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3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1 |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 누가 왕인가? | 마 27:1-2, 11-14; 막 15:1-5; 눅 23:1-12; 요 18:28-38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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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23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1


빌라도와 헤롯의 심문: 누가 왕인가?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 27:1-2, 11-14; 막 15:1-5; 눅 23:1-12; 요 18:28-38

(마태복음 27:1-2, 11-14)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마가복음 15:1-5)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누가복음 23:1-12)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요한복음 18:28-38)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녹취록

 



1. 심판받으시는 참된 왕
 
우리가 지난주까지 예수님께서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신문을 당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을 당하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하자,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관할에 속하지 않으므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갈릴리 사람들도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왔습니다. 헤롯 안디바도 유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헤롯 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의 왕은 헤롯 대왕이었지만, 이때는 헤롯 대왕이 죽은 뒤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헤롯 아켈라오도 일찍 쫓겨났고, 그 자리를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헤롯 안디바에게 보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와 헤롯에게 차례로 신문을 당하십니다.
이 신문을 관통하는 큰 주제는 “누가 왕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곧 “누가 메시아냐?”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선지자직과 제사장직과 왕직을 수행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도 예수님께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동시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신문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씀하셨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으며, 앞으로 권능의 우편에 앉으셨다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시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신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했습니다.
누구에게 심판하는 권세가 있으며, 누구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까? 심판권과 사죄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권과 사죄권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심판을 받으십니다. 죄가 없으시고 죄를 사하시는 분이 죄인으로 취급받으시며, 친히 하나님이신 분이 신성모독을 했다는 고소를 받으십니다. 생명이신 분이 죽음의 심판을 받고, 생명의 빛이신 분이 어둠의 심판을 받고 계십니다.
이 심판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앞에 섰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려야 했던 대제사장들이 오히려 메시아를 죽이는 일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메시아의 예언을 다루던 서기관들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정국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장로들 역시 그들과 함께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움직여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모든 어둠이 하나로 모여 빛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갔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이미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관할하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26년부터 36년 혹은 37년까지 약 10년 동안 그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뒤에도 몇 년 동안 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성경에서 디베료라고 부르는 티베리우스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수리아에 속해 있었고, 수리아 총독 아래에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최종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루살렘은 로마에도 매우 중요한 도시였으므로 그곳을 다스리는 자리는 장래가 유망한 사람이 맡는 자리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온 공회가 새벽에 함께 의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의논하다’는 말에는 함께 모여 한목소리를 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시인하고 고백할 때에도 한목소리를 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자신을 부인해야 예수님을 시인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인한다는 것은 고백한다는 뜻이며,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함께 모여 한목소리를 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위해 한목소리를 냈느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정죄하기 위해 의논했습니다. 누구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죽어야 하며 사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빌라도와 헤롯도 전에는 원수였지만 이날에는 서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한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이미 알고 예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세 차례 예언하실 때마다 그 내용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전에 세 번째로 수난을 예언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나 그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마 20:18-19)
주님의 말씀 그대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사용된 이방인의 손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통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고백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주님께서 알지 못하신 가운데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에게 넘겨지고 어떤 고난을 받으며 어떻게 죽으실지를 이미 아셨습니다. 또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심판받으셨지만, 그 모든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구원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진리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사람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 고발했는지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고발에는 모두 거짓과 악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첫 번째 고발은 예수님께서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입니다. 미혹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거짓되고 그릇된 길로 이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셨습니까? 주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마귀 사탄은 거짓의 아비이고 흑암이며 사망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진리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이시고 지혜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예배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메시아가 오실 것을 말하자 주님께서는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요 4:26)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진리를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은 미혹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게 하신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며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을 거짓으로 이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하고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비진리와 불의와 거짓과 음흉함과 사기와 뇌물이 가득했습니다. 흑암이 크고 거짓이 가득하여 도무지 소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진리와 의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진리이신 주님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시며, 지혜자이시고, 유일하신 선생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거짓길로 이끄는 자라고 고소했습니다. 거짓이 진리를 거짓이라고 부르고, 미혹하는 자들이 참된 목자를 미혹하는 자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 고발은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발 역시 완전한 거짓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책잡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린 뒤 고소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동전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누구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이사에게 속한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금을 금했다고 정반대로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못을 찾지 못했는데도 처음에 세웠던 거짓된 결론을 끝까지 붙들고 주님을 음해했습니다.
마귀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람을 거짓으로 넘어뜨리려 할 때 먼저 말로 떠보고 올무를 놓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실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자신의 생각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 품었던 악한 생각을 따라 끝까지 그를 음해합니다. 그 안에는 시기와 질투와 악의가 있습니다.
우리도 막연히 어떤 사람이 싫고 그릇돼 보인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인해 보았을 때 사실이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처음 가졌던 생각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 사람을 판단한다면, 없는 것을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학생들에게 주의 종들은 서로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도사님들끼리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하더라도 서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가까이 가야 합니다.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은혜의 간증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함께 고백하는 아멘이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는 것은 흑암의 세력과 거짓의 세력이 행하는 음해입니다. 영적인 시기와 질투와 악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발했습니다.
세 번째 고발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지만, ‘자칭’이라는 표현에 지나치게 나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왕 그리스도라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며 왕이라고 드러내 놓고 반복하여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성전을 헐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시며 자신이 참성전이심을 나타내셨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참목자이심도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왕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리스도라는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정치적인 왕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차이를 이용하여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왕이라고 하신 것은 본디오 빌라도가 판단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보였고,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 18:31)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도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마 27:19)라고 전했습니다.
율법사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든지 부인하든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문제는 그들 가운데 다루어야 할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앙의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루어야 할 일을 세상의 법정으로 가져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것 역시 마귀 사탄의 궤계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고백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가르쳐 주신 분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왕 그리스도라고 하신 것을 죄목으로 삼았지만, 성도에게는 바로 그 사실이 교회를 세우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3. 빌라도의 세 가지 질문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소하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합니다. 사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빌라도는 크게 세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이고, 두 번째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이며, 세 번째는 “진리가 무엇이냐?”입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직접 답하지 않으시고 “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모두 이와 같은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실상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빌라도는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행악자, 곧 악을 행한 자라고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관정에서 신문을 받으셨습니다. 관정은 ‘프라이토리온’이라고 하는 관사 또는 관청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자신들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방인의 관정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집이나 관청에 들어가면 그곳에 누룩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무교절이며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관정까지 끌고 왔지만 자신들은 바깥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새벽에 그들에게 나와 무슨 일인지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모순을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를 보고 죽음이 지나간 절기입니다. 그리고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그들의 눈앞에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려고 하면서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정결을 지키겠다고 관정 밖에 서 있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었습니다. 작은 의식 하나는 지키겠다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식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져 유월절의 실체를 보지 못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유월절을 지켜왔지만 유월절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망각했습니다. 실체이신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형식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가득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불렀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했지만 자신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데려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고, 끝내 십자가의 죄패에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이 기록되었습니다. 그 죄패가 십자가 위에 달렸고, 참된 왕이신 주님께서 저주의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거짓이 없으며 죄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이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이를 설명할 때 주님께는 죄성도 없고 죄향도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본성과 죄를 향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죄를 지어 볼까 생각하다가 참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죄를 지어 볼까 하는 마음 자체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결하시고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주님을 행악자라고 고발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시는 참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온갖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중풍병자와 걷지 못하는 사람을 낫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시며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화평을 주시고 천국 헌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율법사들이 하나님의 지식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디베랴 호숫가에 배를 띄워 놓고 말씀하셨고, 산에 올라가 산상보훈도 가르치셨습니다. 자기들만 공유하는 거룩한 지식이라고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악을 행한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삶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복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생명의 진리를 전하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악을 행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주님께서는 위로 성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내셨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래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목숨을 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행악자가 아니십니다. 빌라도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었지만 끝내 주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4.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는 길
 
