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2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5 |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 | 요 17:9-19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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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7월 12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5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7:9-19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녹취록
1.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오늘은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5번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지난주와 이번 주의 본문을 겹쳐서 전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같은 본문을 두 주에 걸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그만큼 한 번의 설교로 다 담아내기 어려운 귀한 말씀입니다.
전체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은 특별히 귀합니다. 기도는 인성에 따라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참된 영혼과 육체를 지닌 온전한 사람으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에 따라, 영혼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부터 5절까지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높임을 받고 편안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아들의 영화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당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성찬을 받고 나간 뒤였으므로, 주님은 남아 있던 열한 제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2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앞으로 주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교회를 위한 기도이며,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는 기도의 흐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앞으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위하여 드린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려면 먼저 누가 제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무리가 아니라 제자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모두 제자는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주님의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면 무리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 주님을 따라가면 내 형편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만 바라본다면 아직 무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면 제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보다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주님 자신으로 기뻐한다면 제자입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지, 내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건강한지, 내가 잘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무리의 모습에 머물 수 있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기뻐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낙심하며, 무엇을 많이 가지면 믿음이 좋아진 것 같고 무엇을 잃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낀다면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라본다면 제자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보고, 주님으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나의 신분을 기뻐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심리적인 상태나 윤리적인 조건이나 소유에 따라서 장마철에 바람 부는 대로 깃발이 흔들리듯 이리저리 흔들린다면 무리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과 주님 안에서 받은 신분을 붙드는 사람은 제자입니다.
그러면 제자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제자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스스로 주님을 선택하여 제자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의 시작은 자기 결단이나 자기 공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택하심과 아들에게 주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더 잘했기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께 속하고 아들에게 주어진 사람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본래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세상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본래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생업이 있었고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세상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자신의 신분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그렇다고 생업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직장과 가정과 일상의 자리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가장 중요한 신분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가장 먼저 천국 시민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속한 마음을 그대로 지닌 채 주님을 따라다니면 무리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중심은 여전히 세상에 있고, 세상이 주는 인정과 소유와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 무리입니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자신의 첫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다면 제자입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어떤 신으로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녀답지 않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의심하고, 괜히 두려워하고, 괜히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지, 내가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걱정합니까? 자녀가 자신을 걱정하기 전에 자녀를 낳은 아버지가 먼저 걱정합니다. 자녀가 자신의 필요를 다 헤아리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살피고 돌봅니다. 제자는 바로 이 아버지를 가진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제자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심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고,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시는 아버지로 믿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무엇보다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무가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과 수분으로 자라듯이 제자는 말씀으로 자라갑니다. 말씀을 받고,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제자의 성장은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성장이 아닙니다. 뿌리에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는 제자로 자라갈 수 없습니다. 제자는 말씀을 자기 판단 아래 두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아래 자신을 두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됩니다. 지난주에 기쁨거리, 소망거리, 감사거리, 영광거리라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제자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된다는 것은 제자 자신이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의 믿음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을 지키며,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소유와 성취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주님이 구주이심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된다는 것은 제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신분에 걸맞은 기도를 오늘 주님께서 드리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막연히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세상에서 불러내신 자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 말씀을 받고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꾸 잊기 때문에 다시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무리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지만 제자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무리는 주님의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를 궁금해하지만 제자는 주님 자신을 사랑합니다. 무리는 자신의 형편과 소유에 따라 흔들리지만 제자는 주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라봅니다. 무리는 무엇을 얻을 때 기뻐하지만 제자는 주님으로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의 신분이 보존되고, 그들이 하나가 되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 증인으로 살아가며,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도록 기도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크게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어 증인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넷째는 주님의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모든 기도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아버지의 것이었다가 아들에게 주어진 사람이며,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이며, 말씀을 받고 지키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무엇을 주실 것인가만 바라보지 말고 주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편과 소유와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주님 안에서 받은 자녀의 신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뻐하며, 말씀을 받고 지키는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과 12절에서 주님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복음서 병행 강해를 하면서 지난주와 이번 주에 같은 본문을 겹쳐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말씀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주님의 기도가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고 그 흐름을 나누어 설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분명히 드러나는 기도는 제자들의 보전과 하나 됨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단지 사람을 부르는 명칭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신분이고, 자격이며, 그 존재의 실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하신 것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닌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본래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객관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찾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부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주어진 신분이며 특권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과 허다한 증인들이 있지만, 그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여 그 귀함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첫 번째 기도는 바로 이 자녀의 신분을 잃지 않도록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자녀이자 상속자인 그 신분에 머물도록 기도하십니다.
