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30 | 주일낮예배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2 |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넘김 | 마 27:15-26; 막 15:6-15; 눅 23:13-25; 요 18:39-40 | 문병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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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8월 30일 주일낮예배 설교  |  사복음서 병행 강해 182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넘김


문병호 목사


설교본문  |  마 27:15-26; 막 15:6-15; 눅 23:13-25; 요 18:39-40

(마태복음 27:15-26)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가복음 15:6-15)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누가복음 23:13-25)   [13]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 (없음)  [18]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21]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24]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요한복음 18:39-40)   [39]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녹취록




1. 우리를 대표하신 분이 아니라 대신하신 주님
 
주님은 우리를 대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어디에나 대표는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대신할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대표는 함께 누리는 자리일 수 있지만, 대신한다는 것은 자기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대표하여 죄인의 한 사람으로 서신 분이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신 분입니다.
디도서 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주님께는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습니다. 실제로 죄를 지으신 적도 없으시고, 죄를 짓고자 마음을 품으신 적도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지만 우리와 달리 죄가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주님이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죄를 모르신다는 것은 죄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의 본성이 죄를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에 반응하고, 죄의 유혹을 느끼고, 죄에 대한 충동을 느끼며 불법을 행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죄의 유혹에 끌리는 마음도 없고, 죄의 달콤함을 바라는 마음도 없으며, 죄 때문에 일어나는 내적인 갈등도 없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고 죄인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 자신이 죄인이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기 위하여 그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죄인의 대표가 아니라 죄인을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은 그리스도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
이렇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고소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존경받고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백성을 다스렸고,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암송하며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며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죄를 씌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로마의 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일 수 없으니 새로운 죄목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님이 반란을 일으켰고, 가이사에게 세금 내는 것을 금했으며,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유대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선동했다고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을 백성을 미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들의 고발을 듣고도 예수님에게서 그 죄에 해당하는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빌라도가 반복하여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냥 풀어주기가 어려우니 가볍게 매를 때려 놓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매질은 뒤에 예수님이 당하신 잔혹한 채찍질과는 다릅니다. 죄는 없지만 백성들이 이렇게 소란을 일으키니 어느 정도 징계하고 풀어주겠다는 뜻입니다.
헤롯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롯에게 보내졌지만 헤롯 역시 예수님에게서 죽일 만한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관여한 사람들이 오히려 계속해서 예수님의 무죄를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여기에 빌라도의 아내까지 등장합니다.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
여기에서 ‘옳은 사람’은 의인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상관하지 말고 이 재판에서 손을 떼라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도, 헤롯도,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을 계속 보여줍니다. 비진리가 진리를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어둠이 빛을 덮어 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은 눌리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편안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리 편에 서고 빛 가운데 거할 때 기쁨과 소망이 있습니다.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 사람은 자꾸 어두운 곳으로 향합니다. 먼지가 많은 곳, 동굴처럼 막힌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죄에서 떠나면 창문을 열고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빌라도가 지금 어둠이 역사하는 가운데 들어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를 통하여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경고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불의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죄인의 자리에서 신문을 받으셨고, 죄인으로 판결받으셨으며, 죄인이 받을 죽음과 저주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도 당시 로마의 가장 극악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으신 주님 자신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죄인의 마음에서 죄를 경험하여 죄를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판단하면서도 자기 안에 비슷한 욕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비난하면서도 그가 죄를 통하여 얻은 것을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에는 이런 문제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와 아무 관계가 없으시면서 죄를 판단하십니다. 예수님 역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와 가까워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많이 경험해야 죄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죄의 소욕으로부터 멀어지고, 죄를 접하는 것으로부터도 멀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이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아지셨습니다.
대표는 많습니다. 그러나 나를 대신해 줄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어떤 소유를 조금 대신 내어줄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을 대신할 사람, 내 존재를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자리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가룟 유다조차 예수님을 팔고 난 뒤 예수님의 피를 무죄한 피라고 인정했습니다. 베드로도 우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이 은이나 금 같은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9)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죄가 없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왜 그토록 죽이려 했습니까?
가야바는 정치적인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사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두면 로마가 와서 자신들의 자리와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치적인 두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한 단어로 보여줍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8)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기는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닙니다. 여기에서의 시기는 상대방을 끌어내리고 없애서 자기를 높이려는 시기입니다. 오늘 백성들이 결국 “예수를 없이 하소서”라고 외치는 데까지 갑니다. 상대가 없어져야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그릇되게 상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시기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상대는 실제보다 낮추고 자기는 실제보다 높여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기는 남을 해치는 것만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시기에 빠진 사람은 남을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놓칩니다.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기는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진리에 거해야 합니다. 진리에 거하면 하늘도 더 맑아 보이고 공기도 더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진리는 사람을 밝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거짓과 시기는 사람을 계속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갑니다.
시기는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에서 비롯됩니다.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상대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없애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시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귀하게 여기지만 시기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배척하며 끝내 없애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시기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별히 영적인 일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의 믿음과 마음을 판단하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영적인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믿음과 은혜를 감사하게 누려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의 말씀처럼 내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기가 있으면 하나님이 이미 내게 주신 것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와 은사를 감사히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합니다. 손이 어떤 일을 하려면 발이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무언가를 찾으려면 눈도 필요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 비교하고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릴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것을 시기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감사함으로 설 수 있습니다.
 
