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2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8 |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 당하심 | 마 26:57-68; 막 14:53-65; 눅 22:63-71; 요 18:12-14, 19-24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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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02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8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 당하심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 26:57-68; 막 14:53-65; 눅 22:63-71; 요 18:12-14, 19-24

(마태복음 26:57-68)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마가복음 14:53-65)   [53]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55]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56]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  [57]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 하여 이르되  [58]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59] 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  [60]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이르되 너는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1]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3]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64]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  [65]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누가복음 22:63-71)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요한복음 18:12-14, 19-24)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9]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녹취록

 


1. 혼돈의 재판정에 서신 참된 대제사장
 
제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에어컨을 틀어 놓았는데도 덥고,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몸이 앞으로 쏠렸습니다. 그런데 내릴 때가 되자 기사 어르신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깍듯하게 인사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 참 신기하고 오묘한 나라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제 마음에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밤의 모습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날 밤의 재판은 모든 것이 애매하고 어긋난 혼돈, 곧 카오스였습니다. 대제사장과 빌라도와 헤롯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카오스의 카오스였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직함도 없으며 올바름도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직을 아부로 얻고, 사람을 속이며, 자기 배를 불렸습니다. 모든 것이 어긋나고 뒤틀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신데 붙잡히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징계는 곧 심판입니다.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 얼마나 힘들고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바로 그 심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역사책을 읽다 보면 당시의 제사장과 왕과 통치자들이 얼마나 악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제사장은 제사장답지 않았고 왕은 왕답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도 괜찮은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음흉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친히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의 제사장들에게 신문당하시는 모습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체포되실 때 평소에는 서로 앙숙처럼 지내던 유대인들과 로마의 통치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죄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아담이 처음 죄를 지은 것이 배가 고팠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아담은 사물의 이름을 지을 만큼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죄를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어둠은 이유 없이 빛을 대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의 패가 붙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몰아갔습니다. 당시 헤롯은 참된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9장 10절은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을 말씀하고, 사무엘하 7장 13절 이하는 다윗의 후손에게서 왕이 나올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다 지파에 속하시고 이새와 다윗의 후손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언약 가운데 약속된 참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려 한다고 몰아갔고, 로마인들에게는 가이사를 대적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한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유일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사장이시자 왕이시며, 왕이시자 제사장이십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유일한 제사장이십니다. 구약에서는 이삭이 이를 예표합니다. 이삭은 실제로 칼에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제물이 되는 일을 받아들였고, 아버지 아브라함도 그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실제로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친히 제사장이 되시고 동시에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신 후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잡혀가셨습니다. 성경에는 ‘대제사장들’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지만, 본래 대제사장은 한 사람입니다.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였습니다. 그런데도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사실상의 실권자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오랫동안 대제사장직을 맡아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결집하지 못하도록 대제사장을 수시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혼란 속에서도 안나스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제사장직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다섯 아들과 한 명의 사위까지 모두 대제사장이 되게 했습니다. 안나스 가문이 당시 종교 권력의 중심을 장악한 것입니다.
안나스는 로마 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과도하게 거두고 성전의 매매와 환전을 장악했습니다. 자기 가문의 목장에서 기른 제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처럼 만들고, 제대로 먹이지도 않은 야윈 짐승을 비싸게 팔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를 이용하여 자기 가문의 부와 권력을 쌓았습니다.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그 배후에는 안나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체포한 뒤 먼저 안나스에게 데려갔고, 안나스는 주님을 다시 가야바에게 보냈습니다. 혼돈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의 제사장들 앞에 아무 죄도 없으신 참된 대제사장께서 서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불법과 악의 한가운데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2.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당시 현직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그 배후에는 안나스가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 가문의 권력 구조 안에서 실제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며, 로마인들이 와서 자신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유대를 완전히 합병하여 직접 통치하기보다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야바는 예수님께서 왕이 되려 하신다는 사실을 로마가 빌미로 삼아 유대 민족을 짓밟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요 11:50)라고 말했습니다. 사나운 사자가 달려드니 예수님 한 사람을 던져 주어 민족을 살리자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지위와 민족의 안전을 지키려는 정치적인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야바의 악한 말까지 사용하여 대속의 원리를 드러내셨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지만,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려 했지만 오히려 축복하게 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극악한 죄인의 입을 통해서도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다는 진리를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가야바에게는 대제사장다운 모습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주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진리를 드러내셨음에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은 사람의 말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하고 납득시키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임하셔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임하시면 우리는 말씀을 “아멘, 아멘” 하며 받습니다. 돌같이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살과 같은 마음이 되고, 말씀이 떨어지면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아멘은 단순히 말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아멘이 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신 것 자체가 표적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곧 자신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숨어서 말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문을 받으실 때에도 자신이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했는데 어찌하여 자신에게 묻느냐고 하셨습니다. 들은 사람들에게 물으면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안나스 앞에 서 있던 아랫사람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잘못을 말씀하셨다면 그 잘못을 증언하고, 옳게 말씀하셨다면 어찌하여 자신을 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을 변호하지 못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때리는 그들의 불의와 재판의 부당함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세상의 대제사장들은 참된 대제사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악한 계획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희생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는 참된 대속을 이루셨습니다.
 
