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누가복음 22:54-62)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요한복음 18:15-18, 25-27)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녹취록
1. 주님께서 세세하게 이끄시는 사람
주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 동안 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예언의 당사자이시면서 그 예언을 친히 이루신 분이십니다. 앞으로 성전이 무너질 것과 대환난이 올 것,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며 부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도 미리 말씀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라고 하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시는 가운데서도 한 사람을 세세하게 살피십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를 읽어 보면, 큰 강물처럼 역사가 흐르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를 살피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시며,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돌보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세세한 관심과 사랑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시몬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이며, 우리말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지만, 주님은 그가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와 사도가 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씀의 터 위에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주님은 한 사람의 생애를 이처럼 세세하게 이끄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과 예언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우리를 향한 약속의 예언입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저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우리가 “주여”라고 부르면 그 뒤의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알려 주십니다. 어떤 한 가지 일로 기도를 제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계시고 내가 그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주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잡히실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베드로의 생애를 세세하게 주장하시고 이끄셨습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다스리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입니다. 칼빈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주관하신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붙드시고 이끄신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5–17).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가 교회의 사도로서 일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님은 오늘 본문의 부인을 통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십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시고, 바로 그 실패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2. 부인과 통곡까지도 사용하시는 은혜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을 통한 회개와 통곡으로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고,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소원을 올려 드리셨습니다(히 5:7–8). 그러므로 우리를 통곡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아주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이 등장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질문했고,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닭의 울음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작은 것들을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의 지붕 위에 닭 모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그의 돌이킴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세세하게 주장하시며 끝까지 이끌어 가셨습니다.
회개와 통곡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베드로만 심히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보고 가슴을 치며 울고 뒹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주홍보다 붉습니다. 흰 눈 위에 붉은 피가 떨어지면 그 붉음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그러나 그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집니다.
통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뱉어 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죄 덩어리를 뱉어 내야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미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려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하여 앞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여종이나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복음서마다 질문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첫 번째 질문보다 한 가지 내용이 더해집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당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의 ‘도당’이라는 표현은 예수께 속한 자, 예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반역의 무리라는 식으로 강하게 이해하기보다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할 때의 ‘그리스도의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에고 에이미’, 곧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람들을 이끌고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고, 물 위를 걸어오실 때도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고 우크 에이미’, 곧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제자인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3.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에게 던져진 질문에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지,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그의 제자입니다. 내가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고백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여왕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머리라고 시인했기 때문에 많은 언약도가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에는 첫 번째 부인보다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첫 번째에는 그저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맹세란 하나님의 이름과 뜻과 법을 두고 자신의 말이 옳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면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백 때문에 붙잡혀 가시고 죽음에 이르실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오.”
이제 세 번째 부인이 나옵니다. 그곳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베드로가 귀를 잘랐던 사람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세 번째로 다시 “아니요.”라고 부인합니다.
세 번째 부인에는 또 하나의 표현이 더해집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 26:74)
첫 번째에는 그냥 부인했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며 부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한 대상은 자기 신세가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저주는 문밖에 있는 것이고, 속하지 않으며 분리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과 반대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무관하다. 나와 예수님은 서로 다른 편에 있다.”
베드로의 부인은 이렇게 점점 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인했지만, 다음에는 맹세하며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닭이 울 때’라는 말은 밤 12시부터 새벽 3시 사이를 가리키는 시간 개념이었습니다. 닭은 새벽 시간에 여러 차례 울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한 번 울었다고 하지만, 이 말씀들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닭이 한 번만 울고 곧바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계속 울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닭의 울음은 우리나라에서 인경이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 것처럼 새벽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웨일스에 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떻게 부흥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함께 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서 교회에 가서 기도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닭을 보면 베드로의 부인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닭의 울음에서 새벽기도도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교회로 갔습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한 뒤 동창이 밝아 오고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닭의 울음에는 베드로의 부인뿐 아니라 새벽에 주님을 찾았던 한국 교회의 기억도 담겨 있습니다.
4.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만 특별히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돌이키셔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를 보시고 돌이키셔서,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사랑함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이 많아야 사랑함도 많습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트레포’(στρέφω)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주님은 몸을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자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통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신앙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닥불일 수도 있고 닭의 울음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던 때에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주님을 붙들고 뒹굴었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억과 작은 일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부인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부인에는 그보다 더 강한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하여 더욱 강하게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몸을 돌이켜 보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부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먼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고, 그다음에는 주님의 긍휼의 시선을 바라보게 합니다.
‘부인한다’는 말의 반대는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말은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인데,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I am.”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환난 가운데서도, 붙잡혀 가시는 가운데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일인칭의 존재가 되시며, 우리가 어떤 목적어를 붙여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목적어를 붙여 기도를 제한하지 말고, 그저 “주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성령의 역사로 그 뒤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힘들수록 더욱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 곧 시인하는 것입니다.