빌라도가 던진 세 번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였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신림동의 한 교회에서 중고등부를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탄 전야에 학생들과 성극을 했는데, 제가 희곡을 써서 공연했습니다. 그 희곡의 제목도 “진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요한복음의 이 본문을 가지고 빌라도와 빌라도의 아내가 등장하는 성극을 만들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입니다. 헬라어로는 “티 에스틴 알레테이아?”, 라틴어로는 “퀴드 에스트 베리타스?”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던진 마지막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진리이시고 길이십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이신 분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은 뒤 주님의 사형 집행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신문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코그니티오’라고 합니다. 죄인을 신문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지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첫 부분에는 우리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나옵니다. 그때의 지식도 ‘코그니티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를 일으키시려고 참과 거짓이 대립하는 자리에서 거짓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거짓의 심판을 받으시면서 참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말씀에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옛 성경에는 화평을 누린다고 번역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신다는 것은 진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제가 이번 주 내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부분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면 최종적으로 ‘예’와 ‘아니요’를 분별하게 됩니다. ‘예’는 영생의 길이고 ‘아니요’는 영벌의 길입니다. ‘예’는 하나님 편이고 ‘아니요’는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진리의 편에 세워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매일 비진리의 책과 사람을 현혹하는 글을 읽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운동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방송이나 학습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무런 대가 없이 전달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부터 진리가 나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 안에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이 아름답게 보이고, 흐트러져 있던 모든 것이 새롭게 질서를 잡아 제자리를 찾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고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립니다. 화평은 샬롬이고, 샬롬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에 갈라디아서 4장까지 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는 우리가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 곧 사라의 후손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징계를 받으심으로 우리 안에서 진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난주에는 가룟 유다가 뉘우쳤지만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리가 역사하면 단순히 뉘우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회개는 돌이켜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돌이키고 온전하게 합니다.
거짓이 우리를 많이 대적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속 침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도 침묵하셨고, 헤롯에게 가셨을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거짓은 거품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그대로 두면 사라집니다. 괜히 손을 대어 손에 거품을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잠잠하셨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생명이 죽음의 심판을 받고, 빛이 어둠의 심판을 받으며, 진리가 거짓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잠잠하셨습니다.
거짓은 하늘로 올라가는 풍선과도 같습니다. 대단하게 부풀어 오르고 높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얼마 가지 못해 터지고 맙니다. 그러나 진리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짓 앞에서 너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거짓은 사탄의 궤계이고 흑암의 권세이지만 거짓 자체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을 폭로하시기 위하여 그것을 잠시 사용하실 뿐입니다. 거짓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함께 의논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를 중심으로 모두 머리를 모아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신문을 계속해도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자, 나중에는 한 사람이 죽어 모든 백성이 평안한 것이 좋다는 논리까지 내세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습니다.
진리는 사람들이 의논하고 타협하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화살과 같습니다. 화살처럼 곧게 나아가야 합니다. 이리저리 굽어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열쇠 구멍은 작고 막혀 있지만, 그 구멍에 맞는 열쇠가 들어가면 문이 열립니다. 그것이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입니다. 진리가 들어가면 닫힌 문이 열립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니라”고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멘, 아멘” 하면 됩니다.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진리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은 가장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리가 가장 풍성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진정한 답을 주셨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는 답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거짓에는 침묵하십시오. 주님과 같이 침묵하십시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주님과 한목소리를 내게 됩니다.
 