 
3. 거짓 증언으로 정죄받으신 무죄한 주님
 
예수님에 대한 신문은 그분 자신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관한 죄목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재판한 것이 아니라, 먼저 예수님을 죽이기로 정한 뒤 그 목적에 맞는 죄목을 찾으려 했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와 같은 곳으로서 상당한 실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권한은 없었습니다. 안나스와 가야바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할 죄목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실제로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려면 로마의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규범인 미쉬나를 보면 사형 판결은 하루 만에 내려서는 안 되며 낮에 해야 하고 밤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급하게 죽이려고 모여 즉결 심판하듯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안식일이나 명절에는 사형을 언도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은 공적인 자리에서 해야지 대제사장의 집에서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판은 이 모든 원칙에서 어긋났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도 잘못하거나 그릇되게 행하신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거짓 증거를 찾고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조차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예수님을 죽일 만한 죄목을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성전을 파괴하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주님께서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습니다.
당시는 헤롯 성전을 짓기 시작한 지 4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완공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빌미로 주님께서 성전을 파괴하고 소요를 일으키려 했다고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증언한 것이 아니라, 말씀의 뜻을 왜곡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죄목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거짓 증언 앞에서 잠잠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일어나 예수님께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주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침묵하신 것은 할 말이 없거나 그들의 거짓 증언에 굴복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도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받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재판의 모든 절차가 불법이었고 증언도 서로 맞지 않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짓은 진리를 정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의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4.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거짓 증언만으로는 예수님을 정죄할 죄목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직접 신문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묻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찬송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로마서 9장 5절은 우리 주님을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만 찬송받으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먼저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묻고, 다시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했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마르다도 동일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며 ‘메시아’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감당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주님의 인성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는 예수님의 신성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안에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가 사람의 아들로 바뀌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시고 스스로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셨습니다. 잠시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셨거나 사람의 아들이 아니셨던 적이 없습니다. 참하나님과 참사람이라는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되신 주님께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가운데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알리고 이루시는 선지자이십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시는 제사장이시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제사장이 되어 자신을 드리시고, 왕으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위로 자신을 드리시는 것이 제사장의 직분이라면, 아래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왕의 직분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계속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영원히, 땅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셔야 또 다른 보혜사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원보혜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며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5. “나는 있다”라고 증언하신 주님
 
마가복음에서 대제사장이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자 주님께서는 “내가 그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 곧 “나는 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경우에 잠잠하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하셨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신지를 묻는 질문에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극악한 죄인 가야바의 입을 통해 계속 진리를 말하게 하셨습니다. 앞에서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을 살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게 하셔서 대속의 원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제는 “네가 찬송받으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말씀과 초대교회의 찬송을 알고 있던 대제사장이 정작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식 자체가 참된 지식이 아님을 봅니다. 하나님께로 나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셨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의 복이 그만큼 큽니다.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자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도 “에고 에이미”, 곧 “나는 있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지난주에 주님께서 잡히실 때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계시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은 메시아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메시아께서 오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에고 에이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께서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가장 급박한 순간, 곧 붙잡히시고 재판받으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여러 말을 붙여 고백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주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은 주님께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제 신약 시대에는 다른 제사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곧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것도 그들의 입을 통하여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인성에 따라서는 보좌 우편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 지금 이곳을 비롯한 모든 곳에 계십니다. 때가 되면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재판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무릎을 꿇어 “아멘, 주 예수여”라고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야바와 그 무리는 오히려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는 극한 부인과 저주의 표시였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외쳤으며,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사탄이 주는 광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온갖 수욕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6-8). 또한 주님께서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시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시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셔도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보다 더 복된 신약 시대의 자리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고백해야 합니다. 나보다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영원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막연히 세상 죄만 지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이며, 나를 위하여, 나 대신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내가 그분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신약 시대에 진리의 영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며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전혀 없으신 주님께서 그 악한 자들 앞에 서서 우리 대신 징계받으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샬롬과 에이레네, 곧 화평을 누립니다. 성령 안에서 하늘을 보고 꽃을 바라보면서도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징계당하셨기에 내가 이 질서와 아름다움을 누리는구나”라고 고백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