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6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0 | 가룟 유다의, '회개'가 아닌 '뉘우침' | 마 27:3-10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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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16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0


가룟 유다의, '회개'가 아닌 '뉘우침'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태복음 27:3-10

[3]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녹취록

 


1. 예수님의 정죄를 보고 스스로 뉘우친 유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부활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창세전에 작정된 구속사의 큰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났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고발했고, 누군가는 팔았으며, 누군가는 심문하고 때리고 침을 뱉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누군가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갔으며, 누군가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창으로 찔러 그 죽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고난에는 여러 사람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직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재물을 얻는 수단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을 판 자이며, 배신하고 배반한 자이고,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 주님은 자신을 파는 자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여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만, 유다가 뉘우치고 은 삼십을 성전에 던진 뒤 스스로 목매어 죽은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를 단순히 유다라고 하지 않고 “예수를 판 유다”라고 부릅니다. 유다가 당시 어느 자리에 있었는지,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는 광경을 직접 보았는지는 성경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팔아넘긴 예수님께서 정죄되셨다는 사실을 보거나 들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고발한 사람이 정죄되었다면, 그 사람이 죄인이라고 확신하는 자는 마땅한 결과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도리어 뉘우쳤습니다. 정죄된다는 것은 재판받고 징계받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유다는 주님께서 결박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으시는 모습을 통하여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나스와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받으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 온 공회가 모여 거짓 증인과 거짓 증거를 찾았습니다. 그것은 증거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직접 죽일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사형권은 로마에 있었지만, 공회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죄를 범했으므로 죽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씌운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주님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인정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그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위기의 순간에 진실을 피하여 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심문하는 자들의 질문을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 곧 “I am”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 곧 “I am not”이라고 말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과 함께 동일한 말을 해야 합니다. ‘호몰로게오’, 곧 주님과 함께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고백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주님, 그러하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주님과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했다며 고발했습니다.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죽음에 해당하는 중대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왜곡한 무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된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무고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말한 성전은 내 몸을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한 말씀만 하셔도 될 것 같았지만, 주님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잠잠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고 걸어가신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러한 정죄의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심문받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적어도 그 소식을 자세히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으니 이후의 상황에 관심을 두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본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행하심을 보며 3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심문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들었던 말씀이 다시 떠올랐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고백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하신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올 것이라는 말씀도 이미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가르치신 말씀이었습니다.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말씀도 성전 된 주님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곧 요나의 표적을 뜻했습니다.
유다는 심문받으시는 예수님께서 위기의 순간에도 한 말씀도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평안할 때와 고난받을 때의 말씀이 다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마음속에 ‘저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시구나.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참으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분이며 죽고 부활하실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밀려왔을 수 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귀로만 들었던 말씀이 이제 그의 심령을 파고든 것입니다.
동시에 주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두려운 말씀도 떠올랐을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는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누가 그릇에 손을 넣었는지 쉽게 알 수 없었지만, 유다는 그 말씀이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시는 모습을 보면서 죄의 값에 대한 두려움과 마주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피 값으로 팔았지만, 그 피 값이 이제 자기의 죄 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정죄됨을 보고”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정죄를 통하여 유다 자신이 정죄되었다는 뜻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돌을 던질 때 그 돌이 도리어 나를 정죄하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죄를 분별하는 사람은 자신도 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받으신 심문과 재판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받으신 심문과 재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곧 자신의 정죄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무죄한 피”는 죄 없는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바로 그 피를 자신이 팔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신명기 27장 25절에는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하여 죽이려고 돈을 받은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침내 이 말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 삼십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 무죄한 피를 흘리기 위하여 받은 뇌물이며, 자신을 저주 아래 두는 죄의 값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뉘우침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정죄를 보며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직 주님께로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갔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다는 죄 없는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두려움이 곧 회개는 아니었습니다. 뉘우침이 회개로 이어지려면 자기 자신이나 사람에게로 향하지 않고 주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죄의 무게를 깨달았을 때 어디로 향하는지가 생명과 사망을 나누게 됩니다.
 