5.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I am not.”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하시면 우리도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I am a Christian.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I am of You.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I belong to You. 나는 주님께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향하여 그가 예수님의 도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도 아니고 주님의 제자도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은 얼마나 귀한 통곡입니까? 그것은 쓴 눈물이지만 동시에 단 눈물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보고 흘린 눈물이면서,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흘린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기우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깨어져서 주님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십자가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 판단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 너머에서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싸매며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와 연약함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지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부인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몸을 돌이켜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의 그 시선은 베드로를 버리는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게 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긍휼의 시선이었습니다.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의 울음까지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신 주님은 그의 생애를 끝까지 붙드시고 이끄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땀을 흘린 뒤 잠시 앉아 하늘과 산과 도시를 바라보며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함께하시옵소서. 하나님, 살리시옵소서. 주께서 함께하시옵소서.”
그저 “주여”라고 부르고 그 뒤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주여”라고 부르면 성령께서 그다음 기도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아니라.”라고 했지만, 주님은 그를 돌이키시고 다시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2026년 08월 09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79
베드로의 부인: "나는 아니라"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 26:69-75; 막 14:66-72; 눅 22:54-62; 요 18:15-18, 25-27
(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누가복음 22:54-62)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요한복음 18:15-18, 25-27)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17]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녹취록
1. 주님께서 세세하게 이끄시는 사람
주님은 이 땅에서 공생애 동안 많은 예언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예언의 당사자이시면서 그 예언을 친히 이루신 분이십니다. 앞으로 성전이 무너질 것과 대환난이 올 것,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며 부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도 거듭 예언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도 미리 말씀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에게 마리아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라고 하시고, 마리아에게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역사를 이루시는 가운데서도 한 사람을 세세하게 살피십니다.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를 읽어 보면, 큰 강물처럼 역사가 흐르는 중에도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를 살피시고, 까마귀를 통하여 먹이시며,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돌보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세세한 관심과 사랑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시몬에게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게바를 번역하면 베드로이며, 우리말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지만, 주님은 그가 장차 사람을 낚는 어부와 사도가 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의 고백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말씀의 터 위에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세워질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어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주님은 한 사람의 생애를 이처럼 세세하게 이끄셨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과 예언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영원히 살고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우리를 향한 약속의 예언입니다. 언제나 동일하신 주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그저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주여, 도우소서. 주여, 살피소서. 주여, 쉬게 하소서. 주여, 역사하소서. 주여, 고치소서.”
우리가 “주여”라고 부르면 그 뒤의 기도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알려 주십니다. 어떤 한 가지 일로 기도를 제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계시고 내가 그 앞에 있다는 마음으로 “주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잡히실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베드로의 생애를 세세하게 주장하시고 이끄셨습니다.
베드로가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다스리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베드로 된 것입니다. 칼빈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주관하신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베드로도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붙드시고 이끄신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15–17).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가 교회의 사도로서 일할 것을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주님은 오늘 본문의 부인을 통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십니다. 베드로가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 이르게 하시고, 바로 그 실패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2. 부인과 통곡까지도 사용하시는 은혜
주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인을 통한 회개와 통곡으로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우리 주님도 아들이시지만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고, 눈물과 통곡과 간구로 소원을 올려 드리셨습니다(히 5:7–8). 그러므로 우리를 통곡하게 하시는 것도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은 아주 작고 미미해 보이는 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이 등장합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질문했고, 모닥불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닭의 울음이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작은 것들을 통하여 베드로의 마음을 돌이키셨습니다.
지금도 어떤 교회의 지붕 위에 닭 모양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과 회개를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그의 돌이킴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를 세세하게 주장하시며 끝까지 이끌어 가셨습니다.
회개와 통곡 없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베드로만 심히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보고 가슴을 치며 울고 뒹굴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죄는 주홍보다 붉습니다. 흰 눈 위에 붉은 피가 떨어지면 그 붉음이 얼마나 선명합니까? 그러나 그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집니다.
통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를 뱉어 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죄 덩어리를 뱉어 내야 다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항상 미쁘십니다. ‘미쁘다’는 것은 언제나 동일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부인하려면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자기를 부인하는 길은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리를 피하여 앞문 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 다른 여종이나 사람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복음서마다 질문한 사람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차이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질문에는 첫 번째 질문보다 한 가지 내용이 더해집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가리켜 예수와 함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도당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의 ‘도당’이라는 표현은 예수께 속한 자, 예수와 같은 무리에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반역의 무리라는 식으로 강하게 이해하기보다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라고 할 때의 ‘그리스도의 사람’도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서 사람들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지적했습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에고 에이미’, 곧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사람들을 이끌고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고, 물 위를 걸어오실 때도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에고 우크 에이미’, 곧 “나는 아니라.”라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계신 분으로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분의 제자인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3.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베드로에게 던져진 질문에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지, 예수님의 제자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 앞에서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내가 그의 제자입니다. 내가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고백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들은 여왕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머리라고 시인했기 때문에 많은 언약도가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나는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에는 첫 번째 부인보다 한 가지가 더해집니다.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첫 번째에는 그저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맹세란 하나님의 이름과 뜻과 법을 두고 자신의 말이 옳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면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백 때문에 붙잡혀 가시고 죽음에 이르실 것을 아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오. 나는 예수께 속한 사람이 아니오.”
