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보호하여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20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는 앞으로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될 모든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말씀으로 하나 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지 열한 제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주님의 기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찾듯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힘써 기도하셨던 주님은 여기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자녀가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도 바로 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처음에는 사람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되고,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도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님은 첫 번째 간구를 드리십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한 구절 안에는 요한복음 17장 전체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모든 기도는 결국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도이며, 그 영광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2.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때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여”라는 한마디로 시작됩니다. 설교자는 이 한 단어 속에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먼저 관계입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막연한 절대자나 멀리 계신 신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살게 하시고, 끝까지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이 사실을 잊기 쉽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 어떤 객관적인 대상 앞에서 시험을 치르듯 기도하거나, 자신의 열심과 의로움을 보이려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 나를 지으신 분, 지금도 나를 돌보고 계시는 아버지께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기도란 단순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여기에서 ‘때’에 대해 길게 설명합니다.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의 때는 단순히 시계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정하신 구속사의 시간입니다. 사람이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계속 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고, 겟세마네에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꽃이 피는 때가 있고 열매를 맺는 때가 있으며, 십자가를 지는 때가 있고 부활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응답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때는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때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기도하다가 낙심하게 되고, 조급함에 사로잡히며, 결국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때를 하나님께 맡기면 기도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때가 찼다’는 표현을 설명하며, 마치 여러 개의 줄이 하나하나 당겨져 정확한 자리에 연결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가장 정확한 시점에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늦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가장 정확한 때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은혜이고 미래는 상급입니다. 현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공로를 쌓아 미래를 얻으려는 삶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오늘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여기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것이 결코 자신을 높여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 가운데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서 부족한 영광을 얻으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영광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이루시는 영광입니다.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바로 그 사역이 완성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동일한 원리로 기도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주님,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명예를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성도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같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 제 뜻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저 또한 그 영광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원리입니다.
3.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붙잡히지도 않으셨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으며,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내가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바로 서원의 기도이며, 미래를 과거형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십자가의 사역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실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기도로 “이루었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실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주님의 완료형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배워야 할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놓고 하나님과 흥정하듯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먼저 감사하십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자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기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영광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곧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는 곧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인정받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삶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사역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통치가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세상의 왕은 명령하고 지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베푸시는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제사장으로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고, 왕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백성에게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자기 생명을 교회 가운데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사람을 억압하거나 명령하는 권세가 아니라 영생을 베푸시는 권세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통치이며, 성령을 통하여 백성을 살리시는 통치입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주님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입니다.
태양의 권세가 따뜻한 빛을 비추는 데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세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무엇인가를 더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누려 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왕의 통치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신약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바라보셨던 그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이 흔히 오해되기 쉽다고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신학적 지식을 쌓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앎’은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계속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에 대한 가르침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증언하시며, 장래 일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아버지 안에 아들이 계시고, 아들 안에 우리가 거하는 그 연합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게 하시는 생명입니다.
이 ‘앎’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임마누엘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단순히 죽은 후 천국에 가는 미래의 생명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 있는 교제입니다.
설교자는 영생을 자녀됨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 역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다시 한번 이 점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완료형의 기도입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지만 이미 다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시고, 아직 성령은 강림하지 않았지만 이미 성령께서 임하신 것을 바라보며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도 이런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붙들고 불안해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미 일하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는 단순한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설교자는 여기에서 기도에 대해 깊은 적용을 제시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고백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신다는 신뢰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고, 우리의 힘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도 평안히 잠들 수 있고, 내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미래를 불안 가운데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현재를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설교자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도 주님의 기도와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결국 “주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 나를 도구 삼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루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됩니다.
성도의 존재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기도의 방향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계속 드리고 계시는 중보기도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제자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동일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위로는 지금도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보기도 안에서 우리 역시 아버지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 주님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요한복음 17장 전체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단순히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대제사장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과거의 기록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의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그 아버지 앞에 자녀로 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삶입니다.
또한 주님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자신의 시간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공생애도, 십자가도, 부활도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과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응답을 믿는 것뿐 아니라 응답의 시기도 하나님께 맡길 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가장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계획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주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중심은 자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십자가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주님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성도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습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염려하며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맡기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한 길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 흥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설교자는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심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심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내 대신 일하심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는 있어도 붙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삶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주님의 왕권에 대해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세상의 통치와 다릅니다. 세상은 명령과 힘으로 다스리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주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보좌 우편에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 자신을 교회에 베푸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며, 성령을 통한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억압 속에서 왕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베푸시는 왕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이며, 영생을 주시는 권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장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왕의 통치입니다.