자녀 됨을 보전한다는 것은 샬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샬롬은 무엇이 하나 더 생기고, 형편이 더 좋아지고, 풍족해져서 만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계시고 우리는 자녀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샬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유혹을 받은 것은 자기 자리를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질서가 깨질 때 샬롬도 깨지고 사망이 들어옵니다. 샬롬의 반대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샬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 신분 안에 머무는 것이 평안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 됨이 끝까지 보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끝내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전은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께서 이루신 구속과 지금도 계속되는 중보로 우리가 보전됩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외인이요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막힌 담이 허물어져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집 밖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외인이나 나그네처럼 살지 않고, 집을 떠난 사람처럼 방황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자녀 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반복해서 사용하신 “하물며”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입히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관용을 베푸시고, 돌보시며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과 호의와 관용과 돌보심과 자비가 우리를 붙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고난이 오고, 물에 빠지고, 매를 맞고, 여러 위험을 당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고, 자녀의 신분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단지 각자 자녀의 신분을 보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자녀 됨과 하나 됨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라면 서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모두 한 근원에서 났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인 이유는 자주 만나서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나누어서도 아닙니다. 한 아버지에게서 난 자녀이기 때문에 형제자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이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이 형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자녀 됨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야곱의 마음이 아팠고, 다윗의 자녀들이 서로 싸웠을 때 다윗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파조차 여러 파 가운데 하나의 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고 더 좋은 것을 함께 소망한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바람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기다리고, 서로 바라고, 서로 품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울타리 안에 함께 모여 있고, 여러 꽃이 하나의 꽃병에 꽂혀 있듯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샬롬입니다. 각자가 자녀의 자리를 지키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주님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두 번째 기도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주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인공지능과 정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결국 어디에 참된 지식이 있고, 무엇이 옳으며,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땅을 판다고 하면 얼마나 힘껏 파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디를 파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파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노동과 비용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진리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주장과 해석이 넘쳐나지만 무엇이 참된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세상의 철학도 아니고, 기계적인 정보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말씀은 너무 평범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가장 분명한 고백입니다. 세상이 무엇을 진리라고 주장하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붙들고 들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모든 것을 판단한 뒤에 말씀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구구단을 배울 때 매번 모든 원리를 다 이해하고 판단한 뒤 외우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외워 두고 나중에 삶에서 사용합니다. 매번 2 곱하기 8을 여덟 번 더하여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2 곱하기 8은 16”이라고 배워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말씀은 좋고 저 말씀은 싫다고 골라서 받으면, 날마다 단것만 먹는 아이와 같습니다. 사탕만 먹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이,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 사람은 믿음으로 자라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판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지”라고 먼저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 오늘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종을 살펴 주옵소서. 깨끗하게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는 삶은 막연한 느낌이나 관념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옛 번역에서는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살아 있고 움직이며,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는 주체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겉모습만 다루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의 생각과 뜻까지 드러내고 판단합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이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삶의 일부만 다루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직접 기록되지 않은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충족하며 종결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충족성과 완전성과 종결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명료하게 주어졌습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들을 수 있도록 단순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이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거룩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구별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자신에게 드려진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명령과 은혜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명령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 없이 책임만 지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함을 주십니다.