 
5. 확실한 십자가를 붙드는 믿음
 
이번 주에 길을 가다가 매미가 우는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매미가 울 때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습니다. 그런데 숨을 내쉴 때가 아니라 들이마실 때 몸이 올라가면서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도 계속 숨을 불어넣지만 소리는 다른 쪽을 통해 나옵니다.
진리를 말할 때 거짓을 향해 계속 말을 내뱉으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들숨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듣는 소리를 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멘, 아멘” 하면 그것이 이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쏟아낸다고 반드시 진리의 소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소란을 일으켰다고 고발했습니다. 어떻게 진리를 소란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들이 은혜를 소란이라고 불러도 주님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시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복음의 소리입니다.
거짓은 서로 합작하여 큰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진리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보아도 보지 않는 것 같고 들어도 듣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울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향기다”라고 말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받아들이고 섭취해야 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그것이 매미의 소리와 같은 진리의 소리가 됩니다. 꽃도 소리를 내고 열매도 소리를 냅니다. 윤택하게 자라고 참고 견디다가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도 소리입니다. 우리 안에서 인내의 소리와 결심의 소리가 나야 합니다.
시편 38편 13절부터 15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38:13-15)
다윗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반박할 말을 쏟아내기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입을 닫을 테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벙어리와 같으니 주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한 번 발하면 천하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목소리가 울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내는 공명관이 되고 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두드리시면 소리를 내는 주님의 악기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39편 9절에서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9)
우리에게는 잠잠해야 할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소리가 납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는 영역이 있어야 우리의 지경도 넓어집니다. 인내로 기업을 얻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서 속이 시원하다면 그 가운데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내가 참고 기다릴 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결론으로 한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불확실한 것과 관련하여 우리 교회 청년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요즘을 전환기적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불확실한 것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김문수 성도님과 함께 주일학교에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이런 내용으로 설교할 것이라고 말하며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옛날 같으면 하루 종일 걸릴 일이지만 지금은 전화하면 20분 만에 와서 처리해 줍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불평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저녁 뉴스를 보니 그곳에서 약 6킬로미터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졌다는 소식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이 기쁜 일입니까,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기도해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좋은지도 사실은 모릅니다. 분명히 내가 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내게 좋은 결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학위를 받을 때 그러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위를 받는 것이 좋은지, 받지 않는 것이 좋은지 기도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배우고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확실합니다. 십자가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쓸데없는 것으로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옳은지 좋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괜히 힘들어하고, 어떤 때에는 괜히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으로는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 앞에 더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앞에 있는 다리가 끊어진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르며 계속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차의 방향을 강제로 돌리실 수도 있지만, 타이어에 펑크가 나게 하여 우리를 멈추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붙드시므로 살고, 우리의 손을 붙드시므로 큰 사고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일을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하는 많은 일에는 절대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좋겠는데, 이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좋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모든 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바에 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신문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심으로 내가 진리 가운데 서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밝히고 있는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재판받으셨습니다. 날 위하여, 내 대신에, 나 때문에 재판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일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배우고 확신한 십자가의 진리로 감사해야 합니다.
함께 고백합시다.
배우고 확신한 것으로 감사하고, 알 수 없는 일로 두려워하거나 교만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