주님은 이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생명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미래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모든 말씀을 통하여 성도의 삶의 방향을 다시 제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지혜로운 자보다 미련한 자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성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이 곧 우리의 참된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성도에게 가장 복되고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요한복음 17장이 단지 기도의 모범만을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쉬지 않고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우리는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성도에게 가장 큰 위로는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중보 안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도 교회를 붙드시고 성도를 붙드시는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 안에서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06월 28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3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7: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녹취록
1. 대제사장의 기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주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보혜사 성령에 대한 마지막 가르침을 모두 마치신 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는 장차 오실 보혜사 성령과 제자들에게 주어질 위로와 평안, 사랑에 대한 약속이 중심이었다면, 17장은 그 모든 약속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고별 강화의 결론이며, 동시에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시는 주님의 마지막 중보기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러 왔습니다. 이 명칭이 붙게 된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기 직전에 드리신 기도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제물을 준비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제물이 되시는 참 대제사장이십니다. 이제 자신의 몸을 향기로운 제물과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기 직전,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해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헌신의 기도이며, 겟세마네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드리셨던 기도의 연장선 위에 있는 기도입니다.
둘째, 이 기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바라보며 드리는 서원의 기도입니다. 아직 십자가도, 부활도, 승천도, 오순절 성령 강림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고 신약 교회가 세워지며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이미 이루어진 사실처럼 감사하며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서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미래를 현재로, 미래를 과거형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성령께서 임하시면 신약 교회가 시작되고, 택하신 백성이 복음을 통하여 모여들며,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모든 역사를 이미 바라보시며 하나님께 감사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순한 소망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셋째, 이 기도는 장차 하늘 성소에서 계속될 영원한 중보기도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의 참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항상 살아 계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7장은 단지 십자가 직전에 한 번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주님의 중보기도를 미리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제정하신 것처럼, 이 기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첫 중보기도를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죽음을 앞두고 요한복음 17장을 읽어 달라고 부탁하며 “나는 이 말씀에 첫 닻을 내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소망과 확신이 바로 이 기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의 마지막까지 붙들어야 할 소망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먼저 1절부터 5절까지는 주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6절부터 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떠나신 이후에도 제자들이 믿음을 지키고 성령 안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보호하여 달라고 간구하십니다.
20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는 앞으로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믿게 될 모든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말씀으로 하나 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단지 열한 제자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가장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주님의 기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능력을 행하시고 병을 고치시며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찾듯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힘써 기도하셨던 주님은 여기에서도 동일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십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한 하나님의 자녀가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도 바로 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처음에는 사람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되고,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도 조금씩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님은 첫 번째 간구를 드리십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 한 구절 안에는 요한복음 17장 전체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모든 기도는 결국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도이며, 그 영광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2.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와 하나님의 때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여”라는 한마디로 시작됩니다. 설교자는 이 한 단어 속에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가 담겨 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는 먼저 관계입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 기도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막연한 절대자나 멀리 계신 신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살게 하시고, 끝까지 돌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합니다.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이 사실을 잊기 쉽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 어떤 객관적인 대상 앞에서 시험을 치르듯 기도하거나, 자신의 열심과 의로움을 보이려는 마음으로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있게 하신 분, 나를 지으신 분, 지금도 나를 돌보고 계시는 아버지께 자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기도란 단순히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고, 그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여기에서 ‘때’에 대해 길게 설명합니다. 성경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의 때는 단순히 시계가 흘러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정하신 구속사의 시간입니다. 사람이 계산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 계속 이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이셨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도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고, 겟세마네에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꽃이 피는 때가 있고 열매를 맺는 때가 있으며, 십자가를 지는 때가 있고 부활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응답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때는 기다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때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기도하다가 낙심하게 되고, 조급함에 사로잡히며, 결국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때를 하나님께 맡기면 기도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때가 찼다’는 표현을 설명하며, 마치 여러 개의 줄이 하나하나 당겨져 정확한 자리에 연결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가장 정확한 시점에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늦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는 가장 정확한 때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은혜이고 미래는 상급입니다. 현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만 미래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공로를 쌓아 미래를 얻으려는 삶이 아니라, 은혜 안에서 오늘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상급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내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결국 겟세마네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여기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더욱 놀랍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겉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것이 결코 자신을 높여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 가운데 계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서 부족한 영광을 얻으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영광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이루시는 영광입니다.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은 곧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도 바로 그 사역이 완성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동일한 원리로 기도할 수 있다고 권면합니다.
“주님,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명예를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성도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같은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님, 제 뜻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맡기신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저 또한 그 영광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이것이 주님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원리입니다.
3.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이루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이 말씀을 읽으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습니다. 아직 붙잡히지도 않으셨고, 죽으시지도 않으셨으며, 부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내가 이루었다”고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바로 서원의 기도이며, 미래를 과거형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요한복음 17장에서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십자가의 사역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실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는 기도로 “이루었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19장에서는 실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십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주님의 완료형 기도’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배워야 할 믿음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놓고 하나님과 흥정하듯 기도하기 쉽습니다. “이것을 해 주시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먼저 감사하십니다.