 
2. 시기는 자신을 잃게 하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시기는 가족 사이에서도 무서운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결국 죽이려 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자 사울은 다윗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잘되는 것이 자기의 자리를 빼앗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시기는 상대방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무너뜨립니다. 남을 계속 바라보다가 자기 자신을 놓치게 합니다. 자기의 거울은 보지 않고 남의 모습만 바라보게 합니다. 끝내 자기 영혼과 자기 삶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촌이 잘되면 같이 기뻐하고 도와주어야 할 텐데, 나보다 더 가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장 무서운 시기는 영적인 시기입니다. 내가 더 잘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남의 마음을 판단하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신 믿음을 감사히 누리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려 합니다.
로마서 14장 22절은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감사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으면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받은 것만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내게 주신 은혜가 작아 보입니다.
교회 안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발의 은사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손의 은사가 있습니다. 발이 가주어야 손도 일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찾으려면 눈도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눈이 발을 업신여길 수 없고, 서로 없어도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필요한 자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시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만들어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씨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씨는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무를 심을 수는 있지만 나무의 생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물을 줄 수는 있지만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심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내가 물을 주었다고 더 큰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이것이 참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지 못했고, 내 힘으로 자라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맡은 일을 감당한 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상을 주십니다.
밥을 지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쌀을 씻고 밥을 하고 상을 차리는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는 것은 결국 쌀 자체입니다. 사람이 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수고를 받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했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오히려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주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겸손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내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내가 크고 네가 작다고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사라집니다. 서로의 공로를 비교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기를 가지면 누릴 수 없습니다. 시기를 가지면 겸손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담대함도 없어집니다. 시기를 가지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를 버려야 합니다. 시기는 그릇된 판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자기 자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씀처럼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 때 서로 판단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잠언 17장 15절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 17:15)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그릇되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바로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을 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참된 왕으로 오시니 왕과 통치자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선지자로 오시니 율법사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시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대제사장으로 오시니 대제사장들이 시기했습니다.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 진정한 왕,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그분을 영접하지 않고 시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의 모습이 참 귀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주님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키려고 예수님을 시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요나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단은 왕자였고 지혜롭고 용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0장 13절에서 그는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하신 것처럼 다윗과 함께하시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택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자기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습니다. 왕자의 것을 다윗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시기를 넘어선 사랑입니다.
그래서 시기의 반대말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영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시기하지 않는다고 뒤처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5절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시기하면서 내 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성령께서 우리보다 더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야고보서 4장 2절도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2)라고 말씀합니다.
시기한다고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기는 하나님께서 이미 내게 주신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시기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히 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충성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자유이며 은혜를 누리는 길입니다.
 
 
3.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지도자들과 바라바를 선택한 무리
 
오늘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은 빌라도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조차 그들의 마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을 가르치고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하자 자기들의 자리가 위협받는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시니 통치자들이 시기하고, 선지자이시니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시기하고, 대제사장이시니 제사장들이 시기했습니다.
그 시기가 결국 예수님을 없애고자 하는 데까지 갔습니다.
빌라도는 명절의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유월절에는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므로 한 사람을 사면하는 일이 그 절기의 의미와도 잘 맞았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백성에게 선택하게 했습니다.
바라바는 평범한 죄수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유명한 죄수라고 하고, 다른 복음서들을 보면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한 사람이었으며 강도라고도 합니다. 이미 매우 악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빌라도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싫어해도 바라바와 비교하면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충동했습니다. 백성들이 직접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이 무리를 움직였습니다.
사실 백성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 그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말씀과 복음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예수님 옆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자기 위치와 권위를 지키려고 하면 성도들이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을 오히려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는 예수님께로 사람을 인도해야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게 했습니다.
빌라도가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묻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복음서마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의 요구는 분명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재촉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3절은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 말씀이 참 무섭습니다.
큰 소리가 진리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외친다고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큰 소리에 끌려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소리가 너무 많습니다. 정보도 너무 많습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생각하기 전에 많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따라가기 쉽습니다.
많이 듣는다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조회수가 많다고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이 따른다고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듣고 큰 소리가 난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는 말씀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진리는 사람을 거룩하게 합니다.
교회가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됩니다. 작은 등대와 같아도 됩니다. 바다에 폭풍이 치고 앞에 암초가 있을 때 멀리 작은 등대의 불빛 하나만 있어도 배가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장 큰 소리가 되려고 하기보다, 작은 빛이라도 분명한 진리의 기준을 보여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소리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없애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으므로 매를 때리고 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매질은 뒤에 나오는 채찍질과는 다릅니다. 훈계 차원에서 가볍게 징계하고 내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의 소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한 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채찍질은 단순한 매질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고문에 가까운 것입니다. 사람의 살을 찢고 몸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잔혹한 형벌입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매를 때리고 풀어주겠다고 했던 빌라도가 결국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넘겨주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진리를 알고도 사람들의 소리에 굴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자신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사람들의 말이나 분위기에 밀려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라바는 풀려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넘겨졌습니다.
이 역설적인 장면이 이제 복음의 더 깊은 의미를 보여줍니다.
 