이제 세 번째 부인이 나옵니다. 그곳에 서 있던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대제사장의 종 가운데 베드로가 귀를 잘랐던 사람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세 번째로 다시 “아니요.”라고 부인합니다.
세 번째 부인에는 또 하나의 표현이 더해집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마 26:74)
첫 번째에는 그냥 부인했고, 두 번째에는 맹세하며 부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한 대상은 자기 신세가 아니라 주님이었습니다. 저주는 문밖에 있는 것이고, 속하지 않으며 분리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과 반대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무관하다. 나와 예수님은 서로 다른 편에 있다.”
베드로의 부인은 이렇게 점점 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부인했지만, 다음에는 맹세하며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닭이 울 때’라는 말은 밤 12시부터 새벽 3시 사이를 가리키는 시간 개념이었습니다. 닭은 새벽 시간에 여러 차례 울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하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한 번 울었다고 하지만, 이 말씀들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닭이 한 번만 울고 곧바로 그친 것이 아니라 한동안 계속 울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닭의 울음은 우리나라에서 인경이나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 것처럼 새벽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웨일스에 갔을 때 한국 교회가 어떻게 부흥했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함께 간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새벽에 닭이 울 때 일어나서 교회에 가서 기도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닭을 보면 베드로의 부인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닭의 울음에서 새벽기도도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시계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들이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교회로 갔습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고 기도한 뒤 동창이 밝아 오고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닭의 울음에는 베드로의 부인뿐 아니라 새벽에 주님을 찾았던 한국 교회의 기억도 담겨 있습니다.
4.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만 특별히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이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신 주님께서 돌이키셔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자를 보시고 돌이키셔서,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사랑함도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함이 많아야 사랑함도 많습니다.
‘돌이키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트레포’(στρέφω)입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주님은 몸을 돌이켜 그를 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은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입니다. 겉으로 보면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들을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자신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통곡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작고 사소한 신앙의 기억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모닥불일 수도 있고 닭의 울음일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던 때에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주님을 붙들고 뒹굴었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억과 작은 일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주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부인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르네오마이’(ἀρνέομαι)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부인에는 그보다 더 강한 ‘아파르네오마이’(ἀπαρνέομαι)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주님을 향하여 더욱 강하게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몸을 돌이켜 보시는데,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부인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은 먼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고, 그다음에는 주님의 긍휼의 시선을 바라보게 합니다.
‘부인한다’는 말의 반대는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에서 ‘시인한다’는 말은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는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인데, 같은 말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하시면 우리도 “I am.”이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은 환난 가운데서도, 붙잡혀 가시는 가운데서도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일인칭의 존재가 되시며, 우리가 어떤 목적어를 붙여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만유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목적어를 붙여 기도를 제한하지 말고, 그저 “주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성령의 역사로 그 뒤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힘들수록 더욱 “주여”라고 부르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모로게오’(ὁμολογέω), 곧 시인하는 것입니다.
5.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I am.”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I am not.”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하시면 우리도 주님께 속한 사람임을 시인해야 합니다.
“I am a Christian.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I am of You.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I belong to You. 나는 주님께 속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향하여 그가 예수님의 도당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예수께 속한 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도 아니고 주님의 제자도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 통곡은 얼마나 귀한 통곡입니까? 그것은 쓴 눈물이지만 동시에 단 눈물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보고 흘린 눈물이면서,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며 흘린 회개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을 받으십니다. 상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기우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죄와 연약함 때문에 깨어져서 주님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 2:15)
십자가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 판단도 받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 너머에서 그 모든 것을 감싸고 싸매며 하나가 되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와 연약함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지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부인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몸을 돌이켜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의 그 시선은 베드로를 버리는 시선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곡하게 하며, 다시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긍휼의 시선이었습니다. 한 여종과 모닥불과 닭의 울음까지도 사용하여 베드로를 돌이키신 주님은 그의 생애를 끝까지 붙드시고 이끄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땀을 흘린 뒤 잠시 앉아 하늘과 산과 도시를 바라보며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함께하시옵소서. 하나님, 살리시옵소서. 주께서 함께하시옵소서.”
그저 “주여”라고 부르고 그 뒤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주여”라고 부르면 성령께서 그다음 기도를 주십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아니라.”라고 했지만, 주님은 그를 돌이키시고 다시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같은 말을 하며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나는 주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나 하나님께로 기울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