설교자는 우리도 이런 기도를 배워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용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자녀를 붙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는 기도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주님은 왜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본래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완전한 영광 가운데 계신 분입니다. 창세 전부터 성부와 함께 영광을 가지셨고, 만물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족한 영광을 더 얻기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속의 사역을 끝까지 완성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대속물로 드리고, 십자가를 지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 곧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라는 기도는 곧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높아지고 인정받게 해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삶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기도의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사역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에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통치가 세상의 통치와 전혀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세상의 왕은 명령하고 지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베푸시는 왕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십니다.
제사장으로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시고, 왕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백성에게 주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자기 생명을 교회 가운데 나누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란 사람을 억압하거나 명령하는 권세가 아니라 영생을 베푸시는 권세입니다.
주님의 다스리심은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통치이며, 성령을 통하여 백성을 살리시는 통치입니다.
설교자는 이 부분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주님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입니다.
태양의 권세가 따뜻한 빛을 비추는 데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세는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베푸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그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무엇인가를 더 얻기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리스도를 더욱 풍성히 누려 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왕의 통치가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신약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바라보셨던 그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영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이 흔히 오해되기 쉽다고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신학적 지식을 쌓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앎’은 그런 지식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계속 말씀하신 보혜사 성령에 대한 가르침 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증언하시며, 장래 일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아버지 안에 아들이 계시고, 아들 안에 우리가 거하는 그 연합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게 하시는 생명입니다.
이 ‘앎’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임마누엘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단순히 죽은 후 천국에 가는 미래의 생명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과의 생명 있는 교제입니다.
설교자는 영생을 자녀됨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삶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루어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 역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십니다.
설교자는 다시 한번 이 점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완료형의 기도입니다.
아직 십자가는 남아 있지만 이미 다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시고, 아직 성령은 강림하지 않았지만 이미 성령께서 임하신 것을 바라보며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기도도 이런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붙들고 불안해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루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미 일하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는 단순한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설교자는 여기에서 기도에 대해 깊은 적용을 제시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고백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신다는 신뢰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고, 우리의 힘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도 평안히 잠들 수 있고, 내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신뢰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미래를 불안 가운데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현재를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삶입니다.
설교자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도 주님의 기도와 같은 방향을 향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결국 “주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시고, 나를 도구 삼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루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됩니다.
성도의 존재 이유는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기도의 방향이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계속 드리고 계시는 중보기도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 제자들을 지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 우편에서 동일한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위로는 지금도 살아 계신 대제사장이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중보기도 안에서 우리 역시 아버지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한 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5. 주님의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요한복음 17장 전체를 하나의 큰 흐름으로 정리합니다. 주님의 이 기도는 단순히 십자가를 앞둔 마지막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대제사장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도를 과거의 기록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의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면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그 아버지 앞에 자녀로 서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녀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삶입니다.
또한 주님은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계획이나 자신의 시간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생애 전체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공생애도, 십자가도, 부활도 모두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를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과만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응답을 믿는 것뿐 아니라 응답의 시기도 하나님께 맡길 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실 때에 우리를 가장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계획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것이 곧 믿음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이러한 믿음 위에서 주님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중심은 자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십자가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주님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이것을 성도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습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염려하며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맡기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한 길로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과 흥정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시간입니다.
설교자는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있게 하심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심은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내 대신 일하심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계획할 수는 있어도 붙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삶을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드시고, 하나님께서 내 대신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설교자는 주님의 왕권에 대해서도 다시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세상의 통치와 다릅니다. 세상은 명령과 힘으로 다스리지만, 예수님은 자신을 주심으로 다스리십니다. 아버지께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고, 보좌 우편에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자기 자신을 교회에 베푸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며, 성령을 통한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억압 속에서 왕을 섬기는 백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베푸시는 왕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베푸심의 권세이며, 영생을 주시는 권세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확장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나타나는 것도 바로 이 왕의 통치입니다.
주님은 이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생명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미래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지금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설교자는 이러한 모든 말씀을 통하여 성도의 삶의 방향을 다시 제시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강한 자보다 약한 자를, 지혜로운 자보다 미련한 자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보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의 성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옵소서.”
이것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 영광이 곧 우리의 참된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도 참된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 성도에게 가장 복되고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요한복음 17장이 단지 기도의 모범만을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보여 주는 장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쉬지 않고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에 우리는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성도에게 가장 큰 위로는 환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중보 안에서 담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과거의 한 장면이 아니라 오늘도 교회를 붙드시고 성도를 붙드시는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 안에서 우리 역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