레위기 20장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이 있으면 그 명령을 이루시는 약속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저주와 같은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절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도 은혜이고, 지금 살아가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약함 자체를 좋게 여기거나 죄를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강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낮고 약한 곳으로 흐릅니다. 내가 강하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오셨고 병든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기도는 진리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거룩함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의 생각과 뜻이 판단받고, 책망받고, 바르게 되며,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내 감정과 형편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붙들고, 지키며, 그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4.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증인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세 번째 기도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본래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내었다”는 말씀은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nto the world”입니다.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세상을 멀리서 평가만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곳이고, 그 안에서 복음을 드러내야 할 곳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비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상 안에 들어가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곧바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이 많고 세상이 악하니 차라리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면 누구나 “주여, 차라리 데려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직장 속으로 보내시고, 학교 속으로 보내시고,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가정과 사회와 삶의 현실 속에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의 삶과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믿고 있다면 증인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직 교회가 없는 곳이 있기 때문에 증인이 필요합니다.
땅끝은 단지 지리적으로 먼 곳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곳이 땅끝이고,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땅끝입니다.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땅끝까지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이제 교회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왜 문을 닫는지를 살피고, 그 문제를 보완하여 더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에는 계속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으로 보내심과 거룩은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목적은 세상과 단절시켜 따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거룩입니다. 제자들은 진리로 구별되고,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세상 속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바울과 베드로와 모든 제자가 그러했듯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능력과 생명이 모두 주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받은 것으로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참된 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휴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것이 참된 쉼이라는 뜻입니다.
지상의 삶에서는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쉼이고, 천상의 삶에서는 주의 품 안에서 주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쉼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포도원 안에,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무는 것이 샬롬입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성도는 집 안에 머물며 맡겨진 일을 감당합니다. 잠시 쉰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리를 떠나고 방심하면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쫓기고 싸우던 때에는 긴장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암몬과의 전쟁에서 요압만 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렀습니다. 저녁때 일어나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았고, 그로 인해 우리아를 죽이는 큰 죄에 빠졌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떠나 자기 욕망을 따라 방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참된 쉼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마음껏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 세상 속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남길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직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에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지만, 성도들을 위하여 육신에 머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이유는 주께서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기면 주님께서 또 맡기십니다. 달란트는 선물입니다. 처음도 은혜이고 마지막도 은혜입니다. 달란트로 시작했다가 공로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 은혜를 남기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받은 은혜로 주의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하여 또 은혜를 남깁니다.
과거는 감사의 영역이고, 현재는 은혜의 영역이며,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었는지 모든 사정을 단순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로 과거를 덮어야 합니다.
현재는 은혜를 누리는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선물을 주시고 나중에는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명령하시면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은사와 은혜도 함께 주십니다.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은혜를 남길 때 주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자는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받은 달란트로 주의 일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네 번째 기도는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주님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주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모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시며 십자가를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니신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는 평안과 사랑과 기쁨에 관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이 반복되는 말이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허전해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고, 주님 없이 어떻게 살아갈지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도 주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곁을 떠나시는 것처럼 보여도 성령으로 제자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도 근심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고 싶지만 내 능력과 형편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근심이 생깁니다. 말씀을 더 전하고 싶고, 교회를 더 섬기고 싶고, 여러 곳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싶지만 현실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친히 이루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시며,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형편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과 소유와 관계와 성공에서 오는 기쁨은 그것을 잃으면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은 이 기쁨이 기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받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아들의 공로와 중보를 의지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친히 행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과 기쁨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고, 아버지께서 들으시며, 주님께서 친히 이루실 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천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다고 찬송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쁨이 흐릅니다.
주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계속 화만 내시고 닦달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쁨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기쁨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의 임마누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형편이 좋아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고, 형제자매와 하나 되게 하시며,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세상 속으로 보내어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 가운데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어떤 사람은 왼발을 디딤발로 삼고 오른발을 따라오게 하며, 어떤 사람은 오른발을 디딤발로 삼고 왼발을 따라오게 합니다. 한쪽만 계속 사용하면 그쪽이 아프게 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왼발과 오른발에 모두 마음을 두고 균형 있게 딛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눈을 감고 걸으면 얼마 가지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깨어 있지 않으면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과 형편에 끌려가면 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자녀라는 신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나 된 것으로 감사하고, 이 땅에 생명을 받은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주님께서 달란트와 은혜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이 땅에 두신 것은 남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맡기신 일이 있고, 받은 은혜로 감당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자녀 됨이 보전되도록, 교회가 하나 되도록,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그리고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는 감사로 받고, 현재는 은혜로 살아가며, 미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리가 아니라 제자로, 외인이 아니라 자녀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삶의 주어로 삼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기쁨의 임마누엘이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026년 07월 12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5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요한복음 17:9-19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녹취록
1.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오늘은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5번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지난주와 이번 주의 본문을 겹쳐서 전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같은 본문을 두 주에 걸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는 그만큼 한 번의 설교로 다 담아내기 어려운 귀한 말씀입니다.