 
2. “네가 당하라”는 세상의 대답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정죄되시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무죄한 피를 팔아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뉘우친 가운데 은 삼십을 들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이 받은 돈을 돌려주면 모든 일을 되돌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그 책임은 네가 져라”, “그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네가 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유다와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을 계획하고 돈까지 지불했지만, 정작 유다가 죄를 고백하며 찾아오자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렸습니다.
뒤에 빌라도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뒤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꿈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어 했지만, 백성은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부당하게 고소당했을 때 아가야 총독 갈리오가 비슷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바울에게서 자신이 판단할 만한 죄를 찾지 못하자 유대인의 율법에 관한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처리하라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도, 빌라도도, 갈리오도 모두 자신은 책임이 없다며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지만 그곳에서 죄의 해결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찾아간다고 죄가 해결되겠습니까? 돈을 다시 돌려준다고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유다는 자기 마음에 죄책이 밀려왔을 때 철저히 인간적이고 계산적인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은 삼십을 받았으니 은 삼십을 돌려주고, 자신이 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무죄하시니 내게 죄가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받은 은을 성소에 던지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것은, 사람을 찾아간 그가 아무런 해결도 얻지 못하고 절망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던진 은을 거두면서 그것을 성전고에 넣어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피 값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3장 18절에는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부정하고 가증한 방법으로 얻은 돈은 성전에 가져오지 말라는 뜻입니다.
앞서 신명기 27장 25절에서는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죄한 사람을 죽이려고 주고받은 돈은 피 값이므로 성전고에 넣어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의 이 규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 삼십을 유다에게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유다에게 돈을 주어 예수님을 붙잡게 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 돈을 피 값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들의 입으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피 값은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기 위하여 지불한 돈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처음부터 이 일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준 돈이 피 값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성전고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그 피 값을 지불한 자신들의 죄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외적인 규정은 지키려고 했지만, 그 율법이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의논한 뒤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 밭을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곳을 ‘아겔다마’, 곧 피밭이라고 부릅니다. 유다가 불의의 삯과 관련된 밭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곳이 피밭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토기장이의 밭은 힌놈의 골짜기와 관련된 곳입니다. 힌놈의 골짜기는 우상숭배가 행해졌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고, 몰렉에게 자녀들을 산 채로 불살라 바쳤습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솔로몬 말기에 유다 땅으로 들어와 깊이 자리 잡았고, 뒤에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그곳의 우상숭배를 폐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힌놈의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기드론 시내로 이어집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감람산이 나옵니다. 힌놈의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가 이어지는 지점에는 나그네와 이방인들의 묘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과 관련된 아겔다마, 곧 피밭입니다.
예레미야 7장과 19장 등에는 이곳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녀들을 불살라 우상에게 바쳤던 사당은 도벳 사당이라고 불렸습니다. ‘게힌놈’, 곧 힌놈의 골짜기에서 지옥을 뜻하는 ‘게헨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곳은 우상에게 자녀들을 불살라 바치던 피와 심판의 장소였습니다.
힌놈의 골짜기에는 옹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흙이 많이 있었습니다. 토기장이들이 그곳에서 진흙과 찰흙을 채취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들어가는 예루살렘 성문을 옹기문이라고 불렀습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토기장이의 비유도 이 배경과 관련됩니다. 토기장이가 자기 뜻대로 옹기를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신다는 비유입니다.
무죄한 피를 팔아 받은 은 삼십은 결국 피밭을 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의 형식을 따라 그 돈을 성전고에는 넣지 않았지만, 그들의 죄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다도 은 삼십을 돌려주었지만 자기 죄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인은 자기 죄를 돈으로 갚거나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네가 당하라”는 대답밖에 얻지 못할 때, 우리가 향해야 할 분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예수님을 팔지 말고 예수님을 얻으십시오
 