 
4. 죄 없는 예수께서 죽고 죄인 바라바가 풀려나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넘겨지고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이 장면은 아주 선명합니다. 죄가 없는 분은 죽고, 실제로 죄가 있는 사람은 살아납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에 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강도라고도 불립니다. 죽음의 형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빌라도도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죄를 찾지 못했고, 빌라도의 아내도 의인이라고 증언한 분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예수님은 죽고 죄인 바라바는 풀려났습니다.
구약의 레위기 16장에는 속죄일에 두 염소를 세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죽여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안수한 뒤 광야로 내보냅니다. 아사셀을 위한 염소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을 보면서 그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풀려납니다.
죄 없는 예수님은 채찍을 맞고 십자가에 죽으시며, 죄 있는 바라바는 놓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바라바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하는데 죄 없는 주님께서 대신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말씀한 “대표”가 아니라 “대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라바를 대표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주님은 죄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와 같이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죄 없는 분으로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이 절기가 유월절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이 넘어간 날입니다.
그 유월절에 참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를 내어주십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가 대속을 받습니다.
물론 바라바가 실제로 영원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풀어주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구원받았는지를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라바가 놓이고 예수님이 죽으신 이 장면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교훈을 줍니다.
죄인은 놓이고 의인은 죽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이 살고 죽을 이유가 없는 분이 죽습니다.
그것이 대속의 그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죄가 없으십니다.
설교에서 계속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다고 반복해서 말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사람보다 조금 나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죄를 지으면서 조금 더 의로운 분도 아닙니다.
주님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입니다.
죄의 성향 자체가 없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죄에 끌리는 마음도 없습니다.
완전히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죄 없음 하나만 생각해도 우리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얼마나 많은 죄와 더러움이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정결함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시기를 바라며, 내 더러움을 하나라도 더 씻어주시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 외쳤습니다.
“예수는 없이 하소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리고 바라바에 대해서는 말합니다.
“바라바는 놓아주소서.”
이 장면이 얼마나 뒤집혀 있습니까?
의인을 악인이라 하고 악인을 놓아줍니다. 잠언 17장 15절의 말씀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뒤집힌 재판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재판은 불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운데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십니다.
우리가 바라바처럼 놓임을 받는 것은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대신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죄 없는 사람인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은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죄 없음과 그분의 대신하심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죄 없는 분이 대신하셨기에 그 피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대신 죽으셨기에 죄인이 놓임을 받습니다.
바라바가 풀려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자기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죽으셨구나.”
이 사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5.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 대신 죄로 삼으신 하나님
 
오늘 말씀의 모든 교훈은 결국 고린도후서 5장 21절로 모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습니다.
주님께 죄가 있어서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대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대표는 많지만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특별히 생명을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셨고,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셨지만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아내조차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죄인으로 정죄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죄인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면서 죄인처럼 취급받으셨고, 우리는 죄인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바로 그것을 말씀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이 억울한 재판을 받으셨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라바가 풀려나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바로 이 대신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 바라바입니다.
우리는 자기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먼저 그분의 죄 없으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죄행도 없고, 죄성도 없고, 죄의 성향도 없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입니다.
그리고 그 죄 없는 분이 나를 대신하셨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 안의 시기도 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죽이게 만든 것이 시기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리를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마음입니다.
요나단도 자기 왕자의 자리를 붙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시는 것을 인정하고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시기는 상대를 없애려고 하지만 사랑은 상대가 잘되는 것을 기뻐합니다.
시기는 자기 자리를 붙들지만 영접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에서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판단에서 영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경쟁에서 누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미움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누리면 다른 사람의 은혜를 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생명을 만들어낼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나는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알 때 겸손해지고 담대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않고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큰 소리에도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날에는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큰 소리가 진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외친다고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진리, 죄 없는 주님이 죄인을 대신하셨다는 진리,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큰 소리를 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작은 등대처럼 진리를 비추면 됩니다.
폭풍이 치고 암초가 있는 가운데 작은 빛 하나가 배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진리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붙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예수님은 의인이셨으나 불의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기를 떠나야 합니다.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소명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대표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은혜 안에서 진리와 영접과 누림과 사랑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