전체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은 특별히 귀합니다. 기도는 인성에 따라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참된 영혼과 육체를 지닌 온전한 사람으로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인성에 따라, 영혼으로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부터 5절까지에서 주님은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이 땅에서 높임을 받고 편안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아들의 영화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어지는 6절부터 19절까지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당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성찬을 받고 나간 뒤였으므로, 주님은 남아 있던 열한 제자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2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앞으로 주님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교회를 위한 기도이며, 앞으로 믿게 될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적 기도에는 기도의 흐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으며, 앞으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과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위하여 드린 참으로 귀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려면 먼저 누가 제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무리가 아니라 제자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모두 제자는 아닙니다. 주님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 주님의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다면 무리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주실 수 있는지, 주님을 따라가면 내 형편이 얼마나 나아질 수 있는지,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만 바라본다면 아직 무리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면 제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보다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주님 자신으로 기뻐한다면 제자입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형편이 어떠한지, 내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 내가 건강한지, 내가 잘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면 무리의 모습에 머물 수 있습니다. 형편이 좋으면 기뻐하고 형편이 어려우면 낙심하며, 무엇을 많이 가지면 믿음이 좋아진 것 같고 무엇을 잃으면 주님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낀다면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라본다면 제자입니다.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보고, 주님으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나의 신분을 기뻐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심리적인 상태나 윤리적인 조건이나 소유에 따라서 장마철에 바람 부는 대로 깃발이 흔들리듯 이리저리 흔들린다면 무리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과 주님 안에서 받은 신분을 붙드는 사람은 제자입니다.
그러면 제자는 누구입니까?
첫째로, 제자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들에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자기 스스로 주님을 선택하여 제자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께서 택하시고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자들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제자의 시작은 자기 결단이나 자기 공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택하심과 아들에게 주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을 더 잘했기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께 속하고 아들에게 주어진 사람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본래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세상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본래 세상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부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생업이 있었고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더 이상 세상을 자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자신의 신분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그렇다고 생업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직장과 가정과 일상의 자리를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중심과 가장 중요한 신분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제자는 자신이 가장 먼저 천국 시민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속한 마음을 그대로 지닌 채 주님을 따라다니면 무리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중심은 여전히 세상에 있고, 세상이 주는 인정과 소유와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면 무리입니다. 그러나 세상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자신의 첫째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간다면 제자입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을 멀리 계신 어떤 신으로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녀답지 않게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의심하고, 괜히 두려워하고, 괜히 걱정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지, 내가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누가 먼저 걱정합니까? 자녀가 자신을 걱정하기 전에 자녀를 낳은 아버지가 먼저 걱정합니다. 자녀가 자신의 필요를 다 헤아리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살피고 돌봅니다. 제자는 바로 이 아버지를 가진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신분을 뜻합니다. 제자는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심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대하지 않고,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돌보시는 아버지로 믿는 사람입니다.