우리는 가룟 유다를 보면서 그가 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돈궤를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회계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또 하나의 사건은 한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일입니다. 그 향유의 값은 삼백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일 년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유다는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왜 허비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고 그 발을 닦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것은 허비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그의 마음은 재물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돈궤를 맡았던 그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은 삼십 세겔은 아주 큰돈은 아니었습니다. 한 세겔을 약 4일 임금으로 본다면 은 삼십 세겔은 약 120일, 곧 넉 달 정도의 임금에 해당합니다. 아주 작은 돈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큰돈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욕심을 낼 만한 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1장 32절에 따르면 은 삼십 세겔은 노예 한 사람의 값이었습니다.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아 죽이면 소의 주인이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어야 했습니다. 칼빈의 주석에서는 이것을 목동이 한 해 동안 받는 삯으로 설명합니다. 정확한 가치를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종의 값에 팔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종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팔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종으로 오셨기 때문에 종의 값에 팔리신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미디안 사람, 곧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넘어갈 때에는 은 이십에 팔렸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팔려 가는 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종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셨고, 종의 값에 팔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방식으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학적으로 팔았고,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팔았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계산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을 희생하여 민족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논리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위와 성전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를 내세우지만 결국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얻어야 합니다. ‘재물로 예수님을 산다’는 표현이 다소 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보화이십니다. 밭에서 보화를 발견한 농부가 기뻐하여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말씀의 비밀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가 얻어야 할 참된 보화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은 예수님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으면서 그것을 허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보다 값진 일임을 알았습니다. 유다는 그 일을 낭비라고 했지만, 여인은 자기의 귀한 것을 드려 주님을 높였습니다.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셨을 때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에게 재물은 더 이상 붙들어야 할 우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얻었기 때문에 자기의 재물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을 나의 예수님으로 삼습니다. 우리의 재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참된 보화로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재물을 자기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재물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재물을 주를 위하여 사용함으로 예수님이 가장 귀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칼빈이 이탈리아에 머물렀을 때 페라라의 공작부인 르네와 같은 사람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칼빈 주변에는 자신의 재물로 종교개혁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책을 쓰고 출판하는 일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습니다. 대서사를 두어야 했고 인쇄를 위해서도 재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통하여 칼빈은 책을 쓰고 복음을 위한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금산교회의 역사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부유했던 조덕삼 장로님은 자기의 땅을 드려 금산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교회에서 이자익 목사님과 같은 귀한 인물이 나왔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손에 드려지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일꾼이 세워지는 열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재물을 하늘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재물 자체를 들고 하늘나라에 간다는 뜻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주를 위하여 사용한 재물을 상급으로 가져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고 주님께서 쓰시도록 내어 드린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 아직 어린 나귀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충분히 익지 않았고 준비되지 않았다고만 말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더 익었든 아직 어리든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시면 주의 소용대로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은 삼십을 얻으려 했지만, 결국 그 돈도 잃고 자기 생명도 잃었습니다. 반면 주님께 자기의 것을 드린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참된 보화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파는 값을 받으려 하지 말고,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의 소용대로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4. 뉘우침과 회개는 다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은 유다가 예수님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뉘우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회개하다’라고 번역되는 말과 다릅니다. 회개한다는 말은 ‘메타노에오’이고, 유다가 뉘우쳤다고 할 때 사용된 말은 ‘메타멜로마이’입니다. 가룟 유다의 뉘우침은 참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뉘우침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를 짓기 전으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원상 복구하려는 마음입니다. 유다가 은 삼십을 돌려주려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돈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으니 그 돈을 되돌려 주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한다고 해서 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리창을 깨뜨리고 그 값을 물어 주었다고 해서 유리창을 깨뜨린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배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 고백하는 것으로 죄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유다는 제사장들을 찾아가 자기 죄를 고백했지만, 그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제나 대제사장을 찾아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죄를 말하여 잠시 마음이 시원해질 수는 있지만, 사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를 수 없습니다.
유다는 은 삼십을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값은 사망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 사망의 값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값을 스스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일을 완전히 원상 복구할 수도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거의 다 했습니다. 자기 죄를 인정했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으며, 받은 돈을 돌려주어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일종의 자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뉘우침일 뿐이었습니다. 자수했다고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돈을 돌려준다고 죄 값이 치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뉘우침만으로는 죄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뉘우친다고 죄가 없어지지 않고, 죄 값이 치러지지도 않으며,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뉘우침의 자리에서 어디로 향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 향합니까? 사람에게 향합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로 향합니까?
가룟 유다는 먼저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은 삼십을 돌려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해결을 얻지 못하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스스로 감당하려 했고, 결국 절망하여 자기 생명을 끊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사람은 남을 정죄하거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잘못을 인정했는데 왜 나를 용서하지 않느냐”고 하며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기 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스스로 자포자기합니다. 주님께로 향하지 않는 뉘우침은 결국 이 두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히도벨도 이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계략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압살롬에게 가서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다윗은 후새를 압살롬에게 보냈고,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이 아니라 후새의 계략을 따르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계략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어떤 주석은 아히도벨과 가룟 유다를 구속사적으로 연결합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결국 자살했습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끝내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뜻과 자기 판단 안에 머물다가 절망에 이르렀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짓기 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디로 향합니까?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과거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살을 잘못 쏘아 엉뚱한 과녁을 맞혔다고 생각해 봅시다. 다시 이전 자리로 돌아간다고 해서 이번에는 과녁을 정확히 맞힐 수 있겠습니까? 실력이 없어서 화살을 잘못 쏘았다면 같은 자리에서 다시 쏘아도 또 빗나갈 수 있습니다. 뉘우침은 이전 자리로 돌아가 다시 해 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화살을 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회개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가슴을 치는 것도 회개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뉘우침의 순간에 자기 내면으로만 깊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왜 이럴까”라고 끊임없이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 자기 자신을 챙기려고 합니다. 건강도 챙기고 마음도 챙기고 삶도 챙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맡은 일을 잘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챙기기 전에 먼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맡기는 가운데 챙겨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챙기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챙기기 전에 맡기십시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가 가룟 유다와 같은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받은 돈을 돌려주고, 자기가 지은 죄를 고백하고, 자기가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려 했습니다. 끝내 자기 죄의 값을 자기 생명으로 치르려 했습니다.
사람에게 내어놓는다고 죄가 해결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시원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찾아간 사람들보다 훨씬 가까이 계십니다. 뉘우침의 자리에서 자신만 바라보지 말고, 사람에게 해결을 구하지 말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이루는 회개
 