넷째로, 무엇보다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자기 생각과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무가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과 수분으로 자라듯이 제자는 말씀으로 자라갑니다. 말씀을 받고,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제자의 성장은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성장이 아닙니다. 뿌리에서 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나무가 자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는 제자로 자라갈 수 없습니다. 제자는 말씀을 자기 판단 아래 두고 필요한 부분만 골라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아래 자신을 두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섯째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됩니다. 지난주에 기쁨거리, 소망거리, 감사거리, 영광거리라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제자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된다는 것은 제자 자신이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자의 믿음과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을 지키며,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소유와 성취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며 주님이 구주이심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제자가 하나님의 영광거리가 된다는 것은 제자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신분에 걸맞은 기도를 오늘 주님께서 드리십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막연히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세상에서 불러내신 자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 말씀을 받고 지키는 자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제자라는 사실을 새겨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꾸 잊기 때문에 다시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무리는 주님의 손을 바라보지만 제자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무리는 주님의 주머니에 무엇이 있는지를 궁금해하지만 제자는 주님 자신을 사랑합니다. 무리는 자신의 형편과 소유에 따라 흔들리지만 제자는 주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라봅니다. 무리는 무엇을 얻을 때 기뻐하지만 제자는 주님으로 기뻐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의 신분이 보존되고, 그들이 하나가 되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 증인으로 살아가며,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도록 기도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기도를 크게 네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둘째는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어 증인으로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넷째는 주님의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모든 기도에 앞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아버지의 것이었다가 아들에게 주어진 사람이며,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이며, 말씀을 받고 지키는 사람이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무엇을 주실 것인가만 바라보지 말고 주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형편과 소유와 감정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주님 안에서 받은 자녀의 신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으로 기뻐하고,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뻐하며, 말씀을 받고 지키는 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첫 번째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1절과 12절에서 주님은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사복음서 병행 강해를 하면서 지난주와 이번 주에 같은 본문을 겹쳐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말씀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주님의 기도가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고 그 흐름을 나누어 설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분명히 드러나는 기도는 제자들의 보전과 하나 됨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단지 사람을 부르는 명칭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이름은 신분이고, 자격이며, 그 존재의 실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하신 것은 매우 깊은 뜻을 지닌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본래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객관적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찾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아들이 아버지를 향하여 부른 이름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로 그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주어진 신분이며 특권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조상과 허다한 증인들이 있지만, 그 정확한 수를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여 그 귀함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첫 번째 기도는 바로 이 자녀의 신분을 잃지 않도록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이 자녀이자 상속자인 그 신분에 머물도록 기도하십니다.
자녀 됨을 보전한다는 것은 샬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샬롬은 무엇이 하나 더 생기고, 형편이 더 좋아지고, 풍족해져서 만족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샬롬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 계시고 우리는 자녀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샬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유혹을 받은 것은 자기 자리를 떠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 질서가 깨질 때 샬롬도 깨지고 사망이 들어옵니다. 샬롬의 반대는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녀로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샬롬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 신분 안에 머무는 것이 평안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 가운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녀 됨이 끝까지 보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에 끝내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전은 아무 까닭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께서 이루신 구속과 지금도 계속되는 중보로 우리가 보전됩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외인이요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막힌 담이 허물어져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집 밖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외인이나 나그네처럼 살지 않고, 집을 떠난 사람처럼 방황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자녀 됨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반복해서 사용하신 “하물며”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압니다. 자녀가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공중의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입히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호의를 베푸시고, 관용을 베푸시고, 돌보시며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과 호의와 관용과 돌보심과 자비가 우리를 붙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담대하게 고백했습니다. 고난이 오고, 물에 빠지고, 매를 맞고, 여러 위험을 당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고, 자녀의 신분을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단지 각자 자녀의 신분을 보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자녀 됨과 하나 됨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아버지의 자녀라면 서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모두 한 근원에서 났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형제자매인 이유는 자주 만나서도 아니고, 무엇을 많이 나누어서도 아닙니다. 한 아버지에게서 난 자녀이기 때문에 형제자매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서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 교회가 정말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형이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이 형에게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자녀 됨을 보전하시고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은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자녀들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이 서로 다투었을 때 야곱의 마음이 아팠고, 다윗의 자녀들이 서로 싸웠을 때 다윗의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파조차 여러 파 가운데 하나의 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고 더 좋은 것을 함께 소망한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바람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기다리고, 서로 바라고, 서로 품어 주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울타리 안에 함께 모여 있고, 여러 꽃이 하나의 꽃병에 꽂혀 있듯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 샬롬입니다. 각자가 자녀의 자리를 지키고,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주님의 첫 번째 기도입니다.