회개는 생명의 비밀이며 이전보다 이후를 낫게 하시는 비밀입니다. 회개에는 문을 여는 열쇠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진 열쇠에는 처음부터 문을 열 수 있는 홈이 파여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그 열쇠를 가지고 이 문에도 넣어 보고 저 문에도 넣어 보지만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열쇠에 홈을 파 주십니다. 그러면 그 열쇠를 넣는 순간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회개의 비밀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회개는 생명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러나 그 열쇠가 실제로 문을 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단지 과거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이켜 주님께 맡기고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화살을 잘못 쏘아 과녁이 아니라 항아리를 깨뜨렸다면 단순히 “다시 한번 쏘아 보자”고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내가 화살을 잘못 쏘아 항아리를 깨뜨린 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 잘해 보겠다”고 자기 힘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능력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활시위를 당기면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맞힌 것처럼 정확하게 맞힐 줄 믿습니다.
특별히 청년들과 30대 성도들을 지도하다 보면 매우 예민한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기가 한 말과 행동을 깊이 생각하고, 작은 실수도 크게 느끼며, “내가 왜 그랬을까”라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예민함 속에서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와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다윗도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가 그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은 하나님께 붙들렸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에도 다윗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죄를 깨닫고도 사람을 찾아갔으며, 사람에게서 해결을 얻지 못하자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죄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만으로 두 사람의 길이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죄를 깨달은 뒤 누구를 바라보았느냐에 따라 그들의 길이 달라졌습니다.
지난주에는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주님을 바라보는 통곡이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주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주님과 눈이 마주쳤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주님을 부인했다는 사실만 생각하며 자기 안으로 침잠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시는 주님을 보았고, 그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통곡했습니다. 그의 통곡은 주님을 바라보는 통곡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면서 항아리를 깨뜨릴 수도 있고, 화살을 잘못 쏘아 더 큰일을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붙들면 우리가 돌이켜 변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회개하게 하십니다.
결국 회개는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사건과 가룟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범사에 주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언제든지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버릇처럼, 습관처럼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는 존재의 신앙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잠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전체가 항상 주님께 밀착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이라는 값으로 산 자들이므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도, 연약함도, 실패도 우리 스스로 짊어지고 해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회개는 뉘우침과 다르고 후회와도 다릅니다. 후회할 일이 있으면 후회하십시오. 그러나 그 후회로 주님께 향하십시오. 과거의 늪 속에 매여 더욱 침잠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과거는 감사의 영역이고, 현재는 은혜의 영역이며, 미래는 상급의 영역입니다. 십 분 전이나 일 분 전에 일어난 일이라도 그것이 감사의 능력으로 주님을 찾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비밀입니다.
“내가 왜 이럴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보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럴까”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 생각이 들 때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가룟 유다의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은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가룟 유다는 세상 근심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깨달았고 깊이 뉘우쳤지만, 그 근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찾아가고, 자기 방법으로 원상 복구하려 하고, 끝내 자기 자신을 바라보다가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근심할 때에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사무치는 일이 있어도 너무 깊이 자기 자신에게만 들어가지 마십시오. 두 번, 세 번 계속 자신을 파고들지 말고 주님께 맡기십시오.
챙기기 전에 맡기십시오. 우리가 챙겨야 할 일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맡기는 가운데 챙겨야 하고, 주님 안에서 변화되는 가운데 챙겨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1절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맺는 열매를 말씀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곧 참된 회개는 먼저 우리를 간절하게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간절히 찾게 합니다.
또한 변증하게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하며,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바로 보게 합니다.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분명하게 깨닫게 합니다.
또한 분하게 합니다. 이것은 죄가 싫어진다는 뜻입니다. 회개할 때 이전에 좋아하고 즐기던 죄가 싫어집니다. 이전에 죄를 짓던 곳에 다시 가더라도 이제는 찬송이 나옵니다.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게 됩니다.
또한 두렵게 합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도망하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편으로 나아가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사모하게 하고 열심 있게 하며 벌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열심을 내며, 죄를 가볍게 넘기지 않고 바르게 처리하고자 하게 합니다.
우리는 자기 죄를 모두 드러내 놓아도 스스로 그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죄의 값을 직접 치르거나 형벌을 감당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면 죄의 값과 형벌이 없어진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회개의 일곱 가지 모습을 말한 뒤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의식과 형벌을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깨끗함을 받고, 간절함을 얻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그분께 나아가는 은혜의 역사가 있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