3.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두 번째 기도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주님은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세상에서든 교회에서든 진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날은 인공지능과 정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결국 어디에 참된 지식이 있고, 무엇이 옳으며,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땅을 판다고 하면 얼마나 힘껏 파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디를 파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파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지식과 정보가 노동과 비용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진리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지식과 주장과 해석이 넘쳐나지만 무엇이 참된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변하지 않는 진리는 세상의 철학도 아니고, 기계적인 정보도 아닙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말씀은 너무 평범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가장 분명한 고백입니다. 세상이 무엇을 진리라고 주장하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없이 붙들고 들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모든 것을 판단한 뒤에 말씀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구구단을 배울 때 매번 모든 원리를 다 이해하고 판단한 뒤 외우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외워 두고 나중에 삶에서 사용합니다. 매번 2 곱하기 8을 여덟 번 더하여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2 곱하기 8은 16”이라고 배워 두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 말씀은 좋고 저 말씀은 싫다고 골라서 받으면, 날마다 단것만 먹는 아이와 같습니다. 사탕만 먹는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이, 듣고 싶은 말씀만 듣는 사람은 믿음으로 자라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판단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지”라고 먼저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 오늘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종을 살펴 주옵소서. 깨끗하게 하시고 실족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어가 되는 삶은 막연한 느낌이나 관념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가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시고, 바르게 하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옛 번역에서는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살아 있고 움직이며,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판단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판단하는 주체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겉모습만 다루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의 생각과 뜻까지 드러내고 판단합니다.
그 살아 있는 말씀이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17절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삶의 일부만 다루고,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 직접 기록되지 않은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성경을 충분히 알지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하고 충족하며 종결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충족성과 완전성과 종결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명료하게 주어졌습니다. 누구나 믿음으로 들을 수 있도록 단순하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이 말씀으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거룩은 우리의 결심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구별하시고 깨끗하게 하시며, 자신에게 드려진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명령과 은혜의 관계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명령하실 때, 우리에게 능력 없이 책임만 지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함을 주십니다.
레위기 20장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어서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명령이 있으면 그 명령을 이루시는 약속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시고, 동시에 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저주와 같은 부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절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이루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도 은혜이고, 지금 살아가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약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약함 자체를 좋게 여기거나 죄를 정당화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강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낮고 약한 곳으로 흐릅니다. 내가 강하다고 주장하고 스스로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은혜를 구하겠습니까? 주님은 죄인을 찾으러 오셨고 병든 자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기도는 진리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 거룩함의 방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의 생각과 뜻이 판단받고, 책망받고, 바르게 되며,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내 감정과 형편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이끌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판단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붙들고, 지키며, 그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4.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증인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세 번째 기도는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시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본래 세상에 속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떠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보내었다”는 말씀은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into the world”입니다.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세상을 멀리서 평가만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야 할 곳이고, 그 안에서 복음을 드러내야 할 곳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비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세상 안에 들어가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곧바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이 많고 세상이 악하니 차라리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받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면 누구나 “주여, 차라리 데려가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십니다. 직장 속으로 보내시고, 학교 속으로 보내시고,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가정과 사회와 삶의 현실 속에서 제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곳에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제자의 삶과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미 믿고 있다면 증인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는 사람이 있고, 아직 교회가 없는 곳이 있기 때문에 증인이 필요합니다.
땅끝은 단지 지리적으로 먼 곳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아직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곳이 땅끝이고, 아직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이 땅끝입니다.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씀은 땅끝까지 교회를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이제 교회를 세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왜 문을 닫는지를 살피고, 그 문제를 보완하여 더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복음이 필요한 곳에는 계속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으로 보내심과 거룩은 서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목적은 세상과 단절시켜 따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그들을 세상 속으로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은 단순히 구별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거룩입니다. 제자들은 진리로 구별되고,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세상 속에 보냄을 받습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와 바울과 베드로와 모든 제자가 그러했듯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은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값으로 산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시간과 능력과 생명이 모두 주님께 속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처럼, 받은 것으로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참된 쉼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휴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것이 참된 쉼이라는 뜻입니다.
지상의 삶에서는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쉼이고, 천상의 삶에서는 주의 품 안에서 주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쉼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포도원 안에,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무는 것이 샬롬입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성도는 집 안에 머물며 맡겨진 일을 감당합니다. 잠시 쉰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리를 떠나고 방심하면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쫓기고 싸우던 때에는 긴장하며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암몬과의 전쟁에서 요압만 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렀습니다. 저녁때 일어나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았고, 그로 인해 우리아를 죽이는 큰 죄에 빠졌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에게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떠나 자기 욕망을 따라 방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참된 쉼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마음껏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이 세상 속에서 증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남길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직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에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사도 바울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지만, 성도들을 위하여 육신에 머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는 이유는 주께서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기면 주님께서 또 맡기십니다. 달란트는 선물입니다. 처음도 은혜이고 마지막도 은혜입니다. 달란트로 시작했다가 공로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 은혜를 남기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받은 은혜로 주의 일을 하고, 그 일을 통하여 또 은혜를 남깁니다.
과거는 감사의 영역이고, 현재는 은혜의 영역이며,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었는지 모든 사정을 단순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감사로 과거를 덮어야 합니다.
현재는 은혜를 누리는 영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선물을 주시고 나중에는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명령하시면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에는 그 일을 감당할 은사와 은혜도 함께 주십니다.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사용하여 은혜를 남길 때 주님께서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제자는 자기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받은 달란트로 주의 일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드리신 네 번째 기도는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주님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주님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모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시며 십자가를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니신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에는 평안과 사랑과 기쁨에 관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이 반복되는 말이 기쁨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허전해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고, 주님 없이 어떻게 살아갈지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자신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도 주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주님의 기쁨이 제자들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곁을 떠나시는 것처럼 보여도 성령으로 제자들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0절에서는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근심은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해야 하는데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도 근심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을 하고 싶지만 내 능력과 형편이 따라가지 못할 때 근심이 생깁니다. 말씀을 더 전하고 싶고, 교회를 더 섬기고 싶고, 여러 곳에서 주의 일을 감당하고 싶지만 현실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근심이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친히 이루시고, 성령으로 능력을 주시며, 우리의 부족함 가운데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2절에서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형편이 바뀌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과 소유와 관계와 성공에서 오는 기쁨은 그것을 잃으면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은 이 기쁨이 기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지금까지 제자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받고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아들의 공로와 중보를 의지하여 아버지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친히 행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약속과 기쁨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아들의 이름으로 구하고, 아버지께서 들으시며, 주님께서 친히 이루실 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천사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가운데 평화가 있다고 찬송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쁨이 흐릅니다.
주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계속 화만 내시고 닦달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기쁨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기쁨이 우리와 함께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쁨의 임마누엘”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형편이 좋아졌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제자로 삼으시고,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를 보전하시고, 형제자매와 하나 되게 하시며,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고, 세상 속으로 보내어 증인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 가운데 주님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어떤 사람은 왼발을 디딤발로 삼고 오른발을 따라오게 하며, 어떤 사람은 오른발을 디딤발로 삼고 왼발을 따라오게 합니다. 한쪽만 계속 사용하면 그쪽이 아프게 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왼발과 오른발에 모두 마음을 두고 균형 있게 딛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칩니다. 눈을 감고 걸으면 얼마 가지 못해 엉뚱한 방향으로 갑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깨어 있지 않으면 치우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과 형편에 끌려가면 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자녀라는 신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나 된 것으로 감사하고, 이 땅에 생명을 받은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은 주님께서 달란트와 은혜와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나를 이 땅에 두신 것은 남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맡기신 일이 있고, 받은 은혜로 감당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자녀 됨이 보전되도록, 교회가 하나 되도록, 우리가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세상 속에서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그리고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여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는 감사로 받고, 현재는 은혜로 살아가며, 미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리가 아니라 제자로, 외인이 아니라 자녀로,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은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삶의 주어로 삼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기쁨의 임마누엘이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